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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통합 지향성
가. 서간의 고백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침묵이나 독백, 망설임을 통해 언어의 감금성을 경험했던 여성작가들은 서서히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체험을 풀어내는 다양한 언어를 찾아내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작가들의 작업을 추적해 봄으로써 그동안 여성작가들에게 있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왜 그렇게 억압적이었는지, 또 이와 반대로 어떠한 글쓰기가 해방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 삼을 수 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굳어진 혀를 풀어주는 언어, 즉 ‘막힘’과 ‘퍼짐’의 경계에 있는 ‘풀림’의 언어를 살펴봄으로써 여성들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위의 관점을 바탕으로 ‘통합 지향성’을 나타내는 언어 언어의 특징을 서간의 고백성과 비판의 풍자성으로 대별하여 논의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서간체는 여성의 내면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언어라는 점에서, 신랄한 비판을 특성으로 하는 풍자 언어는 남성의 전유물인 언어 형식에 반항한다는 측면에서 저항적이며, 근본적으로는 여성 정체성을 이 사회 속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외부 지향의 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가. 서간의 고백성
서간문 자체가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서간수필은 서간문과는 다른 것으로 수필을 서간이란 용기에 담은 글이다. 서간체적인 양식이 여성수필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과연 서간체적 특성을 여성의 언술 특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대부분 여성수필가들이 수필을 쓸 때 경어체를 쓰기보다는 평서체를 쓴다. 말하는 듯 쓰는 게 아니라 문어체로 문장을 만든다. 서간체 수필은 일반 수필과 달리 경어체를 쓰면서 구어적인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주로 여성수필에 더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서간체로 수필 쓰기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행위로 여겨졌기에 남성 위주의 문학 전통에서는 주변적 장르로 인식되어 왔다.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공적인 글쓰기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편지라는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의사소통을 해온 것이다. 때문에 편지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관성 있게 엮어 나가기 어려운 여성들의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삶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측면에서 자아표현을 강조하면서 자아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데에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지의 언어는 사건이 발생되는 즉시 보고되므로 편지의 수신자나 독자에게 현장감을 제공하면서 그 현장감으로 인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한다. 때문에 여성들은 자아의 발견이나 직접적인 접촉에의 욕망을 이런 편지의 언어를 통해 표출한다. 즉 사건에 대한 직접성과 밀접성, 자기확증으로 인해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행동의 고백이나 정신적 경험의 강조에 유익한 것이 편지의 언어인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편지의 언어는 주로 내면적인 감정이나 정서, 비밀의 고백, 미결적인 사건이나 원인의 해명, 자기변명 등의 내용을 담은 언어가 된다. 따라서 침묵이나 독백의 언어보다는 여성 정체성에 있어서 한 단계 높다. 사실을 토대로 한다는 수필 형식의 진실성에 서간 형식이라는 특성의 사실성을 보태기 때문에 서간체 스타일의 언술은 전달성이나 소통성 측면에서 내적 분열의 언술보다는 더 적극적인 여성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여성작가 중에서도 특히 여성시인인 천양희는 이런 편지의 언어 형식을 선호한다. 작가는 편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남에게 이해시키려는 욕망을 보인다. 편지 쓰기 자체가 인식이나 경험의 중개자 구실을 함과 동시에 자기 표출성을 많이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수신자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점이다. ‘거울’, ‘물’, ‘바람’, ‘바위’, ‘소나무’에게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형식을 취한다. 천양희의 수필집 「사랑보다 소중한 행복은 없다」는 전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부 ‘약속 없는 사랑’은 전부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전술적 글쓰기에 해당한다.
그대를 통해 나를 바라보기 위하여 날마다 나는 그대 앞에 섭니다. 나와 동일한 내가 보이기도 하고, 나와 반대인 내가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잘못 투성이의 삶이 비치기도 하고, 진지하고 순열한 사랑이 비치기도 합니다. 언제나 가시적이고 불변의 존재, 그대는 나의 마주봄이며 끝없음입니다.
때때로 내 마음은 숨이 막혀, 얽혀진 운명의 그물들을 찢어 버리려고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칩니다. 그럴 때마다 그대는 나와 그물 사이를 구석구석 비추면서 견제합니다. 견제와 균형을 지키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과 혼돈에, 그대는 묻고 또 묻습니다. “누가 너를 송두리째 너의 바깥으로 밀어내는가?”라고.
단순한 자기 만족으로부터 벗어나라, 마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라고 외치는 가혹한 그대 목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은 다시 상처를 입고 쓰러집니다. (1)모든 희망을 잃고, 거대한 공포에 휩싸여 내 스스로 사슬에 묶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순간마다 나를 만나며, 순간마다 나와 작별했습니다. 순간순간 밤이나 낮이나 밤이나, 나날의 모든 삶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일, (2)나의 부르짖음과 갈망을 그리고 내 절망을 그리고 내 절망의 몸을 일으켜 세워 줍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천양희, 「거울에게」 중에서 -
위 수필에서 여성시인이 거울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성작가라는 운명과 수필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가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할 운명을 태고난 사람이다. 그리고 수필은 자기 성찰의 문학으로서 처절한 자기 고백을 그 기반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은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둘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거울에 비추어 내는 것이다. 결국 ‘막힘’에서 ‘풀림’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편지를 씀으로써, 즉 거울에게 말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밀한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특히 다른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은 넋두리나 푸념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거울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자기를 투시한다. 격앙된 감정과 억압적인 주위 환경이 소통의 어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힘들게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쏟아낸다. (1)에서의 ‘막힘’이 (2)에서는 ‘풀림’으로 전개됨으로써 서간의 역할이 소통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작가는 ‘보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그대의 길을 따라 나의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는 다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자기 해명의 좋은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양희의 수필 중에서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이해받기 위해 의사소통 구조를 취하는 수필이 ‘물에게’, ‘바람에게’ 등이다. 이 수필들에서는 ‘사랑’이라는 내용적인 내밀성이 ‘편지’라는 형식적인 내밀성과 맞물리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술자에 의한 일반적인 서술의 언어에 비해 편지의 언어는 보다 직접적이고 친근하며 감정의 유로에 적당한 언어다. 특히 80년대 여권의 확립과 결부된 자유 연애관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과 직접 연결시켜주는 편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기에 사랑이야기와 편지의 언어가 융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대여. (1)나는 아직도 남은 내 생명을 그대에게 맡기며, 죽음처럼 완전한 사랑 하나 피워보려 합니다. 방대한 황야를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랑이 되지 않고, 제도와 도덕으로 황폐해진 사랑이 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앞산, 뒷산처럼 살펴주고 지켜주는 큰 산의 사랑이 되어 삶의 친근한 동반자, 유일한 위안자가 되어 보려 합니다.
그대여. (2)이제 나는 죄도 없이 죄인 같은 사랑은 거두고 싶습니다. 그대의 순수한 세계인 절대순수, 그대와 나의 절대조화의 사랑으로 절망과 자학에서 헤어나려 합니다. 그대여, 나는 이제 내가 죄인이라는 원죄의식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습니다. 그대가 보여주는 한의 매듭이 없는 그대의 세계 속으로 나도 순수의 쪽배를 타고 흘러가려 합니다. 그대 해탈의 경지 속으로 순수한 영혼의 물살을 헤치고 뛰어들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거덜나기 전에 쓰라린 현실에서 해방되어 그대의 자유와 친화하고 싶습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천양희, 「물에게」 중에서 -
이 작품은 ‘사람에 대한 기피와 혼란과 충돌로 소용돌이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작가가 수신자인 ‘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견딜 수 없는 세상일들이 파헤쳐놓은 척박한 땅 속으로 내 개인사의 비극도 스며들고 날마다 가슴 속에 갈던 날선 비수도 그대의 창고 속에 녹슬고’, ‘그것은 어쩌면, 끝없이 좌절당하고 패배한 나 자신에 대한 질책과 자괴감’, ‘생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들, 현실에 대한 우위의 삶을 갖지 못했다는 억울함 같은 것들이 선연한 아픔으로 다가올 때’, ‘나는 삶과 사랑의 평행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중 충돌하는 상반된 구조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충격은, 고통스런 한 인간이 받은 고문이며 억압이었습니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소리치며, 사랑의 상실로 왜소해진 나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던 나에게’, ‘가짜의 것들에 포박당한 채,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헛된 발을’,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 돌연한 사고에서 얻은 처절한 충격’ 등의 어구를 통해 분석해 볼 때,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쓰라린 배신을 당했고, 이런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절규를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런 언어를 빌려왔다고 하겠다.
편지를 주고받은 자체가 이 세상의 수많은 남녀가 겪는 사랑의 고통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주고받는 것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때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소통의 형식이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와 물이라는 제재의 용해성이 잘 맞물리게 된다. 사랑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물의 덕성을 통해 해소하고 있는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랑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데 편지 형식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막힘’에서 벗어나 ‘풀림’을 지향하고 있다.
위의 예문에서 드러났듯이 편지의 발신자는 수신자인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단절에서 자신의 잘못은 없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작가는 ‘물’에게 그러한 버림의 부당성과 자신이 받은 충격, 삭여지지 않는 분노를 전달하고, 들끓는 내면의 갈등과 혼돈을 해소하기 위해 (2)에서 보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따라서 이때의 언어는 곧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신호이자 상대방과의 접촉을 꿈꾸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작가’로 하여금 소통의 언어를 발화하게 한 것이다. 천양희에게는 이제 사랑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1)에서와 같이 ‘죽음처럼 완전한 사랑을 피워보려 한다’.
이처럼 천양희의 수필은 사랑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을 주로 다루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수필은 단편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됨으로써 주제의식이 약해졌지만, 수신자를 사람이 아닌 상징체로 해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그러한 내적 감정을 다루기에 적당한 편지의 언어를 도입해서 주변 장르였던 수필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 자체가 수필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수필을 서간체 형식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서간문은 서간체 수필과 달리 서간문으로 불려왔다. 주제나 제재 중심의 수필문학과 서간문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천양희는 그러한 서간문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여성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이바지하게 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중심과 주변으로 분리시키는 이분법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으로 여겨졌던 장르의 언어를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략적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양희 이외에도 여성시인인 유안진, 허영자, 등도 편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전략적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
친애하는 J씨!
(1)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나의 기본 자체는 우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나의 친구 J씨라 하더라도, 나의 이 기본 자세를 흔들려고 할 때는 장미의 가시가 자신을 지키듯이, 나도 그렇게 나를 지킬 것입니다. 비록 J씨 당신이 나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더라도, 나는 그것을 아파하고 슬퍼하며 비탄에 빠질지언정 나를 지키는 가시는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쉬운 여자를 경멸합니다. 아무리 우정이나 사랑에 눈먼 여성이라도 자기 성깔로서 자신을 지킴에 허술하지 않는 가시를 지닌 여성을 더 좋아합니다. 진정 우정이나 사랑이 서로의 확인과 믿음이라면, 장미의 가시란 바로 확인과 믿음의 수단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장미는 그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 여성다운 품위와 기질을 지녔다고 봅니다.
영국의 국화가 장미라 했는데, 영국 역사상 엘리자베드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이 있었고, 또 여왕들의 통치 시대에 영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의 엘리자베드 2세도 여러 역대 국왕보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 국민과 세계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여왕들이 아무리 여성이라 해도 무작정 사랑에만 눈이 멀었다면 어찌 왕국을 지켜낼 수 있었겠어요. 하물며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나라를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거대한 왕국으로 키울 수가 있었으리오. (굵게 강조 : 인용자)
- 유안진, 「장미를 보내면서」 중에서 -
여성시인인 유안진의 「장미를 보내며」는 사랑을 고백하는 이성 친구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서간체 수필이다. 문맥으로 보아서 자신의 남성관의 예를 들어 요즘 여성들의 가벼움을 질타하는 성격을 지닌 글이다. 마지막에 주제의식이 놓여 있는데, ‘비록 나는 여왕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는 아낙에 불과하지만, 내 기질과 성깔은 장미를 닮고 싶어집니다. 내 비록 외모는 초췌하게 늙어가는 보잘 것 없는 여성이나, 여왕도 능가할 그 어떤 품위 한 가닥을 지니고 싶습니다’.는 진술로 볼 때, 이 작품은 쉽게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가벼움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장미의 가시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자신이 가시 돋힌 장미가 되려고 하는지를 알리는 내용의 편지글을 통해 여성적 삶에서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이 품위를 지니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소통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구구한 하소연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사랑관을 들려줌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1)에서와 같이 어떠한 경우에도 남녀 간에 있어서 우정 자체의 틀을 벗어나지 않겠지만, 상대가 나의 마음을 흔들려고 할 때는 장미의 모순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표출을 통해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여성이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잃고 만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품위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본 의지를 단호하게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편지의 언어는 곧 자아를 대변하는 장치가 되고, 타인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알리는 적극적인 표현기제도 된다. 유안진은 이처럼 당대 여성들의 가벼운 사랑놀이를 질타하려는 의도로 자신의 사랑관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을 쉽게 정복의 대상으로 보려는 시도에 여성들이 대처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전략적인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수필보다 더욱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상호 소통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수필이 허영자의 ‘상심하는 젊음에게’이다. 다른 수필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수신자의 목소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들려온다.
(1)“선생님! 젊음이란 축복받기만 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렇게 아프고 슬플 수가 있습니까?”
아득한 지하에서 길러 올려진 물처럼, 혹은 몇 만 리 머나먼 허공을 날아온 바람처럼 그렇게 절절한 음성으로, 그렇게 숨가쁜 기세로, 젊은 친구여 그대가 이렇게 물어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젊음이란 축복이요, 환희요, 기쁨입니다만 그것은 슬픔, 고뇌, 괴로움을 동반한 축제입니다. 젊고 푸르른 나무를 보십시오. 그 가지가 넓게 뻗어 가고 그 잎새가 무성할수록 그가 거느린 그림자 또한 웅장합니다. 우리의 젊음도 혹 저런 것은 아닐까요.
꿈이 찬란할수록, 결백할수록, 심성이 맑을수록 고민도 많고 아픔도 크지 않겠습니까.
젊은 친구여. (굵게 강조 : 인용자)
- 허영자, 「상심하는 젊음에게 」 중에서 -
위의 예문은 서두에 해당하면서 작가가 제자인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밝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젊은이가 먼저 작가에게 편지 내지는 질문을 했으며, 그에 대한 답장이 곧 이 수필의 주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젊은이의 목소리는 (1)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젊음에 대한 회의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화를 통해 독자들은 이전에 한 젊은이가 교수인 작가에게 쓴 편지의 내용 또는 질의가 젊음에 대한 아픈 체험임을 확인하게 된다. 서간체수필의 마지막쯤에 수신자의 목소리가 다시 직접 노출되기도 한다. “선생님, 젊음이 한 번뿐인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청춘이라니, 무서운 홍역이에요.”가 수신자의 목소리다. 이러한 참여적 수신자의 목소리는 수필의 진행에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계속 진전시키는 방아쇠로 작용하기도 한다.
편지의 언어가 일반적인 일기체 수필, 고백적 수필, 회고록 등의 언어와 다른 점은 수신자의 존재가 수필의 서술에 관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때의 수신자는 독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러한 수신자가 수필의 서두에 ‘에게’ 라는 명시적 형태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신자가 수동적이거나 명목상의 존재여서 수필의 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수신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편지의 언어가 가진 특징이다. 편지의 언어는 수신자를 향해 발신자가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기에 발신자는 수신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게 된다. 때문에 편지의 언어는 거리상 떨어져 있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시키는 매개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리고 이런 공간적인 연결을 통해 서로 간의 소외, 고립, 고독 등의 감정을 상호 소통시키기도 한다.
물론 편지의 언어는 반복성이나 장황함으로 인해 서술의 전개를 지연시키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노정시킴으로써 비객관적인 인식에 빠지게 하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 때문에 내면생활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거나 자기변호를 하는 데에 효과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 보편적인 언어로는 반영되기 어려운 여성의 내면적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언어가 실어 나르는 내용은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의 진행”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굴곡을 수신자와 함께 나누려는 상호 소통의 욕망이 중요한 발화의 목적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이러한 소통의 언어를 통해 여성들은 자아 발견 및 자아 성찰의 주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여성주의와 문학의 접합점을 여성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의식에서 찾으려고 할 때 자전적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다. 삶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체험이자 절실한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서전적 양식은 페미니즘과 문학 사이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서전적 양식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편지의 양식과는 달리 순전히 자아의 표현 욕망에서 출발하여 지나간 삶의 경험을 회상하는 언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회상 주체로서의 ‘나’가 주관적 감정이나 경험적 사건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물론 편지의 언어도 회고적 성격과 고백성을 지니기에 작가와 서술자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데에 적절하지만, 그보다 더욱 고백적 성향이 강조되는 것이 바로 고백적 수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고백적 수필의 언어는 발신자가 작가이며 발화 내용이 작가 자신의 생애와 연관되는 언어이다. 그리고 고백적 글쓰기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시도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행위자체가 주로 ‘당위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사이의 불연속성에서 출발해 타인의 이해를 구하거나 판단․용서․동정을 얻기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내성적인 ‘살핌’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수필이 사실적인 이야기로 전달될 때는 작가가 그 이야기의 내용에서 비껴설 수 없다. 그러나 수필이 실제 자신의 삶과 연관되는 장면으로 제시되거나 새로운 삶의 창조로 인식될 때는 작가가 작품의 한 가운데 서 있게 된다.
이러한 여성수필에 나타나는 ‘살핌’의 언어는 여성들에게는 “억압받는 자의 행위 모델을 내면화한 글쓰기의 유형”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내성법에 기초해서 신변적이고 체험적인 서술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살핌’의 언어가 이러한 서술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인 자아와 서술적인 자아가 거의 일치되어 1인칭으로 나타남으로써 경험의 핍진성과 서술의 신뢰성을 모두 높여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것을 살펴보는 고백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주체적 자아를 억압하는 것이 가부장제 사회이기에 고백적 수필의 언어는 남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즉 남성의 언어는 사회적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내적인 자아 성찰의 결과로 쓰여진 것이 많지만, 여성의 고백적 언어는 가부장적 문화와 개인적 자아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의 결과로 쓰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자서전에서 남성들에 비해 덜 전형적이고 덜 통일적이며 연대기적인 질서로부터도 좀 더 자유로운 언어를 주로 구사한다. 문학적 진실과 삶의 진실이 거의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없다는 것,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체험이 절실하다는 것, 기법상 특별한 방법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등에 의해 고무된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수필로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월 ×일
소주를 마셨다. 수입한 술이다. 우리들은 모두 소주가 아니라 향수를 마시고 취해 버렸다. 한 아이가 일어나 유행가를 불렀다. 한 아이가 일어나 이수일과 심순애를 했다. 데모하며 부르던 노래도 악을 쓰며 했다. 유학한다고 와서 공부 중단하고 생선가게에서 일을 하는 아이가 너무 크게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는 바람에 아래층 금발의 할머니가 조용히 하라고 서양말로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동시에 그것을 묵살해 버렸다.
영리하고, 얼글이 배우처럼 예쁜 아이는, “전 이제 예전처럼 춥지 않아요.” 하고 그 여자에게 말했다. 그 애가 파계한 사미승처럼 보였다. 아픔이 전류처럼 흘렀다. 다만 철저히, 시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여자는 취할수록 이런 생각에 전신이 굳어졌다. ‘음악을 보내도 나는 이제 반갑지 않아. 장미도 와인도......’ 그 여자는 그 애를 학대했다.
추운 아이가 좋다. 이미 춥지 않은 아이는, 아니 추울 줄 모르는 아이는 그 여자에게 의미를 잃는다. 춥다는 것은 순수한 열정이므로. 쉽게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추운 것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갈증을 아이스크림이나 코카콜라로 금방 해결해 버리는 것. 이런 것은 전쟁보다 무서운 일이다. 이곳의 어느 부분이 그 여자에게 얕보였던 것은, 이곳에는 어렵고, 춥고, 갈증을 가졌다기보다는 그것이 너무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성의 붕괴이다. 그 속에서는 결코 아무 꽃도 피어나지 않게 된다.
외롭다고 해서 쉽게 무너져 버린 아이. 춥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열대지방으로 도망친 아이는 파계한 사미승처럼 비릿해서 밉다. 그래도 그 여자는 이 도시의 한 거리와 함께 그 애를 오래 생각할 것이다. 팔목이 가는 아이. 풋콩비린 아이. (굵게 강조 : 인용자)
- 문정희, 「움직이는 축제」중에서 -
문정희는 시인으로 등단하여 시와 수필을 쓰는 여성작가다. 위 인용 글은 일기 형식으로 쓴 일종의 고백적 수필이다. 특이한 점은 작가 자신이 삼인칭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80년대 초에 도미하여 공부하면서 겪는 외로움을 담담히 적어나가면서도,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한 아이의 호불호를 통해서 문학적으로 드러내려 하는 점이 돋보인다. 굵게 강조된 부문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윗층에 사는 할머니의 조용히 하라는 충고를 여럿이 동시에 묵살해 버리는 용기를 보인다. ‘소주를 마셨다. 수입한 술이다. 우리들은 모두 소주가 아니라 향수를 마시고 취해 버렸다.’에 담긴 정서는 진한 외로움이다. 위의 글은 타향살이의 고통이 소주잔에 잘 투영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서양 여자의 조용히 하라는 충고를 이구동성으로 거부해 버림으로써 한국 여성이라는 자매애를 잘 표출하고 있다. 그는 ‘쉽게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라는 진술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여러 억압 기제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에 쉽게 포기하는 아이는 싫다고 말하고 ‘추운 아이가 좋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여성시인의 의식이 깨어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처럼 내면에 널리 퍼져 있는 자아의 편린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이때에 유효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여성의 체험이나 그것의 육화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고백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고백적인 언어를 살펴보는 것이 곧 자아의 표현을 강조하는 여성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고백적 수필은 작품 속에 나오는 발화자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작가의 모습을 알게 해 주는 수필이다. 이 때 작품은 지면에 인쇄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 표면은 일기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껍질을 벗기면 수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고백 수필이기 때문에 소설보다 고백적인 수필의 언어는 작가의 마음을 훨씬 더 많이 알려준다. 작가가 느낀 마음의 분위기 그 자체가 잘 표현되므로 독자들은 수필의 언어를 통해 작가의 ‘마음의 질’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백적인 수필의 언술은 실존적인 진지함이나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들과의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리면서 여성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주로 자신들이 힘들게 견디어 온 고통의 이야기들이다. 때문에 고백의 언어는 여성에게 자아 말살과 수동성을 요구해 왔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도전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고백적 수필의 언어가 내면성․직접성․투명성․정직성 등의 특성을 지닌다면 이러한 성격이 곧 여성들이 처한 문제를 푸는 데에 필요한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사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꾸미려 하지 않고 단지 기억을 뒤져 그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때문에 이때의 언어는 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고백하는 ‘살핌’의 언어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직접 ‘자서전’을 쓰지 않고 고백적 ‘수필’을 쓰는가가 의문시된다. 이 질문에는 여성들의 마음 속에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심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이해 받거나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욕망이 그 한쪽을 차지한다면,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그 때문에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른 한 쪽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감정들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의 타협점이 바로 고백적인 수필이고, 고백의 언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언술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실제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중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처한 한계 상황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출 의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존재론적인 상실감과 결핍감이 여성들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했기 때문에 그것을 고백하는 글쓰기만큼 현실과의 치열한 직면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성들에게는 현실이 오히려 생활적이기에 수필쓰기 자체가 현실을 직시하거나 그것을 곱씹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여성의 삶이 텍스트라면, 여성의 글쓰기는 그 텍스트를 해설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숨은 의미를 찾고 일상에 파묻힌 부스러기를 복원하는 일이 곧 여성들의 의무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고백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여성적 자아의 재발견이라는 내적 성찰의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므로 여성들의 고백적인 언어는 도피나 환상을 중심으로 하는 도상 실험이나 모의 실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 실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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