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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진년 4월 (1592년 4월)
184
4월 초1일 (경인) 흐렸다. [양력 5월 11일]
185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별조방을 점검했다.
186
4월 초2일 (신묘) 맑다. [양력 5월 12일]
187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 온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188
4월 초3일 (임진) 맑다. [양력 5월 13일]
189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190
4월 초4일 (계사) 맑다. [양력 5월 14일]
191
아침에야 비로소 겨우 통증이 가라앉았다.
192
4월 초5일 (갑오)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5월 15일]
193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94
4월 초6일 (을미) 맑다. [양력 5월 16일]
195
진해루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汝弼)을 배웅했다.
196
4월 초7일 (병신) [양력 5월 17일]
197
나라제삿날(中宗 文定王后 尹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낮 열 시경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는데, 영남관찰사와 우병마사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198
4월 초8일 (정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5월 18일]
199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에 여필(汝弼)이 떠나갔다. 객창에 홀로 앉았으니 만단의 회포가 어리어 온다.
200
4월 초9일 (무술)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야 맑다. [양력 5월 19일]
201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방응원(方應元)이 방비처에 갈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보냈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수색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202
4월 초10일 (기해) 맑다. [양력 5월 20일]
203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204
4월 11일 (경자)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양력 5월 21일]
205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순찰 사의 군관(남한)이 가져 왔다.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206
4월 12일 (신축) 맑다. [양력 5월 22일]
207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 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 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208
4월 13일 (임인) 맑다. [양력 5월 23일]
209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210
4월 14일 (계묘) 맑다. [양력 5월 24일]
211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212
4월 15일 (갑진) 맑다. [양력 5월 25일]
213
나라제삿날(成宗 恭惠王后 韓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214
"왜선 아흔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
215
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216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
217
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병마사(최원)․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218
4월 16일 (을사) [양력 5월 26일]
219
밤 열 시쯤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다.
220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
221
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222
4월 17일 (병오) 흐리고 비오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양력 5월 27일]
223
영남우병마사(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224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
225
고 한다. 저녁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서는 수군(仍番=上番)과 번을 새로 드는 수군(奔番=下番)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226
4월 18일 (정미) 아침에 흐렸다. [양력 5월 28일]
227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228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229
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낮 두 시쯤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230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울산(이언함) 두 군수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
231
고 한다. 이건 정말로 통분하여 말을 할 수가 없다. 병마사(이각)와 수사(박홍)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뒷쪽까지 이르렀다가 그만 즉시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가슴 아프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병방이 석보창(여천군 쌍 봉면 봉계리 석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잡아 가두었다.
232
4월 19일 (무신) 맑다. [양력 5월 29일]
233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내고, 일찌기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몸소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입대하러 온 군사) 700 명을 만나 보고 역사하는 일은 점검했다.
234
4월 20일 (기유) 맑다. [양력 5월 30일]
235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236
"많은 적들이 휘몰아 쳐들어 오니 이를 막아낼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가 마치 무인지경을 드는 것과 같다"
237
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하여 와서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정에 장계하였다.
238
고 하였다.
239
4월 21일 (경술) 맑다. [양력 5월 31일]
240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부사(권준)가 달려 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241
4월 22일 (신해) [양력 6월 1일]
242
새벽에 정찰도 하고 부정사실도 조사할 일로 군관을 내어 보냈다. 배응록(裵應祿)은 절갑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성(宋日成)은 금오도(여천군 남면 금오도)로 갔다. 또 이경복(李景福) ․송한련(宋漢連) ․김인문(金仁問) 등으로 하여금 두산도(여천군 돌산도)의 적대목(敵臺木)을 실어 내리는 일로 각각 군인 쉰 명씩을 데리고 가게 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품방에서 역사를 시켰다.
243
4월 26일 (을묘) [양력 6월 5일]
244
【장계에서】 이 달 20일 성첩한 좌부승지(민준)의 서장이 왔다.
245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 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
246
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개의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 관찰사 이광(李洸)․방어사 곽영(郭嶸)․병마절도사 최원(崔 遠) 등에게도 분부한 사연을 낱낱이 알렸으며,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우수사 원균(元均) 등에게는
247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급히 회답해 달라."
248
고 통고하고 각 관포에도
249
"전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
250
고 공문을 돌렸다.
251
4월 27일 (병진) [양력 6월 6일]
252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253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 '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
254
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 어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 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
255
4월 29일 (무오) [양력 6월 8일]
256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다.
257
"적산 500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도)의 수군을 뽑아 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마사를 끌여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영)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
258
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소속 수군으로,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에 발포가장․영군관․훈 련원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에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에 영군관․급제 최대성(崔大晟), 참퇴장에 영군관․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등을 모두 배치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 선봉장은 우수사 원균(元均)과 약속할 때 그도의 변장으로써 임명할 계획이며, 본영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방답․사도․여도․녹도․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담략이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하여 보냈다. 나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4월 30일 새벽 네 시에 출전할 예정으로 경상우도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곡포․평산포 등 네 개 진영이 이미 거듭 들어왔으므로 그 현령․첨사․만호 등이
259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길 중간까지 나와서 대기하라"
260
고 새벽에 공문을 만들어 사람을 달려 보냈다. 낮 두 시경 본영의 진무이고 순천 수군인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261
"남해현 성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었고, 집안에서 밥짓는 연기마자 별로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물은 흩어진채로 있고 무기고의 병기마저 모두 없어지고 비어 있는데,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적의 세력이 급박해지자 온 성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달아났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돌아오다가 또 한사람을 보았는데, 쌀 섬을 진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 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는 것이다"
262
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전을 살펴 보니, '곡포(曲浦)'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며,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하인들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宋漢連)에게
263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 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
264
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대체로 보아 흉악한 적의 세력이 크져 부대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는데, 한 부대는 육지 안으로 향하여 먼 곳까지 석권하고, 한 부대는 연해안으로 향하여 닥치는대로 함락하고 있으나, 육지나 바다의 여러 장수들이 한 사람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바다의 진영으로서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우수영과 남해의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뿐이지만, 이제 들으니 우수영마저도 함락되었고, 남해의 온 섬들은 벌써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바, 이른바 우수영은 내가 지키는 진영과 일해상접이고, 남해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은 사람의 모양마저 똑똑히 세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본도로 침범해 올 시기가 곧 박두하였으니 매우 한심할 뿐 아니라, 본도 내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의 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정예의 사졸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에 남은 진보에는 병기를 가진 사람조차 너무 적어 다만 맨손으로 모인 수군을 거느리게 되므로 그 세력이 매우 약하여 달리 방어할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중위장이며 순천부사인 권준(權俊)도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 갔다. 더구나, 오랫동안 임지에 있던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서도 가족을 데리고 짐을 지고 길가에 잇달았으며, 혹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고 혹은 틈을 타서 이사 하는데,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도 또한 이같은 무리들이 있으므로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거니와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라.'는 분부가 이같이 정녕할 뿐 아니라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분노가가 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속에 사무쳐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곡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합력하여 무찔러서 적의 무리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런데 남해에 첨입된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아니하고 먼저 도피하였으므로,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 밖의 실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 척 미만 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李洸)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 우수사(이억기)에게 명령하여
265
"소속 수군을 신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
266
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발선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 하겠다. 흉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벌써 새재를 넘어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의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 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어루 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없애고자 하니,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서 함부로 하가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써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이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습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 오르지 못하도록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반드시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분함을 더 참을 수 없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에 하나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 되고 못 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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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기미) [양력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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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에서】 낮 두 시경에 전날 쓴 일을 장계로 써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