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다. 묘법은 부처님의 당체(當體)
세 번째로는, 묘법은 부처님의 당체(當體)라는 것입니다.
본초에서, 묘(妙)의 문자는 32상(相) 80종호(種好)를 원만히 갖춘 석가여래(釋迦如來)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무능하여 문자라고 밖에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32상(相) 80종호(種好)란 부처의 상호(相好)를 말하는데, 일반인보다 뛰어난 점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말법에서의 부처와 법(法)에 대한 것입니다. 대성인님은 『교오님답서(經王殿御返事)』에서 「니치렌(日蓮)의 넋을 먹물에 물들여 넣어서 썼으니 믿으실지어다. 부처의 참뜻은 법화경이며 니치렌(日蓮)의 넋은 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신편어서 p.665)라 나타내시어 자신의 혼을 한 폭의 만다라(漫茶羅)로 도현(圖顯)하셨음을 설하시고 있습니다.
즉 구원원초(久遠元初)의 어본불이신 대성인님이 말법에 출현하시어 하종(下種)의 불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초의 「묘(妙)의 문자는 32상(相) 80종호(種好) 원비(圓備)하신 석가여래(釋迦如來)이심을 우리들의 눈이 무능하여서 문자라고 뵈옵는 것이니라. 그렇지만 이 묘(妙)의 글자는 부처님이시니라.」(신편어서 p.1120)라는 문장도 대성인님이 도현(圖顯)하신 하종(下種)의 본존(本尊)에 대해 설시(說示)하시고 있다고 배(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법의 중생을 성불시키는 부처와 법은 무엇인가 하면, 석존도 아니고 석존이 설하신 법화경도 아닙니다.
니치칸(日寬) 상인은 이 말법에서의 부처와 법에 대해, 「이 구원원초(久遠元初) 자수용신(自受用身) 내지말법(乃至末法)에 출현하시어 하종(下種)의 본존이 출현하셨음에도 가까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여 자수용신(自受用身) 즉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알지 못하고 본존에 미혹되는 것이다.」(어서 문단 p.203)라 말씀하시며, 구원원초(久遠元初)의 어본불이신 니치렌(日蓮) 대성인님이 말법에 출현하시어 하종의 본존으로서 나타내셨지만 수근이불견(雖近而不見)의 경문(經文)대로 인즉법(人即法) · 법즉인(法即人)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본존을 깨닫지 못하고 만다고 명시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고로 부처는 대자비를 일으켜 우리가 증득(證得)한 것 전체를 한 폭으로 도현(圖顯)하여 말대(末代) 유치(幼稚)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이 본존을 신수(信受)하고 여사(餘事)를 섞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면 그 뜻을 알지 못한다 해도 자연히 자수용신(自受用身) 즉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본존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어서 문단 p.203)라 말씀하시어 어본존을 신수(信受)하며 여사(餘事)를 섞지 않고 창제하는 곳에 인즉법(人即法), 법즉인(法即人), 인법일개(人法一箇)의 본존으로 하여 배(拝)할 수 있다는 취지를 교시(敎示)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님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해 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님의 제자였던 오노승(五老僧)조차도 대성인님을 어본불(御本佛)로 배(拝)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을 눈앞에 두고도 부처님이라 배(拝)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어본존을 만날 수 있었던 우리는 어본존을 대성인님의 당체라 배(拝)하며 여사(餘事)를 섞지 않고 창제행에 정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