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6. 연중 제 1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멍에를 메어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에서 ‘무거운 짐’은, ‘유대교의 율법들’로 해석되기도 하고, ‘인생의 고통’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유대교의 율법들은 우리 신앙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우리를 억누르는 ‘인생의 온갖 고통들’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달프고, 어렵고, 힘든 나그네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안식과 평화와 해방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고, ‘새 힘’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안식, 평화, 해방을 모두 합한 말이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신앙고백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인생이 아주 행복하고 재미있다.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냥 예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입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은 대부분 교도소에서 나갈 날만 기다리면서 살지만, 교도소 생활이 좋다고 하면서 안 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갔다가 금방 되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노비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그냥 종으로 살겠다면서 주인 곁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과 평화와 해방을 주셔도,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감방이 더 좋으니까 안 나가고 그냥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유와 해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자유와 해방인데,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열쇠로 알아보지 못하고 자물쇠로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1-22).”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바로 그의 멍에였는데, 그 사람 자신은 그것이 멍에인 줄 모르고 있었고, 아마도 재물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참된 안식과 자유를 그에게 주기 위한 열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안식과 자유를 잃게 만드는 멍에와 자물쇠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었다 하더라도... 3)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을, ‘모든 멍에와 짐을 버리고’로, 또는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어’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순간부터 참된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안식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4) 멍에가 아닌데도 멍에라고 오해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예가 판공성사입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들은, 보기 싫은데도 억지로 보는 것과 진심으로 원해서 보는 것을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정말로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이 실제로 많은데, 고해실에 들어가서 “고해성사가 너무 부담스럽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해결 방법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는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신앙인들만을 위한 특권이고 은총입니다. 여러 가지 헌금들도 신자들을 힘들게 하는 일들입니다. 특히 성전 신축 헌금 같은 것이 더 그렇습니다. 단순히 가난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생활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사목자들이)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일을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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