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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배(ship)에 비유하여, "항구에 접근하며 돛을 서서히 내리는 것과 같다"고 썼다. 그것은 '인생의 종착지'라는 고요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10년을 묘사하는 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돛을 내리기는커녕, 그는 건강의 하향곡선에 맞서 인상적인 저서 네 권을 더 남겼다. 2007년에는 『뮤지코필리아』, 2010년에는 『마음의 눈』, 2012년에는 『환각』,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는 『엉클 텅스텐』의 속편 격인 『나아가는 삶』을 출간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권의 책이 탈고를 앞두고 있었다.
지난 8월 30일 세상을 떠난 올리버 색스는 1933년 런던의 유대인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반의(general practitioner), 어머니는 외과의사였고, 숙부와 숙모는 발명가 겸 화학자 겸 내과의사였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과학적 태도'가 의무로 간주되는 환경에서 성장한 셈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미들랜드의 기숙학교로 보내져 무려 4년 동안 - '가족 없는 안전'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위험'이 더 나을 정도로 - 처참한 생활을 했다. 이처럼 모진 유년기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75년 후 『나아가는 삶』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 시절의 상황을 '멀리 유배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1943년 가족과 재회한 색스는 화학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결국에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지만, 격동의 시기에도 주기율표를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기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색스는 퀸즈칼리지와 옥스퍼드를 거쳐 1958년에 의사가 되었다. 196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5년간 인턴 훈련을 받는 동안에는 젊음의 치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곁눈질도 했다. 오토바이, 운동, 암페타민 등에 몰두하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머슬비치에 나가 역기를 들어올리며 근육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인마, 너는 연구실에서 암적인 존재야!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환자를 돌보는 게 낫겠다"는 꾸중을 듣고 신경화학연구실에서 쫓겨나자, 그는 정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1965년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뉴욕 브롱크스 소재)에서 환자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진료실에서 약 80명의 환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1920년대에 유행한 수면병(sleepy sickness)의 생존자들로, 파킨슨병 환자처럼 대부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고용량의 엘도파(파킨슨병 치료제)를 복용하면 무기력 상태를 벗어났지만, - 어휘나 취향이나 몸짓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 그들의 정신상태는 40년 전으로 돌아가 완전히 딴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환자들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주목한 색스는, 전통적인 이중맹검 시험을 일련의 질병일지로 각색하여 1973년 『사랑의 기적』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사랑의 기적』을 읽어본 러시아의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아가 색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루리아는 색스의 관찰 및 서술능력에 감탄을 연발하며, 19세기 신경학적 묘사(neurological narrative)의 전통을 떠올렸노라고 말했다. 색스는 『사랑의 기적』에서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것은 평생 동안 그의 주특기가 되었다. 즉, 그는 인구집단보다는 사례를 지향했으며, 환자와 거리를 두기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신경학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기보다는 책으로 펴내는 쪽을 택했다. 게다가 그는 현장방문(house calls)이라는 독특한 접근방법을 가미하여, 환자를 자연상태에서 만나려고 노력했다. 예컨대 뚜렛증후군에 걸린 외과의사가 수술하는 장면을 관찰했고, 자폐증 환자 템플 그란딘의 직장(콜로라도 대학교 동물학과)을 방문했으며, 청각장애인의 문화와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1985년 발표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색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줌과 동시에, 그의 과학적 신조를 분명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독일의 신경학자 쿠르트 골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신경장애란 새로운 평형점을 찾기 위한 도전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질병이나 부상에 대응하여 적응과 재조직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잠재되어 있던 내적 자원(inner resources)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색스에 의하면, 이 같은 변화에 반응하여 환자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임무라고 한다.
『나아가는 삶』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정신과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장애로 간주하던 시절에 성장하다 보니, 색스는 간혹 정신과적 낙인찍기(psychiatric labelling)의 치명적 결과를 의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개인을 질병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질병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부각시키는 긍정적 관점을 취했다. 그의 자유로운 생각은 때로 오리지널 병리학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뚜렛증후군 환자도 외과의사가 될 수 있고, 자폐증 환자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사례가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색스는 매사를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는데, 그 핵심내용은 '질병은 정상변이(normal varia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상변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특히 자폐증을 바라보는) 의학계의 시각에 반기를 든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색스는 '이론가'가 아니라 '스토리텔러'를 자처했다. 그는 종종 "남들은 질병사례를 이용하여 거창한 이론을 수립하지만, 나는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걸 더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 당연한 이야기지만 - 모든 스토리가 곧 하나의 이론이었다. 골트슈타인이나 루리아와 같은 선배들처럼, 그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뇌는 가소성(plasticity)과 보상(compensation)이라는 특징을 가진 유기체이며, 전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장기(organ)다"라는 이론을 뒷받침했다. 색스는 신경학적 묘사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 절정기를 이끌었던 인물임에 분명하다. 향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수백만 독자들의 마음과 심장 속에 전설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대화하는 도중에 수많은 명예학위, 수상실적, 펠로십 등을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간단히 "나는 좋은 의사였다고 믿어요"라고만 말했다. 그는 환자들이 자신을 신중하고 통찰력있는 신경학자로 인정하는 것을 느낄 때가 가장 좋았노라고 말했다.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밝힌 '원대한 포부'는 여전히 '좋은 아들'이 되는 거였다. - 다우어 드라이스마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의 심리학사(史) 교수로, 2005년 『The Nostalgia Factory』 집필을 위해 올리버 색스와 인터뷰했으며, 그 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 출처: Nature(http://www.nature.com/nature/journal/vaop/ncurrent/full/525188a.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