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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Scene 8. The Confrontation /직면/ 똑똑 만셀 백작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지며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었다. 지금 시간에 그가 방해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백작가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방을 두드린다 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잠시후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충실한 집사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주인의 휴식을 방해한 것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현 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만셀 백작의 얼굴이 티가 나게 일그러졌다. 아비가 싫고 가문이 싫어 나간 놈이 아니던가. 기껏 가문을 나간 녀석이 한다는 짓이 허수아비 같은 제국 재상 밑에서 쓸데없는 일이나 벌이고 다니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리 없다. 아비의 얼굴에 먹칠이나 해대는 그런 녀석이 지금 나타난 일이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아들은 머리를 굽히고 들어올 그 런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만셀 백작이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 에, 집사장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소, 집사장. 이젠 가 보시오" 약간 당황하는 집사장을 밀치고 들어온 것은 한때 제국 제1 기사단의 수석 기사였고 만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그의 유일한 아들, 에 드워드 폰 만셀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군인처럼 짧게 깎은 머리, 그는 스피드에게 칼이라 불리우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만셀 백작은 집사장에게 눈짓했다. 집사장은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밖 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만셀 백작은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에드. 다시는 날 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에드라고 불리운 칼은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만셀 백작의 얼 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은 도전적이었지만 한편 슬퍼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의 시선을 처음엔 무덤덤히 받아넘기고 있던 만셀 백작의 눈빛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 의 입술이 열리며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 나왔다. "아버지……" 커다란 기둥과 까마득히 높은 천정아래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불빛 만 으로도 황제의 알현실은 보는 이에게 절로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게 했 다. 게다가 어디서 흘러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장엄한 음악은 마치 황 제가 천상의 신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 제국 황제의 알현실 바닥에 깔려있는 부드러운 무늬의 대리석 위에 는 붉은 융단이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듯, 옥좌를 향해 곧게 뻗어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융단 위에서는 한 귀족이 한쪽 무릎을 꿇 고 고개를 숙인채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만셀 백작." 조금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젊은 황제로부터 흘러 나오자, 만셀 백 작은 고개를 더욱 깊숙히 조아리며 말했다. "네, 폐하. 이는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젊은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있는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제국 총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그러하오? 총 기사단장?" 카르나스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는 대답했다. "독립 기사단의 은밀한 활동으로 인한 오해로 인하여 경미한 충돌이 발생하였으나 대단치는 않사옵니다, 폐하. 어느쪽도 희생은 없었습니 다." 오해로 인한 것도 아니었고, 경미한 충돌도 아니었다. 게다가 희생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국 총 기사단장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만셀 백작은 알고 있었다. 그날 에드가 찾아와 보 여준 것들과 그가 말해준 것들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들 뿐이었 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셀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해로 인한 것이라면 백작의 죄과를 물을 수는 없소. 게다가 경미한 충돌인데다 어느쪽도 희생이 없었다니 그만 없었던 일로 하도록 하시 오." 그러나 만셀 백작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하오나 대 제국 황제 폐하의 신하된 자로서 제국의 기사단에 누를 끼 쳤으니 이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모두 소인이 부족한 탓 이옵니다. 이에 스스로의 무능을 탓하며 폐하께서 새로이 하사하신 영 지를 반납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허허. 만셀 백작의 충성은 내 익히 아는바이며, 만셀가는 대대로 황 실에 충성을 바쳐오지 않았소? 이런 일로 영지를 반납한다는 것은 과 한 듯 싶소. 이제 됐으니 그만 일어나시오." 젊은 황제는 자신의 아량을 보이려는 듯 만셀 백작을 만류했지만, 백 작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폐하. 제국의 기사단에 누를 끼친 것은, 곧 황제의 지고 하신 위엄에 누를 끼친 것. 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윤허하여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황제는 어쩔수 없다는 듯 '허허'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제국 총 기사단장,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추궁하고 있었다. 만셀 백작은 여전히 무릎 을 꿇고 고개를 숙인채 황제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백작의 입가 에는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만셀 백작이 흡족해 하는 것은 가문의 위기를 잘 모면 했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나이 들고서도 언제까지나 철부지 노릇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아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가문을 위 해 나선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고 다니는 못난 놈인줄 알았는데, 아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은밀하게 이런 일들까지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셀 백작의 마음 을 흐뭇하게 했고,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얻어낸 새로운 영지를 반납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 미소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결국 이날을 기해 만셀 백작가에 하사 되었던 새로운 영지는 다시 제 국 관할로 돌아가게 되었고, 국경 부근에는 제국 기사단이 다시 정식 으로 배치되게 되었다. "호오, 그래? 정말 고무적인 일이로군." 애쉴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3년전 황제로부터 근신을 명령받은 이후, 제국 재상은 황실의 중대사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 론 황제의 근신령이 철회된지는 벌써 오래전이건만, 귀족 권리장전 이 후 실질적으로 제국 재상이 관여할 일이 없어진 까닭이다. 물론 국가 자문회의, 일명 70인회의 활동은 정기적으로 계속되고 있었 지만, 황제도, 재상도, 제국 총 기사단장도 전혀 참가하지 않고 있었 다. 그렇기에 제국 재상은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직 애쉴리의 보고를 통해서만 파악하고 있었다. 애쉴리는 제국 재상의 눈이자 귀가 될 정도의 신임을 받고있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심복이었다. 지금 제국 재상은 만셀 백작이 새로 하사받은 영지를 오늘 반납했다는 사실을 애쉴리로부터 방금 보고받았다.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은 매우 흡족한듯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애송이 녀석의 얼굴 표정이 볼만했겠군. 유감이야, 직접 보지 못 했다는 사실이……"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은 한동안 유쾌한 표정을 짓더니 애쉴리에게 넌 지시 물었다. "그런데, 이런 기특한 생각이 그 탐욕스런 만셀 백작으로부터 나왔을 것 같진 않은데?" 애쉴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에드워드 폰 만셀이 만셀 백작을 만났습니다. " "호오, 에드워드 폰 만셀. 그 칼 말인가?" 애쉴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입가에 더욱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 생각은 스피드로부터 나온 것이겠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드릭 폰 케네스 후작은 손가락으로 한손으로 얼굴을 살짝 받치며 웃 었다. "후후. 가능성이 높은게 아니라, 바로 그런거야. 이거, 태후 이후로 대단한 여자가 또 한명 나타나셨군. 이젠 스피드, 아니지 곧 만셀가 사람이 될 테니 만셀 부인이라 해야하나? 그녀가 제국 유수의 만셀 가 문을 좌지우지 하게 되겠구만, 하하하." 재상은 유쾌한 듯 웃었다. 재상은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애쉴 리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밑에 있는 사람이 그런 딴 짓을 하는 것조차 제대로 알아채 지 못했다면, 이건 우리쪽에도 상당히 헛점이 있다는 뜻이 되는게 아 닌가?" 제국 재상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애쉴리는 여전히 변함없는 표 정과 어조로 말했다. "다른 조력자를 구한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조력자의 정체에 대해 조 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지. 이봐, 애쉴리." 애쉴리는 고개를 들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칼과 스피드를 풀어주도록 해. 이젠 당당한 다음 대 만셀가의 주인들 이신데,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빈손으로 가지 않도록 신경도 좀 써주고 말이야." 애쉴리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함으로써 재상의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재상의 말은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만셀가에도 사람을 보내도록. 노골적으로 우리편을 들어주진 못하겠 지만 어차피 우리쪽으로 올 수 밖엔 없을거야. 적당히 먼저 손을 내밀 어주는 것도 좋을테지. 아무래도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기엔 좀 쑥 쓰럽지 않겠나? 하하하." 애쉴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제국 재상은 유쾌한 표정으로 탁자위에 놓 여있던 포도주 잔을 집어들었다. 붉은 포도주가 반짝이는 잔에서 찰랑 거리고 있었다. 후작이 포도주 잔을 돌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애쉴 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나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아, 카르나스는 본가(本家)에서 맡기로 했다." 어느새 후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재상은 포도주 잔을 들이켰다. 애쉴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본가가…… 움직일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일단 본가가 움직인다면, 설령 황제라 해도… …" 후작은 말을 흐렸다. 마치 혼잣말처럼 그는 뒤끝을 흐렸다. "맘엔 안들지만……" 후작은 착찹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얼마 남지 않은 포도주 잔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표정이 없는 애쉴리의 얼굴에도 경 직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후작은 얼마 남지 않은 포도주를 들이키 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쉴리. 카르나스에게 은밀히 좀 흘려줄 것이 있네." 애쉴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작은 눈이 크게 떠지며 후 작을 바라보았다. 애쉴리의 입에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본가를 적으로 돌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네. 어디까지나 자 연스럽게, 천천히 가자는게 내 신조일세. 이건 그저, 조금 흘리는 정 도랄까. 상대에 대한 예의란 거지. 그가 너무 일찍 쓰러져도 별로 좋 을 게 없으니까 말이네. 부탁하네." 애쉴리가 긴장된 표정으로 깊이 허리를 숙여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 네스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언제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애쉴리는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고, 홀로 남은 제국 재상 로드릭 폰 케네스의 얼굴에도 다시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제국의 광황(光皇), '모든 것의 지배자' 광황 엘러릭의 초 상화였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