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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활절 감사예배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말씀/고전15:1-34
요절/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Happy Easter!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 말씀 가운데서 부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게, 부활을 소망한다는 게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최대의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1년 반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로도 네 번에 걸쳐 편지를 보내고 세 번 더 방문해 그들을 돕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복음을 영접했고 그 복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알게 하고자 합니까?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가 아니라 헛되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과 그리스 철학의 미혹으로 인해 처음 받은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믿음이 다소 흔들리기 시작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칫 그들의 삶 가운데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 권세의 지배를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소망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알게 합니다.
바울이 다시 알게 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그대로 먼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여기 ‘먼저’ 전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as of first importance)으로 생각하여’ 전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복음, 복된 소식(good news),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아니, 죽음이 기쁜 소식이라니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왜 복음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죄의식과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으로 시달립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궁극적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죄와 죽음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선한 행실로도, 고도로 발달한 과학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와 죽음으로 인해 절망하고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때까지 모든 인류는 죽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떤 권력으로도, 어떤 능력으로도, 어떤 기술로도 죽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또다시 죽은 것이 아니라 한 번 살아나셔서 영원히 사십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을 통해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후, 3일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덥고 습기가 많습니다. 사흘 무덤에 있는 동안, 보통 인간의 몸은 썩어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상태로 끝나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성경에 말씀하니까 단순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을 수 없어도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우격다짐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불안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신뢰가 가질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또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죄로 인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죄의 대가로 죽음이 왔는데,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살아나 영원히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부활했다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살아났던 나사로도 결국엔 나이 들어 정해진 이치에 따라 죽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을 다시 살리실 것에 대한 예표이자,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활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데,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한다면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영원히 사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셨음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믿음과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부활과 생명에 영원히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 권세에 지배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은 로또 1등 대박 맞은 것이나, 남과 북이 통일된다는 소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으로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세하게 예언하며 묘사합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시편 16편이나 110편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사도행전에서 설명합니다(행2:25-29; 13:3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오래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게바, 즉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베드로는 큰소리는 잘 쳤지만 속두려움이 많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관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대략 25년쯤 지난 때였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오백여 형제 중 상당수가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미심쩍으면 그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루살렘 교회 수장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또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전파하는 교회와 사도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씨를 말리고자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을 마땅히 여겼고,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감옥에 넘겼습니다. 어느 날 예수 믿는 자들을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에 잡아오고자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췄고 그는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는 눈이 멀어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고,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통해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늘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자신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여러 신약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잘 알았기 때문에 큰 역사를 이룬 뒤에도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했으며 주님께 감사해했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 깊이 발견하는 사람은 늘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주의 일에 헌신합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하고 확실합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 마음에 부활의 생명력이 임할 때 사람은 변하게 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확신의 사람이 되고, 겸손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부활 신앙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떤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런 부활의 생명력을 소유한 사람들을 통해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의 소망과 생명력을 충만히 덧입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이원론 사상에 근거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은 악한데 그 악한 몸은 다시 살지 못한다. 따라서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여 영생하지 못한다. 죽은 후에는 오직 영혼만 존재한다”라고 여겼습니다. 이원론에 의하면,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죽음은 더럽고 악한 육신의 감옥에 갇혀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면 영혼은 또다시 악하고 불완전한 몸에 구속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부활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부활에 대해 잘 생각해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날마다 직면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죽고 부활하는 일보다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더 관심을 쏟게 됩니다. 또 오늘날은 세상이 갈수록 더 살기 좋아지고 기대수명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현재의 삶에서 죽지 않고 아프지 않고 더 오래 살고 싶습니다. 또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학습된 것도 아니기에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만일’이란 가정법을 여덟 번이나 사용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지 설명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우리는 매주 캠퍼스에 거짓말을 전하기 위해 기도했고 사람들을 속이며 전도한 것이 됩니다.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면서 예수님 믿고 섬기며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다 죽은 사람들도 헛된 삶을 산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이 없다면 부활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행복하게 살 것을 소망하며 신앙생활 해왔던 것들이 헛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더욱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간다의 임누가 선교사님은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헌신한 삶에 대한 공로로 한국에서 상을 받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한국에도 집이 없고, 우간다에도 집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영원히 살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임누가 선교사님은 참으로 불쌍한 분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But now)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모든 가정을 다 불식시키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농부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땀 흘려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첫 열매가 맺히면 기뻐합니다. 첫 열매는 곧이어 많은 열매 맺을 것을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을 보증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겠구나! 나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겠구나!” 소망을 갖게 해줍니다.
여러분! 죽음이 왜 있습니까? 죽음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의 변방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이끈 탁월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녀도 자신이 병들었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내 생명을 촌각이라도 더 연장해 주면 100만 파운드를 주겠노라”하며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생의 모든 소망을 다 집어삼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삶이 주어집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왔듯이,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한 사람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아담이 과거 죽음의 문을 연 열쇠이듯이, 예수님은 장차 부활의 새 생명과 영생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부활하는 것입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일시에 영광스런 형체로 변화됩니다. 살아서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일시에 영광스런 형체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 어떤 몸으로 변화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씨앗이 땅에 심겨져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 몸도 아름답고 신령한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날이 우리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날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대적하던 원수 사탄의 모든 세력을 발아래 짓밟으십니다. 끝까지 남은 원수인 사망도 완전 끝장이 납니다. 사망은 지금까지 언제나 승리자였습니다. 사망은 무자비합니다. 늙은 사람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무너뜨립니다. 때로는 어린아이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들로부터 부모를 빼앗기도 합니다. 제가 20대 때 교회에서 형 동생 하면서 자주 놀러 다니기도 하고 볼링도 자주 쳤던 분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래도 젊은 나이의 40대 후반의 절친처럼 지냈던 바로 위 형님도 몇 년 전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같이 사망은 살아 있는 모든 자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승리자가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죽은 자들을 잠자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죽음은 잠시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죽음조차도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계시록 21장 4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더 이상 죽음이나 슬픔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 생명과 기쁨과 찬양의 축제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고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맹수 같은 사람들과 싸우며 복음을 전한 것은, 어리석거나 자신에게 어떤 행동이 유익인지 계산 못 하는 멍청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고 소망했기에 현세에서 목숨 걸고 주와 복음에 헌신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드려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 세상 쾌락을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니 사는 날 동안 먹고 마셔보자 합니다. 당시 세계의 모든 부와 사치품들이 모여드는 향락의 도시였던 고린도는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그런 도시였다고 합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고린도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고 부러워한 사람들은 이들의 삶을 ‘고린티아제스타이(고린도 사람들처럼 인생을 즐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 신앙이 없는 쾌락주의자들을 악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현세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하여 신랑 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정결한 주의 신부임을 생각할 때 함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장차 부활의 그날에 주님이 씌워주실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이라는 게 뭘까요?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죽음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를 괴롭히던 두려움, 슬픔, 걱정, 근심, 염려, 불안 등 모든 사망 권세들이 모조리 사라집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 바울의 권면처럼 늘 깨어 의를 행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 가운데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