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색옷 꿈
창세기 37: 1-1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
<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모로코>라는 나라는 사막이 많기로 유명하지요.
<모로코>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한 선교사가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아침마다 시 외곽지대의 사막으로 산책을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산책 첫날 한 사나이가 귀를 사막에 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누운 채로 귀를 사막에 대고 있으며 손으로는 모레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닐까?’ 선교사는 생각하였습니다. 선교사가 보니 그 사내는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교사는 그 낯선 사내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사막과 벗하며 그의 외로움과 눈물을 달래주고 있지요.’ 사내는 대답하였습니다.
‘사막이 울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사막은 매일 운답니다. 사막의 꿈은 곡식도 꽃도 심을 수 있고, 양도 먹일 수 있는 넓은 들판이 되어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거든요.’
사내의 말을 들은 선교사가 사내에게 말합니다.
‘그럼 사막에게 말해 주세요. 사막은 사막대로 쓸모가 있다고... 사막을 걸을 때면 우리가 신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되죠. 사막의 모래를 바라보며 나는 운명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동등한 사람으로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답니다. 사막의 지평선에 해 뜨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차오르고 창조이신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느낌이지요.’
다음 날 아침 선교사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한 이야기를 사막에게 모두 전해 주었나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울고 있어요?’ 나그네가 대답합니다.
‘저는 사막이 훌쩍이기만 해도 다 들을 수 있어요. 이제 사막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인 줄 알고 신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을 뉘우치며 우고 있어요.’
‘그럼 이렇게 말해주세요. 사막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인간들도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긴 세월을 허비한다고요.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느낀다고요. 어렵사리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발견한다 해도 어차피 늦었다며 삶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고요. 사람도 사막처럼 괴로워하며 헛되이 보낸 세월을 원망하는 편을 택하곤 하죠.’
‘사막이 당신의 말을 들을지 모르겠어요. 워낙 고통에 익숙해져 있어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보긴 힘들 거예요.’
‘그럼 제가 언제나 희망을 잃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두 사람은 사막의 언저리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가보니 사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쓰다듬고 있던, 젖은 모래가 보이던 자리에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몇 달 후 샘은 더 커졌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둘레에 돌을 쌓아서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베두인들은 그 우물을 ‘사막의 눈물이 고인 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우물물을 마시면 가슴속의 고통의 샘을 기쁨의 샘으로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한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육년 동안 또는 삼년 동안 교회학교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의 성장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육에 대한 문제입니다.
근래에 야기된 여러 가지 위기들. 생각해보면 모든 위기의 밑바탕에는 “교육의 위기... 교육의 부재가 전제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사람들을 바르게 키워 내지를 못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상이 온통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교육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서 나누었던 것처럼 사막이 샘물로 변하게 하는... 날마다 자신의 신세와 운명을 한탄하던 사막이 자기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면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를 찾는 이들에게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게 하고 자신의 살아가는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존재로 바뀌어가게 하듯... 바로 이것은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바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경제적인 위가가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참된 까닭과 이유만 알 수 있다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삶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셉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요셉도 어떤 삶의 형편과 조건도 그를 굴복 시킬 수 없었던 전천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꾸었던 꿈을 펼쳐 나가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자기를 괴롭혔던 이들과 화해를 이루는 어쩌면 가장 소중하고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본보기처럼 우리들에게는 보여 지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특별히 그는 자기의 삶에 닥쳐왔던 위기를 극복하였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크고 원대한 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로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셉은 살면서 두 번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한번은 형들에 의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디안의 상인들의 손길에 넘겨져서 애굽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 사람들은 손에 땀을 위기도 하고 요셉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그가 머물던 집에서 주인에게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일군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또 한 번의 위기는 그가 이렇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서 잘 나가다가 그를 정욕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주인의 아내의 모함을 받은 일입니다.
졸지에 그는 주인의 아내를 건드리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아 요셉의 운명이 다했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는데 오히려 요셉은 감옥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마침내는 바로 앞에 그의 꿈을 해석하여 주기 위해서 서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애굽의 총리대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요셉의 인생 여정을 다르게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 때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아니었다면 그는 나이가 들 때까지 형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철없는 인생으로 살았을 텐데. 매일 좋은 옷만 입고 다니고 멋이나 부리려 하는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았을 지도 모르는데 결국은 그가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 큰 인물이 되는 출발점이었어... 만약에 그 때 요셉이 주인의 아내의 모함에 감옥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바로왕의 비서를 만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냥 노예로서 그 집의 귀신이 되고 말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가 당했던 어려움들은 그를 더욱 큰 세상을 보게 하고 더욱 큰 인물이 되게 하여주는 디딤돌과 같은 것이었어... 사람들은 요셉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셉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가 가진 남다른 것은 어떤 것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려 넘어 지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서 남다른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요셉의 인생여정을 소개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요셉에게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요셉을 향하여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려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모든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들과 화해하게 되고 생존해 있던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나게 되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요셉의 유년시절의 특징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면서 바로 여기에 요셉을 바라보는 단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가 어렸을 적에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과 그가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꿈을 꾸는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의 요셉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남다르게 채색옷을 입고 꿈을 자주 꾸는 소년이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두 가지 때문에 요셉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고,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두 가지... 채색옷과 꿈속에 요셉을 요셉 되게 만든 그만의 독특한 유전자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 우리가 행하는 기독교 교육의 목표를 이야기해보자면 그것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셉의 유전자를 심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건 여자건..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이나 오래 다닌 사람이나... 교인들 모두에게 채색옷을 입히고 꿈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채색옷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옷은 단순히 옷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가 입은 옷이 곧 그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는 무슨 옷을 입는가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자분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신사복 같은 단정한 옷을 입었을 때에는 아주 고상하고 품위 있게 행동을 하던 사람도 예비군복을 입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얼룩무늬 옷을 입은 남자들일 것이다...
저는 예비군 훈련에 참여하면서 그런 면을 번번이 느끼곤 하였습니다.
아마 당시 요셉의 형제들은 대부분 양을 키우는 일을 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입던 옷도 거친 광야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만 특별하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그를 다른 형제들 보다 깊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채색옷이란 소매가 달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으로 당시에는 공주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입던 옷이라고 합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을 썼던 토마스 만은 이 채색옷이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자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이 입었던 옷이었다고 소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야곱이 유독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을 때, 그 마음이라는 것은 ‘나는 너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사랑한다. 나는 네 어머니 라헬을 사랑했던 그 사랑을 가지고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특별한 존재란다...’ 바로 이것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던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요셉이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하였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채색옷을 입고 자라면서’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야... 우리 집안에 여러 형제들이 있지만 난 아주 특별한 존재야...‘ 이러한 자의식도 함께 자라났을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비록 그가 다른 사람의 집에서 노예로 살고 있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그가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존재야. 나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어...’ 이러한 자의식이 그가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소중한 축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남다르게 채색옷을 입혀 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입혀 주시는 옷이 바로 그 옷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채색옷을 입혀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한단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살면서 우리들에게 이것보다 더 우리를 힘나게 하고 어깨를 펴고 살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을까요?
채색옷...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나고 있는 교회학교의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함께 하신 여러분 모두가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신 특별한 옷... 채색옷을 입고 있는 마음으로... ‘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라고 하는... 나는 하나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또한 꿈을 꾸는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꾸었던 꿈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그는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밭에서 곡식을 묶고 있었는데, 그가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단은 그가 묶은 단을 향하여 둘러서더니 거기에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하였더니 형들의 얼굴이 변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너에게 절을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것보다 심한 꿈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자기를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도 하였더니 이번에는 아버지까지 나서서 책망을 합니다.
“나와 네 어미와 네 형들이 다 네게 절을 한다는 말이냐?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느냐? 아버지 요셉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책망하면서도 그의 꿈을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에 두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꾸었던 꿈은 어떤 것일까요?
다른 형들이 자기에게 절할 것이라고 하는... 심지어는 그의 부모도 그에게 절할 것이라고 하는... 그가 가진 꿈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풍습도 그러하지만, 옛날 이스라엘에서도 아버지가 가지는 권위...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가지는 권위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고 그것은 뒤집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이니까 이러한 당시의 질서에 의하면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인 것이지요.
그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꾼 꿈이라는 것은 이러한 당시의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그에게 절한다는 것은 그가 형들보다 더 높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것에 앞서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한계와 장애물을 넘어 서서 나의 인생을 살려 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를 않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렇게 나의 인생을 살려 합니다...’ 자신만의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려하는 강한 의지와 삶의 열정이 그가 가진 꿈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요셉이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만일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상인들의 눈을 피해서 도망치려면 도망을 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요셉에게는 집이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미래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았기에 그냥 애굽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노예로 팔려가는 것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싶은 열망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셉이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그냥 주저앉아서 운명처럼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열한 번째 아들이라는 운명을 거부하고 마치 맏아들인 것처럼... 자유인처럼... 그렇게 자신의 미래를 헤쳐 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셉이 꿈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그의 삶에 대한 태도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런 글귀를 읽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낙관주의자... 그것도 극단적인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산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렇게 요셉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마음을 열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며 우리의 꿈과 열망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