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젊은 날 어느 즈음에 몇 달간 한 사찰의 행자로 지냈습니다. 행자가 된 첫날 서울 종로구 견지동 사찰 인근의 한 이발소에 가서 면도칼로 머리를 미는 이발을 했습니다. 그 후 사찰 앞마당 쓸기, 큰 행사가 있을 때 주방에서 음식 배식 돕기 등의 허드렛 일을 했습니다. 주일학교 출신인 저는 속으로 이런 흔치 않은 직접 경험이 나중에 전업으로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사실은 녹록지 않던 서울 생활에서 숙식이 해결된 것이 이런 선택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 당시 스님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또 그분들과 대화해 본 경험과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온 것과의 비교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본질적인 차이가 제게 명확해졌습니다. 즉 불자들의 목표가 자기 옛사람을 최고도로 개선(수양)하는 것이라면, 예수 믿는 이들은 신성한 또 다른 인격이 그들 안에 들어와 그들을 통해 살고 표현되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아래 본문도 온유가 불교식 자기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살아 낸 결과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말씀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들(the meek)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5).
위 본문을 묵상하고 추구하면서 1) ‘온유하다’의 의미, 2) 그 대표적인 사례들의 의미가 아래와 같이 더 밝아졌습니다.
온유하다는 의미: 이 단어는 헬라어로 ‘프라우스’(4239 b)인데, 사용된 구절들(마 5:5, 21:5, 벧전 3:4, 약 3:13, 고후 10:1)의 해당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세상의 반대에 저항하지 않고, 기꺼이 감당함. 2) 온유는 관용, 유순과 같음(약 3:17). 3) 온유는 저항하거나 다투지 않고 사람들에 대하여 부드러운 것임. 한 성경 교사는 온유를, “작은 발동선에 달린 하나의 타이어”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배가 정박하려고 딱딱한 부두에 부딪치지만 타이어가 충격을 흡수하여 배도 상하지 않고 선착장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상대는 딱딱해도 당신이 부드러우면 그가 얼마든지 와서 부딪혀도 좋다”라고도 했습니다.
모세: 성경은 “모세라는 사람은 … 지면의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하였다”라고 말합니다(민 12:3). 매우 거역적이고 불평을 밥 먹듯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약 200백만 명을 40년이나 인내하며 이끌던 모세를 생각하면 위 말씀에 저도 공감이 갑니다. 그런 모세였지만, 그는 말년에 물 달라고 불평하던 백성들을 향해, “이 반역자들이여”라고 하며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민 20:10-11). 이것은 여호와를 향한 불신과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잘못 대변한 심각한 일이었고, 결국 그는 이 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뼈 아픈 한 번의 실수였습니다.
주 예수님: 주님은 직접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라고 하셨고, 마태도 “그분은 온유하시어, … 짐승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셨다”라고 말합니다(마 11:29, 21:5).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하늘에 속한 왕이신 그리스도는 거만한 화려함을 과시하시며 오지 않으셨고, 부드럽고 겸손한 온유함을 보이며 오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유대인들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저항하지 않고 끌려가셨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온유한 모습은 억지 연출이 아니고,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통해 나타난 그분의 인간 미덕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 바울은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고 고백했습니다(갈 2:20). 즉 바울 자신 외에 또 다른 인격이 자기 안에 사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그가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때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대”로 권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고후 10:1).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께로 견고하게 붙여졌고(고후 1:21),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분의 미덕 안에서 행동한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후서 내용 전체에는 그의 온유한 성품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담대하게 대할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될 때는 그렇게 담대하여지지 않도록 해 주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고후 10:2)
저는 어릴 때부터 비교적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 잘 삐졌고 화를 잘 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개선이 아니라 온유이신 주님께서 제 안에서 더 자라가심으로 전보다는 더 온유한 표현이 증가되고 있다고 감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만이 온유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온유를 더 살아 표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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