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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12,24―13,5ㄱ
복 음 : 요한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에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부 강의도 많았고, 특히 본당에서 성삼일을 보내면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끝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딱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부터 아픈 것입니다.
우선 고개를 돌리기 힘들 정도로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었지만, 계속 일정이 있어서 쉴 수 없었습니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 금요일부터는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몸 곳곳에 찰과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우리 신앙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께 하는 헛된 맹세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내게 필요한 대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양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을 이끄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뜻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을 뜻을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 했으며,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갈 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은 제 온몸에 당신 손때를 묻히십니다.
제 손을 꽉 붙들고 놓치지 않으시려 손깍지를 꼭 끼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 보고....
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종으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부활 대축일 미사 때입니다. 3시 미사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 자매님이 아이 셋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첫영성체는 했는데 아직 첫 고백을 못 했다고 합니다.
제게 고백성사를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젊은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보는 줄 알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부부는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개신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는 한국에서 성당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아이’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성당에 찾아가서 신부님에게 안수받으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 없었고,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저는 젊은 부부를 위해서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도 성당이 밝고, 깨끗해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와 젊은 부부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갈망’에서 시작되고, ‘감사’에서 성장하고, ‘기도’로 꽃을 피우고,
‘나눔’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 시작은 ‘갈망’입니다.
속담에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계명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예언자’를 보내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제 외아들의 말을 듣고, 외아들을 믿으면
유대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지가 동냥 통을 버린다는 말처럼
계명을 어겼고,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유대인들은 굴러들어 온 복을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메시아이심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78년 전입니다.
관리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고 물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인정하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모진 고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조선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주교인이라고 말하였고,
사제생활 1년 만에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하였던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말과 행동으로 천주교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축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나라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점이 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 수시로 외침을 받아, 식민 통치를 받고 유배를 떠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축제를 즐겼습니다.
계절별로,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는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 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확증과 믿음은 별 개의 것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을 포함한 요한복음 10,22-42는
예수의 神聖에 관한 유다인과의 논쟁을 보도하고 있다.
이 논쟁 보도는 앞서간 ‘목자와 문’과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10,1-21)과 비교해 볼 때,
장소는 같은 예루살렘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바로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인 22절이 밝히고 있듯이
논쟁의 시점은 성전 봉헌절 축제 기간이며 계절은 겨울철이다.
반면에 비유 말씀은 요한복음 7,10이 보도하는 초막절 축제 기간 중에 행해진 말씀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7,10-10,21의 보도는
시기적으로 봉헌절보다 2달 정도 빠른 초막절에 속한다.
성전 봉헌절은 기원전 165년 기슬레우 달(12월)에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燔祭 제단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일주일간 계속 지냈으며,
초막절과 비슷한 전례 의식들을 거행하였다.(2마카 1,9; 10,6 참조)
그러나 전체 구조상의 논리성은 상당히 면밀하여
착한 목자를 주제로 한 그리스도론은 일관성 있게 추구되고 있다.
시간은 흘러 예루살렘 성전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계절적으로 시간만 흐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주기를 재촉한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24절)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고 대답하신다.(25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아버지께서 자기를 파견하셨으며,
종말론적 계시자임을 언급하셨을 뿐 아니라(5,17; 5,38; 6,36; 8,54 등 참조)
이 言明을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업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메시아이심을 밝힌 적은 요한복음에 딱 한 번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에서 한 여인이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신 부분이다.(4,25-26)
유다인들은 그러나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不信하는 이유로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을 재삼 언급하신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으며,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26-27절)
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이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과
양들이 자기 주인이 아닌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양들이
주인의 말을 따라 행동할 것은 뻔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양들이 주인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듣다’와 ‘믿다’의 상호관계가 부각된다.
즉 믿음은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믿음의 원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 결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증을 먼저 손에 쥐려했던 것이다.(24절)
확증을 손에 쥐고 그다음에 믿겠다는 心算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확증과 믿음은 별 개의 것이다.
자명한 사실을 두고는 믿음을 거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말씀은
유다인들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어렵게 들린다.
예수님 편에서 볼 때,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심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나 우리들 편에서는 믿음이 따라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믿음은 고귀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이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로 내어 맡길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출 때, 그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기원을 전하여 줍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지만(인성)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신성)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시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며 무기력한 불통을 지적하십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견제와 위협만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상대의 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어제 복음),
그 소리를 따라야 하며(오늘 복음), 그 따름으로
상대방의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 관계성을 증언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하여도
다시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똑같은 의심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을 붙잡고 있으니 믿음도 생겨날 리 없습니다.
사공 제노 수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묻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이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과 행동으로 알려주었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예수님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속한 양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예수님을 따른다.
예수님은 당신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아무도 예수님에게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예수님이 누구이신 알고 싶어 속이 타는 유다인들은
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까?
말과 행위로 당신에 대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심에도
왜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할까?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원하는 ‘분명함’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애매모호하게, 두루뭉술하게, 추상적으로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가 너무 어려웠을까?
아닐 것이다.
유다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고, 그들의 눈은 감겨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 계속 해서 답을 주십사 기도하고 요청하면서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양들의 목자이신 그분 우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내 생각과 뜻이 예수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해 보시길, 그리하여 예수님의 양무리 안에 있는 복된 이가 되시길.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