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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타일 줄눈을 타고 내려온다
줄도 없이 중력도 없이
털을 가다듬고 잠시 쉰다
다리를 뻗어
타일 줄눈을 잡아당긴다
욕실은 찌그러진다
-「거미」 부분
공연은 매진이었다. 고무줄을 매단 소년 배우가, 그로 말하자면 한때 신동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빛낸 자였는지라, 약간의 자아도취에 빠져 제트기처럼 활강과 상승을 반복하다가, 아직 공사 중인 VIP 라운지로 곤두박질쳤다. 내장 공사를 마치고 보안 시스템만 손보면 되는 상태였는지라 마침 라운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발코니로 나가 까마득한 관중석 아래 필드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소년을 찾지 않았다. 월계수로 노를 삼고 풀잎을 삿대 삼아 물을 저으며 나아가니 강물 위로 달빛이 흩어졌다.
-「펜데믹」 부분
노랗다는 건 주관적이고 검다는 건 과장이다. 닦인 자국이 덜 닦인 자국을 묘사할 수도 없고 신앙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라.
옷장 안의 태양이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장롱 문짝이 기울어진다. 인터넷으로 힌지를 주문하고 중화제를 검색한다.
먼지 공이 자국 위로 떨어진다.
-「잠 없는 자국」 부분
늦잠을 잤다
어제는 댐을 만드느라 고단했다
밤사이 강은 사라졌다
어제는 분명히 있었고 오늘은 없는 강 위에 댐만 남았다
강어귀의 채석장도 문을 닫았다
고사목 가지 끝에 입 빨간 물새가 앉아 이쪽을 보고 있다
혹시 이 풍경에서 잊은 것이 있지 않나요
물고기-
-「돌의 돌-돌돌」 부분
저수지에 짧은 우기가 찾아오고 코끼리가 언덕 위에서 달려 내려와 갓 자란 싹을 밟으며 우체국 방향으로 사라진다. 망치 든 남자의 망치질은 사흘에 한 번. 달포에 한 번. 어쩌다 1년에 한 번.
두드리듯이가 아니고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친다. 거대한 쟁기를 벼리듯 내리친다. 망치질이 끝나면 쟁기를 받아들고 코끼리를 찾으러 갈 것이다. 코뚜레도 없이. 멍에도 없이. 3층의 문은 열어둔 채로. 마른 저수지는 비워둔 채로.
-「채석장-돌돌」 부분
출판사 서평
“먼지가 되리라
당신은 젖은 채로 너무 오래 살았어요”
-입자들이 탄생하고 움트는 허공 만들기
물고기 모양의 신발과
신발 모양의 물고기가
대롱 끝에서 부풀어 오른다
신발 속 모래 한 알
털어내려면 한 발로 서야 한다
[……]
물방울 두 개가 얼굴을 마주 보며 식어갈 때
먼저 마른 물방울이 나머지 물방울의 신발이 되고
남은 물방울은 홀로 물고기가 될 때
신발 안에 모래 한 알 숨겨놓고
두물머리 깊은 강물 속 이야기를 듣는다
-「보헤미아 유리」 부분
『보헤미아 유리』 속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단어로 ‘물(빗)방울’ ‘모래’ ‘먼지’를 꼽을 수 있다. 이 단어들은 하늘, 벽면, 바닥에 존재하는 최소 단위이자 바람이 불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허공에서 포착되고 사라지는 사소한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하연의 시 세계에서 “먼지 속 먼지와 먼지 밖 먼지는 사이가 너무 멀”어서 “먼지 하나/먼지 둘/먼지 셋” 하고 번호를 붙여줘야 할 만큼 중요하다. 먼지는 곧 일생의 기억을 껴안은 ‘노인’과 ‘나무’ 쪽으로 옮겨 간다. “노인 하나, 나무 하나, 노인나무 하나, 나무노인 하나, 허공 하나 번호 끝”(「파」)을 외치며. 한편 “물방울은 홀로 물고기가” 되고 “마른 물방울”은 “신발”이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든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물방울은 “깊은 강물 속”으로 전이된다. 물방울이 포착한 이미지들에서 장면이 바뀌어 단단한 입자인 모래가 신발 속에서 화자의 의식을 건드리고, “모래 한 알”이 “크고 단단한 성벽이었”고 “강을 밝히는 석등이었”(「보헤미아 유리」)다는 상상력으로 뻗어나간다.
허공을 떠도는 작은 요소 하나가 자유롭게 몸을 바꾸고,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금세 허물어지는 모습은 시집 곳곳에서 포착된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하늘과 물의 경계를 지”(「펜데믹」)우는가 하면 “머리통만 한 돌이 바로 눈앞 떡갈나무를 찍고서는 어느덧/모래알만큼 작아져 양말 속에서 까끌거”(「돌의 돌-돌돌」)리기도 한다. “망치질 한 번에 물고기가 사방으로 튀고/깨진 돌 틈으로 새 떼가 솟아”(「채석장-돌돌」)오른다. “빨간 벽돌로 태어나 잠을 청”하다 보면 누수로 “물이 흐”르고 물은 “얼룩이”되기도 하는데, “그 직전엔 빈 의자 위의 얼룩이었고, 그 훨씬 전엔 의자를 만들던 목수였으며, 그다음엔 벽돌에 맞아 죽은 행인이었다”(「망치」). 이처럼 시인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입자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미래의 형태를 무질서하게 예측하며 “허공을 일구고 가꾼다”. “허공의 얼룩을 따라 입자들이 저들만의 체계를 그었다가 지우는 것을 그의 시가 살뜰하게 기록”(해설)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 발밑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모래”(「보헤미아 유리」)가 가득하다.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라야 한다”
-꿈과 현실, 죽음과 삶의 경계 만들기
나는 거미의 꿈이다
한라산 중턱에서 만난 무당거미는 내 꿈을 파먹은 민자가게거미의 회상몽이다
눈물이 거미줄에 이슬처럼 맺힌다
-「거미」 부분
시인 최하연이 꾸준히 그려온 세계의 중심 키워드 중 하나는 ‘꿈’이다. 꿈은 잠든 뒤 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식과 구분되는 무의식의 영역, 실현하고 싶은 이상, 헛된 생각과 같은 의미도 담고 있다. 시인은 각각의 의미를 섞거나 시 속 배경 자체를 입자들이 부유하는 몽환적인 장소로 표현하며 시에서 현실과 꿈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다. 해설을 쓴 이은지 평론가의 말처럼 “의식을 무의식에 가깝게 변모시키는 일, 의식의 체계에 무의식의 체계를 이식하여 자라나게 하는 일”을 꿋꿋하게 수행할 뿐이다. 「당집」속 꿈은 “숙면 베개를 물어뜯”는 “강아지”가 “꿈의 한 틀을 파괴하는” 공간이며 “베개가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날” “단 하나의 꿈이 모든 꿈을 덮어쓰는 그날”을 두려워하는 곳이다. 화자는 “검은 돌들도 흰 구름을 베고 다들 눕”자 “잠이 베개에 매달”리는 것을 보다가 “두루미”가 “발톱 빠지는 꿈을 꾸고 낙방하여 텃새가”되는 광경과 마주한다. 화자는 “닻도 달지 않고”(「닻」) 허공 속으로 섞여 들어가며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기록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세계는 영원한 잠, 즉 ‘죽음’과 맞닿기도 한다. 처음 배치된 시 「흰 꽃」은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작하는데 사방으로 펼쳐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발 없는 것들의 무덤”이고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고인의 얼굴”을 가늠하게 한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무심코 창문을 열 때” “훅 끼쳐 오는/물컹한 죽음의 냄새”는 피할 수 없다. 사실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밤 엘리베이터에 태워져/밤새 끌려다니다가/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선”(「외박」)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꾸준하게 일궈온 상상력의 나날이 무너지고 영원한 이별 앞에 섰을 때 “자국은 말이 없”이 “잠을 잔다”. 화자는 “깬 적이 없어서 잠을 모르는 잠 속에서 자국을 걷어내고 닦고 닦고 말”리면서 “먼지 공이 자국 위로 떨어”(「잠 없는 자국」)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시인은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사이에 얇고 투명한 “보헤미아 유리”를 세워놓고 이승 전의 세계와 이승 이후의 세계를 반짝거리는 빛과 함께 훤히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망치 든 남자가” 되어 지속적으로 “물속에서 돌을 깨”(「채석장」)며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지친 우리에게 허공의 입자를 닮은 “구근을 겨우내 꼭 품”(「망치」)도록 건네며 위로한다. “두드리듯이가 아니고 있는 힘을 다해”(「채석장」) 만들어진 이 시집은 우리 안에서 곧 끝도 없이 새로 태어나고 부서지고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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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젊은 날 그의 시들은 새롭고 신선하고 아팠으나 어느듯 중년에 이른 그의 글들은 온화하고 아름답고 깊다. 시집 발간을 축하합니다!!!
반가운 시집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