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 전유나
학습지 공장의 민자 / 전유나
고향친구 민자.
지난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을 매달 수 밖에 없었던
상이용사 아버지를 두었던,
씨받이로 탐낸 동네 남자들 피해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이사해 하룻밤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의 슬픈
노랫가락 젖은 눈빛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아리다는,
그래서 3교대 낮, 밤 시내버스 안내양 아가씨로
서울시내를 빙빙 돌며 돈을 모아 친정 집사주었다는,
영업용 택시 운전하는 남편과 맞선으로 서른 고개
훌쩍 넘겨 결혼했다는,
민자, 이제 영세한 학습지 공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알콜중독되어, 밖으로 방문 잠가놓고 출근해야 하는 시어머니,
일보다는 고스톱으로 한탕 잡아보겠다는 남편,
빙빙빙 집에서 노란 주둥이 빼물고 하루종일
모이 물어오길 기다리는 새끼들 주변을 돌고 있다.
뭔가 기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더듬이를 잃어버린 일개미 같다.
엉성한 문틈으로 들어온 황소바람이 힝힝거리며
학습지를 들춰보기도 하고 난로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따뜻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는
학습지 공장 안에서 그녀는,
늘 밀려난 삶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제자리를 돌 수 밖에 없는 가젤 한 마리.
식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고구마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집을 갖는 것만이 소원이라는,
어릴 적 이웃집에 살았던, 언니들이 식모 살아
중학교까지 마치게 했던,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내 친구 민자는,
[당선소감]
사람과 사람 사이, 그늘이 드리워진 틈바구니 사이에 투명한 실로 집을 짓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최대한 서두르지 않고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물처럼 흘러들어와 나를 적시다가도
눈을 뜨면 저 만큼의 거리에서 팔딱이고 있는 파릇파릇한 시어들을 꿈꾸며)
도처에 감사의 싹들이 무성하다.
묵묵히 곁에서 지켜준 남편, 요즘 가지를 뻗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 유리,
사춘기를 잘 넘겨준 아들 진우,
시 쓰는 분위기에 흠뻑 빠지게 해주신 심상시인회 여러분,
새여울 선생님들… 항상 애정의 눈길로 나를 지켜봐 준 이 모든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얼룩에 지나지 않았을 나의 시의 결을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 주신 스승님,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시를 잘 쓰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 수 있어야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셨지요?
어떠한 순간에도 시의 끈을 놓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심사평]
당선작인 전유나의 `학습지 공장의 민자'는 표면적으로 리얼리티가 살아있으면서도,
그냥 리얼한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게 하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의 퍼스나는 청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솔성이 다른 시들에 앞섰던 것으로 판단된다.
심사위원 주근옥·양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