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Scene 9. The Counteraction /대항/
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힐끗 앞에 앉은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도 창틀에 팔을 괴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지
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깥 풍경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아이리스
도 알고 있었다.
마차여행은 여전히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마차는 그다
지 고급이 아니어서 흔들리는 것도 꽤 심했다. 그래도 이런 마차나마
탈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의외로 지호와 아이리스에 대
한 수배령은 내려져있지 않았다. 지호가 그날 렌 수석기사와 마주친
것이 사실이라면, 제국 전역에 지호와 아이리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
져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지호는 그날 밤 이후, 숙영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
지 않았다. 다만 카르나스 후작의 부하인 렌 수석기사를 목격했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렌도 지호를 알아봤냐는 아이리스의 물음에 지호
는 '아마도……'라고 말했을 뿐, 그 외에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자세
하게 말해준 것이 없었다.
아이리스는 렌이라는 이름에 흠칫 했다. 그녀는 지호의 스승을 죽인
사람이며, 제국을 벗어나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했던 사람이다. 지호가
그녀에 대해 가지는 분노에 대해서는, 제국을 탈출할 때 보여준 그의
태도에서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호가 마주친 것이다.
아이리스는 지호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
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가 유독 그것에 대해서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직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지호가 '복
수'라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결심이 렌을 만남으로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
까?
그러나 지금은 지호의 일 보다 더 아이리스를 압박하는 것이 있었다.
아이리스는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
이다. 지호의 일 보다도, 흔들리는 마차 여행 보다도 더 아이리스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목적지가 주는 압박감 때
문이었다. 그곳에선 사랑하는 언니가 흘린 붉은 피가 아직도 그날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굳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 정도면 됐어요. 이제 나머지는 칼이 하기 나름일테죠."
스피드는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피드와 칼은 여전했다.
칼은 묵묵히 스피드의 뒤에 서 있었고, 스피드는 그렇지 않은 듯 하면
서도 꽤나 칼을 신경쓰고 있었다. 스피드가 힐끗 칼의 눈치를 살피는
데, 아이리스가 말했다.
"잠깐, 물어볼게 있어요."
스피드가 아이리스를 쳐다보았다. 아이리스가 말했다.
"제국 내에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을 견제하는 세력이 있나요?"
스피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작을 적대시 하는 세력은 있죠. 주로 과거 태후파와 재상파의 핵심
이었던 가문들은 다 그래요. 하지만 견제라…… 모르긴 해도 지금 그
를 견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일이 없
죠. 지금의 제국에서 그의 힘은 마치 황제와도 같아요."
아이리스의 얼굴에 의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견제하는 세력이 없다구요? 하지만……"
"왜요?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으세요, 엘마이러님?"
아이리스는 뭔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불쑥 스피드에게 물었다.
"지난 3년간 트라헤른 후작이 주로 한 일이 뭐죠?"
"네?"
스피드는 아이리스의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한듯 반문했지만, 아이리스
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아니, 그거야 귀족 권리 장전을 이용해서 귀족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
어들이고, 독립 기사단을 창설해서……"
스피드가 말을 하다가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생각났는지 말을 흐리며
뭔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그가 공개적으로 직접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건 없었어
요."
아이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왜 그랬죠?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틀어쥐
고 있는데?"
아이리스의 말을 듣고 있던 스피드가 뭔가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트라헤른 후작은 귀족 권리 장전에 서명하
길 원하는 많은 귀족들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거둬들였죠. 물론 국고에
귀속되는 거긴 했지만, 그 막대한 돈을 가지고도 기껏 한 일이라곤 독
립 기사단을 하나 창설한 것 뿐이예요. 견제세력조차 없는 막강한 권
력을 쥐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조용하네요."
"황제가 후작을 견제하고 있나요?"
아이리스의 말에 스피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트라헤른 후작에 대한 황제폐하의 신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
어요.
"그럼 황제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나요?"
스피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스가 서슴없이 '황제'라고 부르
자 칼이 약간 눈을 찌푸리는 듯 했으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황제폐하도 마찬가지예요. 황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덕분
에 지금 제국 귀족들은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서로를 못잡아 먹어
서 안달들이죠. 지금까지야 서로 힘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은 영지 분쟁으로 인한 혼란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말 거예요."
스피드의 얼굴에 약간 그늘이 졌다. 그것은 칼도 마찬가지였지만, 아
이리스는 아랑곳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후작의 독립 기사단이 만셀 백작가의 새로운 영지에서 은밀하
게 충돌을 조장하고 있는 이유는 뭐죠?"
스피드가 아이리스의 질문에 약간 어리둥절 하더니 말했다.
"그거야 국경 분쟁을 빌미로 만셀가의 기반이 되어온 중앙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가 왜요?"
스피드가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한 표
정을 했다. 아이리스가 말했다.
"네, 맞아요. 아무리 중앙에 위치한 영지가 탐이 난다 해도, 그것 때
문에 차칫 전 귀족세력을 한순간에 적으로 돌릴만한 위험을 감수하며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그럼 그가 정말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그럼, 설마…… 아니, 그건 너무……"
스피드가 흠칫 하더니 그럴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
리스의 입에서는 결국 스피드가 짐작하던 최악의 단어가 나오고야 말
았다.
"전쟁일까요?"
묵묵히 있던 칼이 갑자기 말했다. 제국 수석 기사였던 그에게 '전쟁'
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각별했다.
"그럴리 없소! 너무 비약이 심하오!"
칼의 말에 반박한 것은 스피드였다.
"그렇지 않아. 엘마이러님의 지적이 옳아. 제국 총 기사단장이자 제국
의 후작인 그가 왜 구태여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거지? 어쩌면, 중앙
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 따위, 그저 부수적인 수익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왜 그가!"
스피드가 날카롭게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권력! 전쟁이 일어날 경우, 모든 귀족은 제국 총 기사단장의 말
에 절대 복종해야 해. 그것이 귀족 권리 장전의 3가지 조건중 하나니
까!"
스피드가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지금으로선 트라헤른 후작이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귀
족들에게 참견할 권리는 없었어. 그게 귀족 권리 장전이지. 하지만 전
시라면 달라. 제국 총 기사단장에게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생
사여탈권이 쥐어지게 돼. 그게 바로 귀족 권리 장전이야!"
칼은 충격으로 인해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스피드
의 말이 사실이라면 트라헤른 후작은 제국을, 그리고 제국에 인접한
나라들을 전쟁터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옆에서 말없이 지켜
보던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왜 귀족들의 생사 여탈권을 원한단 말이오?"
갑자기 스피드와 아이리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지호의
지적은 옳았다.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이 귀족들의 생사여탈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라도 그와 원수된 가문이 있다면 귀족
권리 장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 만으로도 그 가문을 실질
적으로 멸문시켜버릴 수 있는데. 스피드가 툭하니 던졌다.
"모르죠. 혹시 그가 피에 미친 광인(狂人)이라 그럴지도…… 하지만
이건 충분히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예요. 후작이 정말로 원
하고 있는게 뭔지 말이죠."
스피드는 그저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지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호의 뇌리에는 그가 카르나스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그의 말이
또렷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 제국은…… 모두 불태운다. 바로 이 내가!
지호가 흠칫하고 있을 때, 아이리스의 말이 흘러나왔다.
"또 하나. 트라헤른 후작이 '올튼'에서 그렇게 비밀리에 발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요?"
스피드는 이번에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스피드
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말했다.
"뭔가 대단한게 발굴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면, 더욱 공개적이고 대
대적으로 발굴을 했어야 해요. 왜 그렇게 은밀하게 숨겨가며 발굴을
하고 있었던 거죠?
영지 문제가 될까봐서? 그의 영향력으로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나요
? 지방 귀족 정도야 후작이 관심만 보여줘도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텐
데요?
대대적으로 발굴을 추진했다가 아무것도 안나오면 위신 문제가 되니까
요? 그가 남의 이목을 신경쓸 정도의 사람이던가요? 아니면 몰래 빼돌
리기 위해서? 제국 총 기사단장이 그렇게 가난하다는 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몰래 땅까지 파야 할 정도로?"
아이리스의 말을 듣고있던 스피드가 말했다.
"후작은 그곳에 정말 엄청난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 아닐까
요? 실제로……"
스피드는 '올튼' 유적 이야기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곳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리기로 지호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이리스는 스피드의 말을 곧 반론했다.
"그럴수록 더욱 주도권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죠. 지금 감히 그의 것
을 가로채려 할 사람이 있나요? 그가 무엇을 숨기려 했는지 몰라도,
최소한 그 대상이 지방 귀족이나 일반인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누굴까요? 천하의 제국 총 기사단장
이 숨기려 했던 대상은?"
"설마 황제폐하의…… 아니, 그럴리는 없어요. 하지만, 그가 만약…
…"
스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스피드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그건 정
말 엄청난 일이 된다. 제국 총 기사단장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이
설마 반역을 꿈꾼단 말인가?
"반역 같지는 않아요."
스피드와 칼이 화들짝 놀랐다. 감히 입밖에 내기도 힘들었던 단어가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말을 내뱉은 아이리스는 담
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당신이 말했죠? 지금의 제국에서 그의 힘은 황제와 같다고."
스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생각이 좀 지나쳤군요.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그대로예요.
어떻게 보면 이건, 정말 대단한 문제가 될 지도 몰라요."
아이리스가 스피드의 말을 받았다.
"그래요. 왜 카르나스 폰 트라헤른 후작은 그토록 은밀히 움직이고 있
는 걸까요? 무엇이 그를 그토록 조심스럽게 만들고, 무엇이 그에게 은
밀한 행동을 강요할 정도로 위협요소가 되는 걸까요?
전 그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래서 후작의 견제세력에 대해 물어본거죠. 하지만, 도로 원점이예요.
확인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고, 의혹만 남아있을 뿐이죠. 그래도 트라
헤른 후작의 이런 일련의 행동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어요."
"알았어요. 엘마이러님 말대로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예요. 제국 재상
의 힘을 빌려서라도 최대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겠어요."
스피드가 눈을 빛내며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아직
할말이 남아있었다.
"그 제국 재상에 대해서도 의심이 가요. 내가 눈치 챈 사실을 제국 재
상정도 되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죠. 그런데도 재상측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면, 제국 재상쪽에도 무언가 있다는 얘기가 돼
요. 아마, 조심해야 될 거예요."
스피드와 칼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아이리스의 지적은 옳았다. 이
때까지 자기들이 봐온 제국 재상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긴장된 모습의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때, 지
호가 고개를 들어 스피드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스피드"
아이리스가 제기한 문제들 때문에 긴장해 있던 스피드는 지호의 목소
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호가 말했다.
"카르나스에 대해 조사해 주시오.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탁하오."
스피드가 빙긋 웃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예요. 그리고,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준 것에 비
하면 큰 일도 아닌걸요. 하지만, 이유는 물어봐도 되겠죠?"
그러나 지호의 대답은 스피드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제국 수도로 가려하오."
스피드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방금 말한 의혹들을 지호에게 이야기 했을 때, 지호가 아이리
스에게 이미 말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스피드에게 지호의 말은 꽤나
충격이었다. 그러나 지호는 스피드의 생각을 짐작한 듯, 가만히 고개
를 저으며 말했다.
"만나볼 사람이 있소. 나머지는, 수도에서 만나 이야기합시다."
스피드의 시선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칼마저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지
호를 바라보았지만, 지호는 둘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은채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탕탕-
아이리스의 상념은 마부가 마차를 두드리면서 깨어졌다. 바깥에서 마
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입니다. 제국 수도입니다!"
마부의 목소리와 더불어 창 밖으로 멀리 제국 수도의 모습이 들어왔
다. 군데군데 높이 솟은 건축물들이 이곳이 제국의 수도이자 가장 발
달한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 제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황궁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의 피를 흘리게 했던 비정의 도시, 이곳은 제국 수도였다.
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