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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5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6,8-15
복 음 : 요한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3년 9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삼종기도 훈화를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있어 결코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찾으시고 또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제까지 나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새벽 묵상 글 쓰는 것도 이제, 그만 쓰고 싶었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멈춰서 하루 종일 잠자는 게으름도 누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는데 도저히 안 된다는 생각으로 좌절에 빠져 포기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떠올려 보면 포기의 상황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나의 삶에 초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늦은 때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언제나 적합한 때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좌
절이나 포기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하느님과 적합한 때를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닌 세상만을 보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물리적인 것만을 바라봅니다.
여기에 집중할수록 하느님을 보기는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최악의 순간 같아 보이는 때에도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기, 좌절의 마음이 들 때, 무조건 하느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나를 찾고 또 함께하자고 부르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온 군중을 향해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군중은 빵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쫓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빵을 더 배불리 먹기만을 바라는
군중의 현실적 욕망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만을 바라보고, 물리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주님을 믿는 것으로부터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믿는 것을 늘 뒤로 미룹니다.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모두 채워진 뒤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하느님을 나의 삶에 초대하지 않으면서 세상 것에만 집착하면서 살게 되면
좌절과 포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것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좌절과 포기의 삶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삶은 자그마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면서 희망 안에 살게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온 것일까요?
우리 또한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빵'은 이와 같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의 생명을 위해 먹는 것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
곧 성찬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안전과 보장, 편리와 유익만을 바라고
참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당신 목숨을 건네시는 ‘예수님’께 목숨 걸고 있지 않다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군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그렇습니다.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바로 그 양식을 지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에서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들'(εργα)은 복수로 자신들을 주어로 제시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하느님의 일'(εργον)은 단수로 하느님이 주어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들이 믿는 일로 제시됩니다.
결국 그분이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함을 의미합니다.'(교리서 1069항)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일하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 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천상 것에 마음을 두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밥을 먹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파집니다.
따라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밥을 먹는 것 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항상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 양식은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요한6,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6,35).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 곧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신심 서적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은 많으나 기도하는 시간은 적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현실적인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이 풍성하게 주어지면 기도하라 하지 않아도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도 좋지만, 천상의 축복이 더 귀합니다.
영광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고난의 특권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일이라도 끝을 맺어 놓아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선한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하지만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것인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여러분은 천상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란빛에서 나온 쪽빛이 더욱 파랗다는 뜻입니다.
기성세대는 다가오는 세대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지만,
다가오는 세대는 그들만의 능력과 창의력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 산업, 정보의 분야에서 인류는
분명 청출어람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의미도 잘 모르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공학, 로봇 등과 같이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를 떠난 지 2달이 되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터널도 있었고, 구독자의 감소도 있었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인수 인계를 하면서 미안함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기우(杞憂)였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속도도 빨라졌고,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하였습니다.
제가 구축했던 홈페이지가 연탄보일러였다면,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스보일러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 뉴욕에 더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하였지만,
제가 떠나온 것이 신문사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인사이동 때문에 예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청출어람’을 기대하셨습니다.
비록 나약하고,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어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빵을 먹으면서, 잔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기억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의 설교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3,000명이 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교회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 7명의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7명의 부제들은 빵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하였습니다.
그런 부제들 중에도 청출어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았던 ‘스테파노’ 부제입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아집과 ‘내가 다 할 거야!’는 욕망이 만나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공동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아집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을 향해서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청출어람’들에게 신념과 열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직무를 시작한다면 청출어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열정과 헌신을 다 했다면 박수 칠 때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라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즉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27절)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이 변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듣고 실천 해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중국 남송의 시인이 남긴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만다는 것,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었더라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리네 인생의 자명한 진리를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찰나, 한순간입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지천으로 피어나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꽃들이
겨우 열흘 만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대자연 속에 거듭 반복되는 순환의 리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 또 이렇게 세월이 가는구나. 또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내 인생이 저무는구나, 하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구나.
이 세상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조금씩 소멸 되어 가는구나.
그래서 더욱 필요한 노력은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있는 대상,
불멸과 지속 가능한 대상을 찾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던 그 좋은 것들도 조금씩 색깔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더 백방으로 찾고 추구하고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불멸의 양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신 뒤,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기까지 자신들을 찾아온 군중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의 전반부에서 특별히 강조된 내용은 ‘찾음’입니다.
여기저기 예수님을 찾으러 움직이는 군중의 모습이 길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내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당신을 애타게 찾았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하려는 것이었음을,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는 말로 지적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대조되고,
‘힘쓰지 말고’와 ‘힘써라’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에서도 ‘하는 것’과 ‘믿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여야 할 일을 찾는 것보다 그분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생활의 매우 중요한 본질을 그 어느 때보다 명백히 알려 줍니다.
신앙은 찾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찾음의 목적이 ‘썩어 없어질 것’을 얻으려는 것이라면,
신앙은 내 뜻을 성취하려는 고상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힘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려는 것보다 그분을 믿는 것이 먼저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는 많은 일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와 각 본당, 그리고 우리 자신은
무엇보다 앞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일에 힘쓰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신앙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복음 10,22-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들”이라고 쓰여있는 자리에 가만히 나의 이름을 적어봅니다.
마음에 봄이 오고, 부활이 옵니다.
부활의 기쁨이 천지를 울리는 이때에 어울리는 한 곡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재탄생시켰습니다.
이 곡은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 하는 곡입니다.
저도 이 작곡가처럼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애라는 소나타를 나만의 색깔로 변주하고 싶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예수님을 재해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 대의 피아노는 예수님이 연주하시고,
나는 건너편 피아노에 앉아 내 인생이라고 하는 악보에
쓰여진 음표들을 차례대로 쳐 나가면서 예수님과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천국, 부활, 넘어섬, 파스카 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부활의 장면이란 어떤 것인가요?
예수님과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마련하시고, 추억하시고,
갈망하시는 4월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