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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2월 21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마스 안중근 의사
2014년 1월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두고 일본에서는 사형수에게 기념관을 건립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살인자들을 전쟁 영웅으로 신사에 안치하고 참배하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사의식과 의로움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인들은 일본 청년들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서 많은 우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려심은 우리 젊은이들을 향한 우려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역사의식도 새로운 정비를 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의 혐한(嫌韓) 의식은 그들의 열등의식에서 생길 수도 있고, 잘못된 역사 교육에서 생길 수도 있고, 정치가들이나 일본 사회의 잘못된 가르침이나 인도에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배려나 섬김을 미덕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모두 조작된 연극과 같이 보이는 것은 진정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옥중의 아들에게 수의 한 벌을 주면서 편지를 써 보냅니다.
"네가 어미 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은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돼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해주) ~ 1910년 3월 26일 향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품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박애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1907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습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1908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하였습니다. 1909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하고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습니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습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에 동포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기를 유언하였습니다. 그도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는 학교를 설립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며, 스스로 분발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님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면서도 의연하게 아들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하기 전에 어머니가 지어준 수의를 입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습니다.
안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님은 아들을 보내면서 오히려 장하게 죽기를 바라셨고,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을 단속하셨습니다. 무릇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많고 섬기는 사람은 적은 법입니다. 일등을 하려는 사람들은 많고 꼴등을 하려는 사람은 적은 법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굴하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많고 의롭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택하려는 사람은 적은 법입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는 의롭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택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지 않게 헌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생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그 이치를 당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설명해도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모님께서도 그런 삶을 사셨고,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님도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삶을 닮아 의롭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조 마리아 여사의 고귀한 정신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분발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축일2월 21일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 (Robert Southwell)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 지역 : 영국(UK)
활동 연도 : 1561?-1595년
같은 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Robertus Southwell, 또는 로베르토 사우스웰)은 1561년경 영국 잉글랜드 동부 노퍽(Norfolk)의 호셤세인트페이스(Horsham Saint Faith)에서 부유한 부모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576년 5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영국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프랑스와 에스파냐 세력이 충돌하자 안전을 위해 파리의 클레르몽 대학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회의 토마스 다비셔(Thomas Darbyshire)를 만나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며 예수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입회가 거부되자 1577년 6월 15일 두에로 돌아왔다. 1년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로마까지 걸어가 1578년 10월 17일부터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련원에서 지원기를 보내고 1580년 예수회원이 되었다. 수련기를 마친 후 그는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84년 학위를 취득한 다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학생 지도 소임을 맡아 2년을 보냈다.
1586년 영국 선교사로 보내달라는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그는 헨리 가넷(Henry Garnet)과 함께 영국으로 출발했다. 그해 7월 17일 영국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 런던을 향해 떠났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은 런던과 그 일대에 대한 선교 책임을 맡았고, 헨리 가넷은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았다. 그는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 집의 은신처에 머물며 다른 선교 사제들의 활동을 돕고 그들에게 은신처를 소개해주었다. 또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고, 신자들을 만나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헨리 가넷 신부가 영국 예수회의 책임자가 되어 런던으로 온 뒤로는 주로 런던 외의 지역에서 활동했다. 1587년경 헨리 가넷이 신자들을 위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가톨릭 출판사를 만들자 그는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평소 문학에 소질이 많아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데 투자했다.
그렇게 6년 정도 검거를 피하며 비밀리에 활동하던 그는 한 여성의 배신으로 1592년 6월 25일 체포되었다. 가톨릭 사제 사냥꾼으로 유명한 리차드 톱클리프(Richard Topcliffe)는 그를 체포한 후 자신의 집에 가두고 다른 사제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여왕의 명령으로 6월 28일 그를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추밀원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 정보도 말하지 않았다. 고문 집행관은 결국 그를 극빈자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뒀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감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들을 본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의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게 탄원서를 보내 아들에게 죄가 있으면 처형하고 아니면 신사답게 대우하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그는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목적 외에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장례식에서 흘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 ‘위로의 편지’ 그리고 ‘죽음을 이긴 승리’ 등의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와 글들은 훗날 그가 순교한 후 출판되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1595년 2월 18일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2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오전, 그는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2월 2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축일2월 21일 성 베드로 다미아노 (Peter Damian)
신분 :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 지역 : 오스티아(Ostia)
활동 연도 : 1007-1072년
같은 이름 :다미아누스, 다미아니, 다미안, 다미앵, 데미안, 데미언,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는 어릴 때에 고아가 되어 형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형은 라벤나의 사제였는데, 그에게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파르마(Parma)로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교수가 되었으며 1035년에는 베네딕토회 회원이 되었지만 자신은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이 된 그는 은둔소를 다섯 군데나 더 세웠다. 그는 특히 이 세상을 초탈한 인물로 또 성직매매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1057년 그는 교황 스테파누스 9세(Stephanus IX)로부터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수도자의 위치로 돌아온 그는 주로 교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대립교황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연옥, 성체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하여 사제들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즉시 그에 대한 지역교회의 공경이 시작되었고, 1823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며 보편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로베르토 사우스웰 (Robert Southwell)와베드로 다미아노 (Peter Damian)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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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