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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제1독서 : 사도 4,8-12
제2독서 : 1요한 3,1-2
복 음 :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국민의 봉사자, 일꾼을 뽑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본인만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해서 당선되었을까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국회의원 후보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한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까?
도와준 사람이 아닌, 그저 국회의원 한 사람만 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자기를 모든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자기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중요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 동네 치안을 담당하시는 분,
마트에서 계산을 도와주는 분들 역시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도 아니 얼굴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중요한 사람들로 인해 편하게 지금을 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에서 중요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그리고 자기의 헌신을 몰라 준다고 억울해하고
화내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들이 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만족하며 행동하는 사람만이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입니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한 날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목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즉,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목자의 참된 요건은 단순히 양 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에 대한 관심과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랑
그리고 양 떼의 주인에게 충실한 것이 착한 목자의 자질입니다.
성소는 단순히 사제 성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성실하게 사는 삶이 바로 성소에 부합하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 속하는 양이 되어
자기 성소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실한 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성소를 다시금 생각하고, 자기 자리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떠올리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성령’으로 가득 차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증언합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어주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합니다(에제 34,11-16; 스바 3,19; 미카 2,12 등)
그리고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언급합니다.
(예레 3,15; 23,4-6; 에제 34,23-24;37,24; 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의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곧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으며,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를 압니다.
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곧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예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일입니다.
곧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성소’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소’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리지외의 소화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 이전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을 받은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몫을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헌신과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
별 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공동체에서도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 성소에 응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직자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성찬의 빵과 함께 자신을 쪼개어 나누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든 이에게 드러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에 가야 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하고 저의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
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쨌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위 누나가 공무원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의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는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것을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하셨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러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시면서 꼬박꼬박 졸기도 하시고,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할 것은 다 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었고 이제는 신부로 33년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여자 신자 분이 옆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사목을 할 때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고 할 때 반대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으시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집 걱정, 어미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 어울리는 4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시길 기도합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투신합시다.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집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댈러스에 있으면서 뉴욕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동네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서로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가던 공원, 즐겨 가던 식당, 미술관, 공연장 등을 주제로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명동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더욱 좋아집니다.
명동 근처에는 갈 곳도, 볼 곳도 많습니다.
한옥마을, 남산, 청계천, 경복궁, 대학로, 남대문 시장이 있습니다.
먹을 곳도 많습니다. 광장시장의 빈대떡, 종로의 닭 한 마리, 북창동의 해장국,
명동의 칼국수, 을지로의 골뱅이, 남대문의 갈치조림, 장충동의 족발, 명동의 냉면 집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주특기’가 있습니다.
운전, 행정, 통신, 공병, 정보, 헌병, 의무, 군종, 보병‘과 같은 주특기가 있습니다.
다른 할 이야기도 많지만, 자신의 주특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행정 업무 그중에서도 동원 예비군에 대한 업무를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주특기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기도, 선교, 성경, 나눔, 봉사, 성지순례’와 같은 것들이 주특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교회에서 정한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추수할 일꾼을 청하여라.”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했습니다.
추수할 일꾼인 ‘성직자와 수도자’가 될 젊은이들을
교회로 초대하자는 의미로 성소주일을 제정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소주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5년 동안 교구에서 성소국장으로 사목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신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구의 서품식과 성소주일 행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3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사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100만 명이 넘게 보았고,
지금도 예비자 교리에서 사용하는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사제’라는 작품을 통해서 사제가 되는 과정,
사제 서품식과 새 사제의 이야기, 다양한 사목의 현장을 담았습니다.
혹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유튜브에서 ‘사제’를 검색하면 볼 수 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사랑입니다. 제가 제작했기 때문에 저도 잠깐 출연합니다.
두 번째는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입니다.
신학교 옆에 5층 건물이 저렴하게 매물로 나왔습니다. 교구에서는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건물을 어느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원로 사목자를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 있으니 신부님들도 좋아하실 거라고 하였습니다.
청소년국장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님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는 가톨릭 회관도 있고, 명동과도 가까우니 신부님들도 좋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가까이 있으면 사제성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정은 추기경님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식사를 마치고 추기경님과 산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추기경님 저 건물을 어디에 투자하시겠는지요?’
원로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과거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현재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비신학생을 위한 용도라면 미래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어디에 투자하기로 하셨을까요?
맞습니다. 추기경님은 저의 손을 들어 주셨고,
건물은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입니다.
세 번째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가 성소국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임무를 주었습니다.
저는 124위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시복식에 필요한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런 소중한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봉사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5년 동안 있으면서 외부로 드러나는 일은 하였지만,
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는 것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겸손한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소주일(聖召主日)이며 이민의 날이다.
우리의 성소와 특히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고국을 떠나 이민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목자의 모습은 이사야의 "야훼의 종"과 같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여기에 삯꾼이 나온다.
삯꾼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있으나 양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삯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양들을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절)
이리는 악령이다. 이리는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을 불어넣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켜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이런 이리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양 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이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들을 지키셨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고 한 우리에서 한 목자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18절)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이 자발적인 것이고,
그분은 당신이 내놓으시고 되찾을 수 있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임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신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온 것이다.
베드로는 구원이 이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 떼에 베풀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1코린 15,45)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전한 구원의 모습이 현시점에서부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부활이 될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의 성소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제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고,
그 목자 아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이다.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 주일을 맞아
살레시오회 사목자로서 부끄러운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돌아봅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아무래도 우선적 사목 대상자인
아이들과 동고동락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에 둘러 쌓여 있던 시절, 아이들이 제 목 위로 올라타 ‘이랴 이랴!’ 하던 시절,
아이들이 같이 놀아달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시절,
저도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도 제가 좋아 죽던 시절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끔 아이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찾아오는 후배 수도자들에게 저는 늘 똑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복에 겨운 소리 제발 좀 하지 마십시오.
나이 들면 아이들에게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답니다.
아이들과 아웅다웅하는 지금, 이 순간이 호시절이고 꽃자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함께 지상 천국을 만끽하십시오!”
1888년 1월 31일 돈보스코는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진단을 내리기 위해 주치의가 그의 시신을 검안하였는데,
검안을 마친 주치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신은 마치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낡은 코트처럼 너덜너덜했습니다.
그의 사인은 명백한 과로사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키 겨우 160센티 미터인 돈보스코의 어깨 위에
수천, 수만명 아이들이 매달렸으니, 그의 몸이 남아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요한복음은 착한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금쪽같은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아닐까요?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는 언제나 양들 사이에 현존하기에, 몸에서는 늘 양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이가 들고, 그렇게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고 나면,
한 줌 재로 변할 우리 몸입니다. 뭐 그리 아깝다고 몸을 사리고 또 사립니까?
물론 건강을 잘 챙겨야,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몸을 사리고 사리다 보면 좋은 시절 다 가고, 호호백발이 되고 나면,
봉사는커녕 도리어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변합니다.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하느님께서 주신 이 소중한 목숨,
파리 목숨처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백이십퍼센트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傳記와 같이 기록된, 초기 그리스도신앙의 문서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말미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20,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 자녀 되어 살게 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하여 남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牧者’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해석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부활에로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은 결과였다는 믿음입니다.
遊牧民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친숙한 단어입니다.
목자는 양 떼를 인도하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양들과 함께 삽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목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신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11)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聖歌로 부르는 「시편」은 말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신다. ...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다.”(시편 23,1-3)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목자라는 호칭을 예수님에게 사용한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고 믿으면서 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살아계실 때,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목자가 착한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임당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 유대교 실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회당에서 고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 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3,5)고 전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버리기로 했다.”는 말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분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착한 목자와 대조하여 보여주는 것은 삯꾼입니다.
삯꾼은 양들의 安全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한 몸, 살 궁리만 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을 대조하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하려 합니다.
하느님은 엄하게 판단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렇게 상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奉仕職務를 맡으면,
말로는 봉사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찾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런 자세는 삯꾼의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셔서 자상하게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지만,
삯꾼의 根性을 지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높으신 분, 두려운 분으로 만들어 놓고,
실제로는 우리의 위신과 우리의 영광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면서 횡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제 질서대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가 행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전쟁과 각종 대량 학살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는 弱者에 대한 强者의 횡포와 학대로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萬里長城 같은 소위 위대하다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그런 것을 建立하기로 결정하였고, 수많은 民草들이 강제 동원되어,
뼈아프고, 가슴 무너지는 사연들을 각자 가슴에 안고, 권력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였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의 實狀입니다.
우리는 구실만 있으면, 자신을 誇示하고, 利得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들을 이용합니다.
입으로는 봉사를 외치지만, 기회만 있으면, 봉사를 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말을 아끼고,
왕이신 예수님, 장차 심판하실 예수님을 즐겨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봉사한다는 사람들은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삯꾼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배워 구원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오늘을 聖召 주일로 정하고 신학교와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을 홍보합니다.
‘착한 목자’ 복음을 읽는 오늘을 성소 주일로 택하였습니다.
목숨을 내어주신, 선하고 은혜로우신 한 분의 목자 밑에
목숨을 내어주는 선하고 은혜로운 교직자와 수도자가 되라고 권하는 주일입니다.
신앙인은 모두 가정에서, 일터에서, 또 사회에서 스스로를 내어주고 봉사하여,
착하신 목자와 같이, 자상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 주일입니다.
삯꾼과 같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선하고 자상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도록 노력하자고
우리 모두가 마음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한 사람 잘되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섬기는 생명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삯꾼은 자기를 중심으로 利害打算을 앞세우고, 자기가 대우받을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고 섬기는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얽매여 사는 俗物인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반성하고 노력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조금씩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4주일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긴 담화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이를 부연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 뒤에는 그 ‘착함’의 이유가 설명되는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목숨”(그리스 말 ‘프쉬케’)은 오늘 본문에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강조된 단어인데,
‘숨’ 또는 ‘호흡’을 뜻하며, 인간의 영혼, 생명, 활력 등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자기 숨과 영혼을 내주어 상대를 대신 살게 함을 뜻합니다.
그와 반대로 ‘목숨을 내놓지 않는 목자’는 “삯꾼”입니다.
삯꾼은 자기가 살고자 양들을 이용하고 불필요해지면 내다 버립니다.
그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등장한 “나는 착한 목자다.” 다음에는 ‘앎’에 대한 내용이 소개됩니다.
‘안다’(그리스 말 ‘기노스코’)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배우는 인지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의 본질을 섬세하게 깨달아 이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권고합니다.
특별히 오늘 제1독서에는 작은 반전이 등장합니다.
착한 목자는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만,
동시에 그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목숨을 내놓는 목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시기에 착한 목자 본문을 봉독하는 이유입니다.
양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맡겨진 양들을 하나하나 알고 생명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의 숨이 양들의 숨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이 ‘착함’만이 목자가 가지는 진정한 힘이며 권위가 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