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慶州瞻星臺)
경주첨성대(국보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국보 제31호이며,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보존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첨성대야경
삼국유사에는 7세기중엽 신라의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새종실록에서는 633년(선덕여왕 2)에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다. 만든 시대 외에 정확한 건축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선덕여왕 때 석탈해왕의 16세손 석오원이 첨성대를 건축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출처가 <석씨계보(昔氏系譜)>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시각이 있다.
높이 9.17 m, 밑지름 4.93 m, 윗지름 2.85 m로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이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위쪽 방형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어떤 주술적 또는 학술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주장이 있다.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 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 있다고 믿는 것이었는데 첨성대는 반대 형상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의 형상을 반영했다는 주장도 불교계 일각에서는 말한다. 불경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 도리천은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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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의 입구. 남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2016년경주지진으로 약 4cm 이동했다. 상단의 네 개의 삐져나온 돌은 방틀심석[4]이다. |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이용해 27단의 석축을 쌓았다는 것 역시 '1년'의 시간과 28수[5] 별자리, 혹은 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웠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 장대석이 있다. 과거에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다고 추정된다.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광이 창문을 통해 첨성대 밑바닥을 완전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완전히 사라지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그 이름에서부터 '별[星]을 보는[瞻]'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왔으며 조선 후기까지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다.
게다가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지상에서 고작 10미터 더 올라간다고 해 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 데 큰 도움은 안 된다.
높이로 따지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 경주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지형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고, 주변 남산, 토함산등에 올라가면 훨씬 별을 관측하기 쉽다.
그래서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이용범 교수)',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김용운 교수)',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정연식 교수)[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는 신라 시대의 고천문학 자료들을 종합연구하여, 첨성대가 만들어진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대폭 증가하고, 기록 또한 자세해졌으며, 당시 관측된 유성의 낙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이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제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주는 정황상의 증거이다.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해명이 가능하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서,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 즉, 부지선정에서의 고려대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었다는 것이다.
또 고대국가에서 천문을 관측하고 앞으로의 일을 점치는 것은 왕의 권한이자 왕권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관측시설이 왕궁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도시의 빛 공해가 거의 없고 광학망원경은 더더욱 없으므로 천문대의 높이는 그저 주변 건물 높이 이상의 하늘을 넓게 관측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수준이면 됐다. 고려시대 첨성대나 조선시대 첨성대도 왕궁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지금의 첨성대의 위치와 높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데, 삼국유사 1권 왕력(王曆)편 내물마립간 조의 말미에는 내물왕의 왕릉 위치를 이야기하면서 '능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점성대'는 이 첨성대가 맞으며, '점'은 '점칠 점(占)'이므로 이것을 점성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