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의 선민의식
책은 유식한 것이다. 다른 세상 이들이 따라 빠지는 저 눈 부시도록 밝은 화면과 쓸 데 없이 깊은 몰입을 유발하는 운동 경기보다는 유익한 것이다. 그리 배웠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그래, 그 어릴 적부터 흥겨운 영상보다는 이솝 우화를 읽는 아이 하나가 훨씬 귀 티나 보이는 것이다. 분명 좋은 영향이 있을 따름이다.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 듣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모두의 은연 중에 깔려 있는 책 읽는 자에 대한 시선. 지적이고, 영리한 자를 보는 그 시선. 그토록 많이 강요 받은 이상을 저 사람은 실천하고 있구나, 그렇구나. 수많은 수업 중에 나온 그 어렵고도 먼 자들과 글로써 대화하고 있구나, 놀랍구나. 그런 생각들이 묻어 나오는 경외감과 조금의 아니꼬움이 느껴지는 그 시선이. 참 아름다웠을 따름이다.
멋지다. 그리 느낀 이상을 따라 가는 것은 복 되다. 내가 언젠가 경외감과 무언가 아니꼬운 마음으로 쳐다 보았던 그 한 사람은 책을 읽는 참 멋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 또한 그 경지에 이르러 내가 그에게 준 시선을 이제 다른 이에게 받고 싶었을 따름이다.
자 이제 서론은 끝났다. 그렇게 나는 책을 집었고 이 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놀라운 시선을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고심한 끝에 나는 지하철을 탔다. 팔에서 느껴지는 조금의 떨림. 책가방을 열고 잠시 뒤적이다 꺼낸 조금 두꺼운 책. 첫 번째 페이지를 피고 나니 온 신경은 곁 눈에 집중된다. 초점은 분명 첫 페이지, 첫 문단의 첫 단어로 집중 되었지만,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잠깐 나아가나 싶다가 세 문장을 읽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눈의 초점은 출발선이었을 첫 단어에 가 있는 것이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 그러니 이 의미 없는 눈의 초점을 옮길 수가 없다. ‘잠깐이면 괜찮을 지도.’ 그리 생각해 본다. 슬쩍, 쳐다본다. 아무도 나에게 눈의 초점을 옮겨 주지 않는다. 오, 이런. 망할.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 망할 생각들이 내 뇌를 채운다. ‘아, 젠장.’ 그렇다, 나는 책의 첫 페이지를 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면 마치 평소에는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책을 핀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반박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그게 한탄스러운 점인 것이다. 실수다. 어쩌면 책의 중간부터 펴 1분마다 한 페이지식 조심스럽게, 하지만 일부러 힘주어 넘기며 소리가 저 이어폰들을 뚫고 꽂히게. 그렇게 했다면 무언가 시선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중간을?’ 아, 이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책을 읽는다. 그 행위가 무엇인지 이해를 잘 못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수업의 숙제. 이것을 넘었나 싶더니 관심의 도구로 오히려 몰락한 것 아니겠는가. 재미도 취향도 안 맞는 책을 붙들고 멋있어 보일까, 낑낑대며 읽었던 그 시간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 시기에 읽었던 책이 무엇이 있었는지, 그 내용을 불구하고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더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를 들고 지하철에 탔을까. 이제는 슬슬 곁눈질에 집중하는 것도 힘들고 귀찮게 된 것이다. 저 가방, 손 닿는 곳에 살아 숨쉬는 휴대폰이 있는데 이 재미도 감동도 배움도 없는 허망한 종이를 왜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가끔은 머리를 울렸던 것이다. 오호라, 그럼에도 발전이 있었다. 책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라는 표현이 알맞을 지도 모른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지는 않았다. 그저 읽을 뿐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눈을 잠시 감고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얕은 잠에 빠지기도 하였다. 왜 재밌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약간은 우스운데 숨어 있다.
자, 생각해 보라. 당신 눈 앞에 있는 7개쯤 되어 가로로 길게 뻗어 있는 좌석을. 그중 다섯은 휴대폰을 끼고 있다. 일단 그들은 패스. 이들 중 단 두 명 책을 피고 있다. 하나는 [해리포터]를, 다른 하나는 [국가론]을. 아하! 이것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눈의 초점을 맞출 것인가? 이렇게 우스우면서도 유치한 생각을 한 것이다. 동시에 나는 이렇게 세뇌하였다. ‘문학은 고전이 진국이지.’ 어후. 한심한 생각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이해도 못하고, 솔직히 이 장소에서 벗어나면 거들떠도 안 볼 것이다. 헌데, 누가 그걸 알겠는가. 그저 당신은 [국가론]을 읽는 저 멋진 책벌레를 향한 경외와 아니꼬움의 눈빛을! 그래, 그것을 주기만 하면 된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일까.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싶다가 허공을 보고는 ‘후.’하고 숨을 내뱉을까. 책을 잠시 덮고 오른쪽 손 엄지와 검지로 양 눈을 주무르며 피로한 듯해 보일까. ‘오, 좋은 생각.’ 하, 이런 망할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자만했다. 책은 읽고 있으니, 지식이 쌓이는 듯한 뇌의 고통이 있으니. 아, 하지만 깨달았어야 했다 뇌의 고통은 그냥 내가 멍청해서 온 것이었던 것을. 이 멍청이, 지식이 쌓이느니, 고뇌의 흔적 같은 고귀한 것이 아닌 그냥 읽고 생각하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머리의 미련함의 표시였던 것 뿐이다.
이런 미련한 표시에 빠져, 이로써 자만하는. 오, 이 불쌍한 나는 늘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었던 것이다. 많이 읽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많이 책을 읽는 책벌레였을 테 이지만. 아주 미안스럽게도, 진짜 정말 죄송하게도 보이는 곳에만 읽는 이 간사함에 속은 것 뿐이다. 책벌레인 척한 벌레. 연기하나는 잘하는 벌레. 그럼에도 기분은 좋은 벌레, 많은 사람들이 책벌레라고 계산대로 착각해주니 말이다. 좋다, 좋지. 이대로만 가면 좋겠지. 다만 나는 나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사실은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은 아주 바보다. 사실은 책벌레 같은 호칭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냥, 그런. 책은 그럼에도 무언가 있어 보이는 성역이니 난 그 점 만을 붙들었다. 그 중에서도 고전, 이것은 더욱 더 성역으로 높이 들려 마땅한 것. 아무나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없는 오, 나 같은 이 책벌레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책의 성역. 이런 금방 부숴질 마음의 방패를, 도피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것은 쳐 부셔질 수 밖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현대 소설을 샀다. 뭐라 할까. 약간의 반발심 같은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반발. 참 이상하고 멍청하지만 실재로 그런 감정은 존재한다, 바로 여기. 고전을 최고의 성역으로 이끄는 나에게 한번 다른 선택지를 맡겨 보는 것이지. 이때 딱 나의 생각을 대변하는 자가 있다. 아, 너무 재미없게도 나의 핏줄이다. “이런 거 말고 고전을 읽으렴.” “아, 어머니 현대 소설을 무시하시는 건 아니신지. 물론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d오, 어머니 이 소설이 나중에 가면 또한 고전이라 불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고전을 읽는 사람들은 정말, 선민의식이라 부를 만한 그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버려 두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잠시만,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대답은 한 적 없다. 물론 정말, 아주 조금 비슷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 글이 이런 글이라는 사실을 알고 넘어가길. 아무튼. ‘선민의식’이 단어를 사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말로는 표현 못했을 지라도 모든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또한 어머니의 말도. 전부 나의 생각의 대변이었다. 그 대상자도 나였다. 반발심으로 현대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나는 이로써 더욱 나의 선민의식을 견고히 하고, 책벌레의 선민의식을 비판함으로 나는 그곳에서 벗어났다, ‘난 선민의식 따 따위 같고 살지 않아!’ 하며 더욱 마음껏 선민의식으로 나를 높이길 원한 것이다. 이 현대 소설은 별로다! 음, 아니 적어도 고전보다는 구리다. 그리 마음을 잡고 들어간 것이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조금은 재밌었다. 이것이 솔직한 평가. 하지만 내가 왜 이글을 쓰고 있겠는가. 제일 최근에 읽은 재미난 저 현대 소설로 에세이를 쓰지 못하고 이 가식과 의미 없는 성찰로 가득 채워진 이 별볼일 없는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도저히 쓸 내용이 없다. 저 조금은 재미난 글에는 아, 도저히 쓸 내용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쓸까 고뇌를 해보아도, 그냥 이 글보다 훨씬 억지스럽고 가식 덩어리인 불쌍한 글이 탄생할 것 같아 도저히 그만두지 않고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고전이 성역이라 불릴 만 하나. 숙제로 써먹지는 못하지만 불만족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반발심리는 곧 무엇보다 큰 확신을 얻기 위해 나오는 것이니. 이 현대 소설의 목적은 애초에 고전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난 고전으로는 에세이를 잘만 만들어 낸다. 왜냐, 고전은 무엇보다 생각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암, 그렇지 에세이는 고전. 책은 고전. 그렇게 고전을 읽고.
아, 어째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겠는가. 그렇게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 읽은 고전으로 에세이를 쓰지 못하고 이 가식과 의미 없는 성찰로 가득 채워진 이 별볼일 없는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고뇌의 흔적이 아닌 멍청함의 표시. 책의 문제가 아닌 그저 이 선민의식으로 찌들어 있는 바보의 머리 발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해고는 책의 탓을. 이미 멋 들어 지지 않은 나 자신을 책으로 때워 보려다. 아하, 이런이런.
책벌레의 선민의식은 이토록 미련한 것이지만. 아아, 아십니까? 난 이 글도 그 의식으로 채워 나갔다는 사실을.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자의 권리. 이처럼 무엇이 나의 삶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게 모르게 적는 것도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비판한 선민의식도 제대로 알맞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런. 이런 선민의식으로 오늘도 숙제를 때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