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16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7,51─8,1ㄱ
복 음 : 요한 6,30-35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도에서 기도를 배우는 한 수련자가 스승에게 달려와 외쳤습니다.
“스승님! 제가 드디어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나?”라고 물었고,
제자는 18년이 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갠지스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는 이 질문에 18루피(한화 300원) 정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를 벌었군.”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기도는 과연 필요한 기도였을까요?
배를 타고 가면 그만이니 필요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 성취에 도달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기도를 세상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절망도 또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만 바라보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의 길이 아닐까요?
군중이 예수님께서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성취,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청하기만 할 것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채워야 진정한 하느님이라면서 엉뚱한 곳에서만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갖 불평과 원망 속에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나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 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주고,
사랑해 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일반적으로 세상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할 뿐입니다.’
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소 음식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양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녀 체칠리아).
그러므로 현세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미리 준비하며 투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하자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군중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합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사참례를 통하여 충만한 영양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임 신부님이 후원금을 주었고, 교우들이 직접 나서서 ‘창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외벽을 칠하고, 전기를 끌어들이면 창고는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창고를 만들면서 그 밭에서 많은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제게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창고에 재화를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아야 한다.”
창고를 만들면서 수고해 주신 분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마치고 삼겹살에 맥주 한잔 마시는 것은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이 정겨운 시간입니다.
저는 그 시간에 교우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본당에 대한 사랑과 본당에 대한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새로 온 사제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남은 공간에 어떤 건물을 세워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사제관과 수녀원’이었습니다.
예전에 사제관과 수녀원을 지으려고 했지만,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중단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성당 주변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학교도 들어섰으니,
사제관과 수녀원을 짓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당 밖에 있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교우분들과 소통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당까지 출근해야 하는 시간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 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추모공원’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도 만들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교우들이 돌아가시면 모실 수 있는 추모의 공간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추모 공원은 미리 신청을 받아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고,
성당에 그런 공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고인을 위한 묵상과 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우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29절)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자, 군중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1절)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모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32절)
그 말씀을 듣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그 빵을 우리가 먹는 빵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를 그들에게 주시기 전에
그들의 입을 당신의 빵과 포도주에 익숙하게 하려 하셨다.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 있는 몸과 피를 충만히 누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썩어 없어질 빵과 포도주를 충분히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성체성사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려고 작은 것들을 공짜로 주셨다.
빵과 포도주의 기적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기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빵이시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 하셨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있으면서
그분의 몸과 떨어지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양식으로서의 빵을 청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확실히 배불리 먹이고 완전하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다. (베들레헴: 빵의 집)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빵, 곧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 곧 썩어 없어지지 않을 사랑을 음료로 마시기를 원합니다.”(로마 7)
이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성찬례의 빵이 거기에 내리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이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이다.
그래서 이 빵은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사제로서 매일 당신의 말씀으로 그것을 축성하시기 때문이다.
이 빵은 그래서 신자들의 양식이 되었다.
이 빵으로 참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나를 잊고, 일상적인 고통도 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참 신기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때는 어찌 그리도 밥시간이 기다려지는지?
어찌 그리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이 많은지?
왜 그리도 미련하게 숨도 못 쉴 정도로 과식을 하는지?
반대로 뭔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 보람되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할 때는
먹고마시는 일이 부차적인 일이 되고 맙니다.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나를 잊고,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우울감을 잊고,
더 나아가서 먹고 마시는 일조차 잊게 됩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다니느라 습관적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 왔던 제자들이 이렇게 청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빵에 대한 참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럽고 맛있는 세상의 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래로만 향하던 제자들의 시선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쪼개지고 나누어지며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안에 현존하시며,
그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헌신과 관대한 나눔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생명의 빵이요,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영원한 생명의 음료가 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 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 조상들을 먹이는”
(출애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奇蹟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빠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출애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빵은 세상에(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 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생명의 빵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0-35)”
1)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한 일과(마르 8,11) 비슷하게 보이지만, 뜻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라는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날마다’ 배불리 먹는 것이었습니다.
또, 바로 그 말이, 그들이 왜 예수님의 ‘빵의 기적’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탈출기에 기록 되어 있는 ‘만나’는 ‘사십 년 동안’ 안식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내렸습니다(탈출 16,35; 여호 5,12).
반면에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사람들을 한 번 배불리 먹인 일회성 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끼를 배불리 먹는 일회성 기적 말고,
평생 날마다 배불리 먹는 기적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표징도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몸의 배부름을 위한 빵’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대화처럼 보여도 대화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희망 사항만 계속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라는 말씀은,
“구약시대 백성들이 먹은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 아니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나’는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입니다.
‘몸의 배부름’이 ‘만나’의 일차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라는 말씀은,
‘참된 빵’이 무엇인지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께서 ‘만나’를 부정하신 것도 아니고,
모세의 업적을 깎아내리신 것도 아닙니다.
‘만나’도 분명히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기적의 양식’이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만나’의 목적이 달랐다는 것과,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의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만나’를 받아먹었음을
생각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크게 다르게 됩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 받아먹은 사람들에게는
그 ‘기적의 빵’은 그저 한 끼 식사였을 뿐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의 권능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4)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요한 6,40).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씀과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결코’라는 말은 ‘영원함’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5) 예수님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굶주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어느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때,
바리사이들이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한 일이(마태 12,1-2)
바로 그런 폭력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날마다 힘들게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고 있다고 비난하는 일은
정말로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공관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주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4,16; 마르 6,37; 루카 9,13).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일은,
예수님께서 교회에(신앙 공동체에) 맡기신 과제입니다.
만일에, 그 ‘사랑의 과제’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이고,
주님의 뜻을(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