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속성들입니다. 이 신성한 속성은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정 기준 이상의 고위직 공직 희망자는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의에 근거한 심판의 과정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살아왔던 과거와 현재는 공개적인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공직 제안을 수락 안 하면 그만입니다. 이와 달리, 저를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은 장차 있게 될 주님의 의의 심판을 결코 피해 갈 수 없습니다(고후 5:10).
지금은 작고했지만, 미국에 프랭크 카프리오라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담당한 경범죄와 교통 위반 재판들은 방송에 공개되었고, 그의 유머와 사람 중심의 따뜻한 판결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딱한 사정이 있거나 베트남 파병 등 국가에 헌신한 이들에게는 벌금을 축소 혹은 선처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엄중한 법정 판결에 (사랑의 연장인) 긍휼이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약 2:13).
위 본문은 얼른 보면 평이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추구하면서 제 안에 심판과 긍휼에 대해 많은 감상과 느낌이 생겼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것에 대한 간략한 요약입니다.
“심판”: 성경은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세 종류의 중요한 심판을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딤후 4:1). 1) 모든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심판(고후 5:10), 2) 살아 있는 민족들(양과 염소)에 대한 심판(마 25:32-46), 3) 죽은 모든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계 20:11-15).
우리는 불신자들의 대화에서도 ‘권선징악’, ‘천벌’ 등 심판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볼 수 있지만, 위 본문은 1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에서 알 수 있듯이,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을 말합니다. 즉, 전후 문맥은 만일 우리가 동료 믿는 이들을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하고,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고, 훗날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 ‘긍휼이 없는 심판’이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일부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잘못된 통념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도 장차 심판을 받겠지만, 그것은 큰 상 혹은 작은 상을 결정하는 심판일 뿐 벌은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1) “각 사람이 선이든 악이든 자기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그대로 대갚음” 받는다(고후 5:10), “긍휼 없는 심판”,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마 12:36) 등의 엄중한 경고와 위배됩니다. 2) 우리가 생각하는 죄악의 개념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죄악이 전혀 다름을 알지 못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십계명 등을 어겨야 죄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에게 (죄) 악은 “생수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저버리고, “새는 저수조들”에 물을 퍼 담느라고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렘 2:13). 사정이 이러하다면 주님은 그날에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날 엄중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위 세속적인 인사 청문회 훨씬 그 이상으로 긴장과 부끄러움과 후회의 감정과 함께 당혹스러운 판결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긍휼: 위에서 세속 판사의 긍휼이 있는 판결을 소개했지만, 사실 긍휼은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이고 타고난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은혜는 겸손한 사람처럼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 임하지만(벧전 5:5), 긍휼은 ‘돌아온 탕자’처럼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도달한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묵상할 때 문득 예전에 누렸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이의 사례가 떠올랐습니다(마 18: 23-35).
즉, 왕에게 만 달란트 빚을 져서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야 할 한 노예가 주님의 긍휼로 모든 빚을 면제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는 풀려난 후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노예를 만나 그의 목을 조르며 빚 갚으라고 닦달을 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것같이 너도 동료 노예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라며 이것을 긍휼과 연관 지으셨습니다(33절).
사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어 있었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육체와 생각의 욕구대로 행하며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엡 2:1-4). 이런 처지를 생각한다면 주변 사람들을 너무 모질게 대하기 보다는 너그럽게 대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높아지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 주님, 자신에게는 엄격해 공의 따르고
다른 이에겐 은혜로 관대하게 대하여
우리 삶 속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표현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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