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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2) 순결한 창녀인 교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우트로피우스 강해’에서
[본문]
그리스도께서는 창녀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 창녀가 높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그분께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창녀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여인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들어가셨습니까? 벌거벗은 그 여인의 신적인 상태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창녀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창녀가 그분을 뵙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도망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되어버린 상처투성이의 여인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창녀를 맞아들이십니다. 정말 그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반지를 주십니다. 성령의 반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그대를 내 안에 품어, 그 누구도 감히 그대를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오! 목자가 그대를 품에 안고 간다면, 늑대가 다가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오나, 저는 죄인이며 더러운 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의사입니다.”
나의 벗들인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창녀를 당신의 아내로 맞으러 오셨습니다. 제가 창녀를 더러운 년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분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미친 사랑을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미친 사랑은 죄를 기워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허물과 부족함을 용서해 주십니다. 마귀의 딸이며 지상의 부당하기 짝이 없는 딸이 임금의 딸이 되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그 연인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그 연인께서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추한 것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미친 짓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종종 추한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처럼 하셨습니다. 추한 여인을 보시고, 미치도록 사랑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녀를 아내로 삼으시고, 당신 딸처럼 사랑하시고, 여종처럼 돌보시고, 동정녀처럼 지켜주시고, 정원처럼 담을 둘러주시고, 당신 지체처럼 아끼시며, 당신 머리처럼 돌보시고, 뿌리처럼 심어주십니다. 목자처럼 그 여인을 보살피시고, 신랑처럼 그 창녀를 아내로 맞으시며, 제단처럼 그 여인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을 아름답게 지켜주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의 안녕을 염려합니다. 오, 추한 신부를 아름답게 만드시는 신랑이시여!
에우트로피우스 강해 2장 11절
[해설]
예수님께서 걸림돌(skandalon)이며 동시에 반석(petros)인 베드로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이 교회는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오류와 죄악을 저질러 왔지만,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아 교회는 늘 정화되고 새로워진다. 교회를 영원히 새롭게 하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용서이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른바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만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끔찍스러운 인간의 교만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이다. 흘러넘치는 사랑이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거룩하고 완전한 분이 부족하고 죄 많은 존재에게 내려오시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 스스로를 낮추어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사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는 종종 교회 자체의 완전함과 거룩함, 교회 구성원의 거룩함만을 강조함으로써, 부족하고 죄스런 교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알아 뵙지 못했다.
감히 ‘완덕’(perfectio)을 꿈꾸기 시작한 인간들은 교만하게도 하느님을 향하여 올라가려고만 했지, 인간을 향하여 겸손하게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는 대희년 직전까지 인류와 역사 앞에 저지른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기를 얼마나 망설이고 두려워해 왔는가!
그러나 교부들은 일찍이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고백할 줄 알았다.
교부들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창녀처럼 추하고 죄스럽지만 우리를 외면하거나 저버리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교부들은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뉘우치는 교회’, ‘쇄신되어야 할 교회’의 본성을 일깨워 주신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공의회는 교부들의 전통 속에 굳건히 서서, ‘거룩하면서도 늘 정화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ancta et semper purificanda)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 헌장 8항)
‘순결한 창녀’인 교회를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죄인을 목숨 바쳐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추함과 아름다움, 죄스러움과 거룩함의 구분을 뛰어넘어 모든 이를 당신의 아내로 맞아주시는 하느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랑의 마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참으로 순결한 창녀인데, 우리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창녀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결하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1)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1서 강해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본문]
* 본문1(요한 1서 4장 7∼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임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란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임의 아들을 우리 죄 때문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 본문2(요한 1서 강해 7장 8∼11절)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입을 다물어도 사랑으로 다물고
말을 해도 사랑으로 말하라.
나무라도 사랑으로 나무라고
용서해도 사랑으로 용서하라.
마음 속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릴지니
그 뿌리에선 오직 선만이 싹트리라.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뵙지 못했습니다.”(1요한 4, 12).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육안으로 하느님을 찾아선 안되고 마음으로 찾아야지요. 우리가 저 해를 보고자 하면 육안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을 뵙고자 하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심안을 닦아야 합니다. 그럼 심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니”(마태 5, 8)라고 하신 복음서의 말씀을 명심하세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 8.16).
사랑이 무슨 모습을 하고 있던가요? 어떤 형상이던가요? 키는 얼마나 크던가요? 발 모양은? 손 모양은?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사랑엔 발이 있습니다. 발로 성당에 오잖아요. 사랑엔 손이 있습니다. 손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잖아요. 사랑엔 눈이 있습니다. 눈으로 가련한 사람을 살피잖아요.…
형제 여러분, 진정 사랑을 지키고자 하시거든 무엇보다도 사랑이 따분하다거나 할 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유순함으로, 아니 유순함 보다는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사랑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선 결코 사랑을 지킬 수 없습니다. 종을 때리지 않는다고 해서 종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아들을 벌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들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웃을 꾸짖지 않는다고 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는 사랑이 아니고 무기력입니다. 사랑은 정열을 쏟아 교정하고 수정합니다. 품행이 선하면 기뻐하고 품행이 악하면 교정하고 수정해야지요. 사람의 잘못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세요.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으나 잘못은 사람이 저질렀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사랑하고 사람이 저지른 것은 사랑하지 마세요.
[해설]
1) 요한 1서 4장 풀이
요한복음서 후반부에 예수께서 각별히 사랑하신 애제자가 나온다. 애제자의 영향을 받은 교우들이 서기 100년경 에페소 주변 아세아 지방에서 요한 1. 2. 3서를 썼으리라는 게 오늘날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그 중에서 요한 1서 4장은 백미인데, 그 짜임새는 간단명료하다.
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8.16절).
②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강생 9절), 하느님은 외아들을,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는 속죄의 제물로 삼으셨다(대속죄 죽음 10절). 예수는 강생과 죽음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시다.
③ 사랑이신 하느님을 증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형제들을 사랑하기 마련이다(7∼8.11∼12절).
④ 사랑이신 하느님과 사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내주(內住 12.16절)한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도 설명도 많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8.16절)라는 말씀보다 더 좋은 정의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사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내주한다는 말씀도(12.16절) 참 좋다. 그러니 사랑에 젖어야 이승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저승에서 임의 품에 안길 것이다. 비정을 일삼고서 어찌 사랑이신 하느님을 뵐 수 있으랴. 불가의 다정불심(多情佛心)에 빗대어 나는 다정신심(多情信心)이란 신조어를 빚고 싶다.
2) 요한1서 강해 7장 풀이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히포(지금의 알제리 공화국 지중해변 안나바 항구)에서 주교로 재직하면서 매일 강론했다. 그 강론 내용이 진솔한 데다 그 표현 또한 교우들 눈높이에 딱 맞추었던 까닭에, 청중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5년경 환갑 때 10차례에 걸쳐 요한1서를 강해했는데, 여기 소개하는 것은 제7차 강해 일부이다. 이 강해 때 교우들은 기립해서 환호, 칭송, 열광했다. 그만큼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강해였던 것이다. 말씀의 핵심을 간추려 본다.
사랑이 무형무상이듯이 하느님도 무형무상이시다. 육안으로는 무형무상 하느님을 뵐 수 없고 오직 심안으로만 감지할 수 있다. 심안 대신 신령한 눈, 곧 영안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내 마음 속 깊디깊은 곳보다 더 깊이 계시는 임을 만나자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게 학덕을 겸비한 주교의 생각이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웃 사랑을 결코 유순한 덕목으로 보지 않는다. 참 사랑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고 활력이 넘친다는 것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나무라고 꾸짖고 교정하고 수정하는 등 정열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행동하는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열쇠라는 것이다. 학덕을 겸비한 성인 주교의 축일은 8월 28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0) 사제는 골고타 언덕
“기쁨과 희망의 십자가 세우는 언덕돼야”
[본문]
하느님께서 주신 사제직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제들에게 하늘의 일들을 관리할 책임이 주어졌으니, 그들은 하느님께서 천사들과 대천사들에게도 주지 않으신 권한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 18)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땅의 권한은 육신만을 복종시키는 능력이 있지만, 하늘의 권한은 영혼과 관계되고 하늘에 도달하게 하는 능력이 있으니, 사제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권한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종들의 판단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권한 외에도 다른 권한을 사제들에게 주셨으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3)라고 하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권한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심판하는 권한을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요한 5, 22). 그리고 사제들이 이 모든 권한을 아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3, 5).
사제의 거룩한 손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요한 3, 5), 주님의 살을 먹지 않고 그분의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요한 6, 53∼54), 이 모든 것은 사제의 거룩한 손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제의 도움 없이 지옥 불을 면할 수 있겠으며 준비된 화관(2티모 4, 8)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제들은 세례를 통한 영적인 해산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직무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제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입었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묻혔으며(콜로 2, 12) 복된 머리의 지체가 되었습니다(1코린 12, 12).(3, 6)
순수한 사제의 영혼
성령께서 사제를 포기하지 않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사제의 영혼은 햇살보다도 더 순수해야만 합니다(6, 2).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사제직’에서
[해설]
동방교회의 4대 교부학자로서 안티오키아 학파 중에서 가장 뛰어난 교부 요한은 크리소스토무스(金口)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훌륭한 설교가였다.
요한의 대표작품 중에서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은 오늘날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며 연구하는 문헌이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수많은 권한을 양떼를 돌보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당시의 사제들에게 올바른 사제직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사제란 무한한 존엄의 직분이다. 사제직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사제의 존재의 의미는 하느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해야 하며, 백성들은 사제의 손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인도되어야 한다.
사제는 땅 위에서 활동하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일은 힘이나 능력이나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과 자비와 연민으로서 행해지는 일이다. 사제는 직업인이 아니라 소명인이다. 직업인은 세상에 기준을 두고 더 많은 보수를 바라며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만, 소명인은 하느님께 기준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하느님을 우뚝 세우려하며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삶을 살려한다. 그래서 사제의 영혼은 하느님께서 우뚝 서 계실 수 있도록 햇살보다도 더 순수한 골고타 언덕이어야 한다.
골고타 언덕이 무엇인가? 우리의 구세주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거룩한 장소가 아닌가? 그 골고타 언덕은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그래서 사제는 골고타 언덕이다. 하느님의 아들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제는 기쁨과 희망의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세워질 수 있는 골고타 언덕이어야 한다. 언덕이 있어야 영광의 십자가도 세워지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서 계실 수 있다.
사제 스스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 세상의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우들에게 있어서 사제는 기쁨과 희망의 십자가가 세워질 수 있는 골고타 언덕, 성모 마리아와 의인들과 죄인들이 함께 자리할 수 있는 골고타 언덕이어야 한다.
주님! 사제가 넓고 편안한 언덕이 되게 하소서. 멀리서 사제를 바라보기만 해도 신앙의 힘이 솟아오르게 하소서. 사제의 몸가짐이나 말 한마디에서도 살아있는 믿음을 느끼도록, 그들의 삶을 굳세고 활기 있게 만들어 주소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9) 회개와 자선, 이름 모를 교부의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본래 위치로 다시 돌아가는 것”
[본문]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회개합시다. 우리는 장인(匠人)의 손에 쥐어진 진흙입니다. 도공(陶工)이 만들려는 그릇이 기형이거나 그의 손에서 부서진다면 그는 그것을 새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가마 속에 넣었다면 그는 더 이상 그것에 손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 동안 주님에 의해 구원되기 위하여 육체 안에서 지은 잘못들로부터 온 마음으로 회개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더 이상 우리의 잘못을 고백할 수 없고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우리의 육체를 순수하게 보존하며 주님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찮은 것도 지키지 못하였는데 누가 너희에게 큰 것을 맡기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할 것이다.”(루카 16, 10∼12 참조)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순결한 육체와 봉인을 흠없이 지키십시오.(8, 1∼6)
자선은 죄에서 회개하는 것처럼 훌륭한 것입니다. 단식이 기도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면, 자선은 이것들(단식과 기도) 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죄를 덮어주고, 선한 양심에서 오는 기도는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자선은 죄를 가볍게 하기 때문입니다.(16, 4)
[해설]
‘로마의 클레멘스의 둘째 편지’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서간(書簡)도 아니고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101년)의 친서(親書)도 아니며, 15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저자의 설교 작품이다. 고대 교회 안에서 이 설교 작품이 코린토 교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로마의 클레멘스의 유일한 서간인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보존되어 발견되면서 클레멘스의 위명(僞名) 작품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제2 코린토 서간)가 되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회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설교 작품은 세례 이후에 잘못을 범한 죄인들을 위한 회개인 두 번째 회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서 저자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자선의 필요성과 함께 죄인들을 위한 고백과 회개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설교하고 있다. 특히 자선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죄인들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선이 중요한 방법임을 밝히고 있다. 죄에서 회개하는 것으로서 자선은 훌륭한 것이며, 단식이 기도보다 가치가 있다면 자선은 단식과 기도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자선은 단식과 기도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고 있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오셨다(루카 19, 10). 예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든지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회개(悔改)란 무엇인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닫혀있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는 것이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회개는 과거의 어둠의 길로만 걸어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미래의 밝은 빛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형태를 180도 바꾸는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을 수 있는 삶의 형태로, 은총의 지위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미래의 삶을 위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위치,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위치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그 자리 그 위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한다. 회개는 넘어졌다가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고, 아픈 상처 위에 소독약을 바르는 일이다. 회개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등불을 켜들고 출구를 찾아 나서는 일이고, 하느님께로 더욱더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다. 작은 산호초라도 군함을 침몰케 할 수 있고, 작은 도끼라도 큰 나무를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작은 물방울도 바위를 뚫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잔잔한 우리의 실수들과 무관심에서부터 회개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만 빠져 살고 있는 사람으로, 과거의 실수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후회하고 슬퍼하며 사는 사람이다. 옛날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만을 생각하고, 과거에만 머물고 안주하며, 아직도 잠자고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미래 지향적인 사람’은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며 새롭게 앞길을 계획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다. 과거의 잘못은 지나간 것으로, 과거의 슬픔이나 과거의 만족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을 위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늘 겸손하게 인생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다.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미래를 향해 깨어있는 사람으로 그의 삶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은총의 삶이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8)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사랑의 부메랑
[본문]
이제, 신부는 사수(射手)가 멋지게 그녀에게 화살을 쏘았으므로, 그 솜씨를 찬미하며 말한다. “나는 사랑의 중상(重傷)을 입었다”(아가 2, 5)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신부는, 화살이 마음 속 깊이 관통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 화살의 사수는 사랑이다(1요한 4, 8). 사랑이신 하느님은 자신이 “뽑은 화살”(이사 49, 2) 즉 외아들이신 하느님을, 세 갈래로 갈라진 화살촉 끝을 생명의 영으로 적시면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향해 쏘셨다. 화살촉은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의해, 화살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수도 함께 마음속으로 관통한다. 그것은 주님이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등반에 의해 고양된 영혼은, 중상을 입힌 사랑의 감미로운 화살을 자신 안에서 확인하면서, 그 중상을 자랑하고 싶어, “나는 사랑의 중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오오, 아름다운 상처, 감미로운 중상이여! 그곳을 통해 생명은 들어왔도다. 화살의 관통이 마치 사랑을 위해 문을 연 것처럼. 신부가 사랑의 화살을 받아들이자마자, 장면은 이제 활쏘기에서 혼인의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이는 왼팔로 내 머리를 받치고, 오른팔로는 나를 껴안는답니다(아가 2, 6). … 앞에서 우리는 신부가 표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좌우의 손으로 활시위를 메기고 있는 사수의 손 안에서 화살이 되어있는 모습을 본다. … 그분은 화살로서의 그녀를 선한 표적에로 향하게 하고, 신부로서 불멸의 영생에 참여하도록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아가 강해’ 4, 127~129
"아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
[해설]
이십여 년 전, 예수회 지원자 시절, 나는 처음으로 8일간의 영신수련을 받았다. 그때,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니, 영혼은 이미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나이다”(‘고백록’ 13, 9)라고 하셨듯이, 허황되고 거짓된 사랑들이 나를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다 팽개쳐버린 뒤였다. 나는 성인의 표현대로라면, ‘정신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고백록’ 8, 9).
피정 마지막 날 미사 때, 제대 뒤에는 예수 성심상이 있었다. 예수님은 영성체 직전에, 십자가라고 하는 사랑의 화살로 내 심장을 관통하셨다. “그래 너의 죽음을 대신하여 내가 죽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사랑 안에서만 살아가거라.”
이미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얼굴 없는 노예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분이, 또 다시 나의 무덤 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미사가 끝난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처음 만난 감격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 후 결코 돌이켜 본 적이 없는, 하느님을 따라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이 본문에서, ‘아가’의 신부는 사랑의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자 “나는 사랑의 중상을 입었다”고 외친다. 놀라운 것은 사랑의 화살을 쏜 사수인 하느님 자신이 화살(말씀)과 함께 상처 구멍을 통해 신부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다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사랑의 중상을 입은 신부가 화살로 변한 것이다. 신부의 몸 안에서 또 한번 육화한 말씀은, 마치 두 팔로 사랑스런 신부를 안고 있는 신랑처럼, 지금은 사수가 되어 신부를 화살이 날아온 그 출발점(존재의 근거)을 과녁(존재의 목적) 삼아 쏘아 올리는 것이다.
‘아가’의 해석 전통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관통되어, 자기를 초월하며 어디까지라도 하느님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성립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하느님의 현존의 숨결에 닿아서 그 알 수 없는 분, 무한히 초월해 계신 분을 온 마음 온 몸으로 사랑하며 따라갔던 애지자(愛智者, philosopher)였다.
우리 인생은 한마디로 ‘사랑 안에서의 만남’으로 성립한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 안에서 뿐이다. 사랑이 없으면 서로 스쳐지나가거나, 서로 미워하거나, 적당히 둘러대며 겉핥기식으로 사귀거나 할뿐이다.
‘아가’의 신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런 표층(表層)적인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 일기일회(一期一會:일생에 단 한번뿐인 만남)의 사랑을 살아야할 것이다.
‘아가’는, 하느님과 이웃을 정열적인 사랑 안에서 만나지 못하는 이 단절과 소외의 시대에, 우리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그 영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초대하는 사랑 노래 중의 사랑 노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