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64) 우리 시의 높낮이와 창의적 서정 4-2/ 시인, 평론가 박태일
우리 시의 높낮이와 창의적 서정 4-2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orieksy/ [2] 문학의 갈래
2.
서정이란 여러 뜻을 품는 말이다.
뜻과 속살에는 편차가 크다.
그런데 서양 사람 람핑은 서정에 대한 잡다한 정의를 간명하게 묶었다.
유래 깊은 서양 갈래론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서정의 본질은
단일한 한 인격의 목소리만 들리는 단독 발화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말하는 주체가 뒤바뀌는 이야기의 매개 발화나,
아예 다른 인격으로 바뀐 주체들이 말을 주고받는 극의 교환 발화나 다른 특성이다.
이렇게 보면 서정 갈래에 들어설 수 있는 유형이나 종류는 매우 넓어진다.
1인칭 시점이 아닌 주체의 목소리를 한결같이 들려주는 사상시· 사물시까지 모두 시정 갈래 속에 든다.
우리 당대 시론에서 너나없이 끌어다 대곤 하는 슈타이거류의 주관성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틀이다.
① 귀뚜라미 울면
귀뚜라미 보일러를 점검할 때다
들창에 꽉 껴
오도 가도 못하는 만월
해마다 우리 집 연통을 막는 것은
달빛에 글 읽는 쓸개 빠진 저놈이다
―김종철, 「가을이 왔다」 전문 (『시와시학』 겨울호, 시와시학사, 2012)
② 모하메드 알 카다피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
알 사디 카다피
카미스 알 카다피
카다피 카다피 카다피, 일곱 아들의
거룩한 아버지 무아마르 카다피,
마흔 명의 아름다운 금발 경호원을 곁에 두고
남달리 황금을 사랑한 세련된 독재자.
―강인한,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가운데서 (위의 책)
①과 ② 둘 모두 서정의 본디 모습을 잘 갖추었다.
①에서는 “보일러를 점검할 때”라 깨닫고, 귀뚜라미를 일컬어 “쓸개 빠진 저 놈”이라 말하는
말할이 한 사람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른바 일인칭 ‘나’의 단독 발화다.
② 또한 마찬가지다.
카다피가 “남달리 황금을 사랑한 세련된 독재자”라 한 말할이의 목소리로 한결같다.
다만 ①과 ②는 말할이, 곧 주체의 됨됨이가 다르다.
①에서는 개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강하다. 곧 사적 주체다.
거기에 견주어 ②는 개인의 목소리라기보다 공공의, 또는 이미 공유하고 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곧 공적 주체인 셈이다.
사적 주체가 앞선 시는 경험적 서정이 중심으로 떠오른다.
거기에 견주어 공적 주체가 앞선 시는 관습적 서정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시 종류가 공론시·증언시다.
신문 논설 또는 정보 기사의 주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모든 시인이나 시 속에서 이러한 두 주체는 서로 포개지고 맞물린다.
어떤 데 더 멀고 가까운가 하는 비중·정도 문제가 남을 따름이다.
사적 주체임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①에서 “글 읽는 쓸개 빠진 저놈”은 공적 울림까지 싸안고 있다.
거꾸로 ②에서 ‘카다피는 독재자’라는 공적 울림 속에서도 “카다피 카다피, 일곱 아들의”로 되풀이하는
빠른 가락에는 사인이 지닌 사적 작시술의 특징이 담겼다.
그런데 주체가 공적 관습 자리로 나아가든,
시적 경험 자리로 나아가든 우리 서정시가 튼튼하게 발전하려면 동의이음어적인,
동어반복 상태에 머물지 말고 창조적·창의적 자질을 키우는 쪽으로 드높이 길을 잡아야 한다.
그를 위해 시문학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애쓸 일이다.
유사 창조와 진성 창조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진성 창조에 다가서기 위해 연구가·비평가 집단뿐 아니라 무엇보다 시인 스스로 힘든 각고를 피하지 말 일이다. 이런 점을 마음에 새기고 지난겨울 시들을 살피자니 두 젊은 시인의 작품이 눈에 든다.
한 편은 공적 주체에 가까운 말할이를 드러내고,
다른 한 편은 사적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① 이미 천 척의 배들이 떠나갔다
지천으로 널린 안개를 뚫고
포구에서는 누구나 떠나가야 한다
깊은 바다를 먼저 통과해 간 뱃사공들은
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그들의 언어로 등대를 세웠다
등대 불빛이 찢어진 고전처럼
허공에 나부낄 때.
―김경엽, 「천의 바다」(『시와정신』 겨울호, 시와정신사, 2012)
② 방문 양옆으로 빨랫줄처럼 나일론 줄을 치고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커텐이라고 좋아라 했던 아늑한 방, 자취방
창호지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
철들기 전에 지는 꽃도 있지
―한소운, 「망초」(위의 책)
먼저 ①을 보자.
①을 끌어 잡고 있는 시인의 말씨와 표현은 개별 말할이의 경험적 서정이 아니다.
“천 척의 배”, “언어 등대”, “고전처럼 찢어진 불빛”이라는 비유 자질로 버티는
작품 속살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유행했던
이른바 막연한 내면주의 시 버릇 되풀이다.
말하자면 시문학사 속 관습 주체의 목소리와 표현에 갇힌 상태라는 뜻이다.
이 시의 공적 됨됨이가 그로부터 말미암는다.
‘배’와 ‘안개’, ‘뱃사공’과 ‘등대’라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표현 가치를 맛보기 어렵다.
막연한 멋스러움에 눌러앉은 태도만 두드러져 보인다.
버릇처럼 가져다 놓은 “천 척”이라는 앎에서부터 “지천으로 널린”, ‘깊은’, “바람 부는”에서
보는 바 밋밋한 장식적 수사에 담긴 속내가 그것이다.
개별 주체의 창의적인 상상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견주어 ②는 ①과 맞선 자리에 놓인다.
사적 주체의 경험 현실이 오롯하다.
과거 시제 채용과 “그 밤”에서 보이는 대명사 ‘그’가 그것을 받쳐 주는 지표다.
그런 가운데 망초에 대한 창의적인 연상을 살려 냈다.
다만 말 다루는 솜씨는 가다듬을 구석이 보인다.
보기를 들어 ㉠ “방문 양옆으로 빨랫줄처럼 나일론 줄을 치고”라 썼던 첫 토막 첫 줄과
“방문 양옆으로 나일론 빨랫줄을 치고” 사이,
㉡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라는 둘째 줄과
“꽃무늬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사이,
그리고 ㉢ “커텐이라고 좋아라했던 아늑한 방 자취방”이라는 셋째 줄과
‘아늑한’을 빼 버린 시줄 사이,
㉣ 넷째 줄 “창호지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과
“창호지문짝 고리 하나를 믿었던 그 밤” 사이,
㉤ 다섯째 줄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와
“방문 앞 신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누가 있었지” 사이,
더 나아가 아예 ㉥ 둘째 토막 한 줄을 죄 없애 버리는 손질을 한 뒤
원텍스트와 수정텍스트 사이 차이를 견주어 본다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창의적 서정이라는 쪽에서 볼 때 이 작품은 ①보다 한참 윗길이다.
<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박태일 평론집(박태일, 케포이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9.1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64) 우리 시의 높낮이와 창의적 서정 4-2/ 시인, 평론가 박태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