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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4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12,24―13,5ㄱ
복 음 : 요한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는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리심은 제게 믿음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머무르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신 예수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 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넷플렉스 영화 중에 ‘삼체’가 있습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구는 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일출과 일몰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동지와 하지를 예측할 수 있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달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밀물과 썰물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보름달과 초승달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이 이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3개이거나, 달이 3개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삼체의 상황에서는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은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영화는 이체의 지구와 삼체의 외계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물리학이 삼체의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삼체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부활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이체의 세상이 추구하는 질서와 원칙이 있습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암호와 같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보호막을 가지려고 합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기 위해서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체의 질서와 원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풀 수 없던 문제에 대한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손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버릴 수 있었고,
고통을 넘어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사명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보여주었는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배고픈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직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나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부제들이 나눔을 전담하였고, 사도들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방인의 문화와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각자의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행전, 요한행전, 데레사 행전, 마리아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께로 가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었던 ‘행전’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전에 비움, 십자가, 나눔,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행전에 용서, 겸손, 이해, 친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은 샘물의 본질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 하신다.
바로 당신이 바로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 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심판이 아니라 구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산책길에서 한 모녀를 만났습니다.
젊은 엄마는 갓난아기가 아닌 예닐곱 살 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보니 중복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애야! 저 꽃들 좀 봐. 정말 예쁘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 왔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제 눈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습니다.
엄마도 아이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까? 평생을 저렇게 살아야 할텐데,
그 세월을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오래오래 두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무상으로 우리에게 갖은 은혜를 베푸시고,
놀랍게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총으로 초대하실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물론 그런 이유도 해당되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 결핍과 연약함으로 인한 주님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고, 구원과 영생으로 초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갖은 세파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너무 안쓰러워서,
고통과 시련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가련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구절 중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강조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게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 먹듯이 죄를 짓고, 똑같은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사가에 따르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언젠가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제1부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의 요한복음 안에서의 위치를 잘 살펴보면
이는 예수께서 오직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의 틀 안에서 행하신
長久한 고별사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공적인 말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를 내용상의 특성에 따라 제1부(1-12장)와 제2부(13-21장)로 구분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제1부에 담겨있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 자기 계시(2-12장)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제1부 예수님의 공생활을 마감하는 결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에 기초하기보다는
통상 요한복음 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오늘 복음의 요한 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 되면서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앞서간 구절들에 이미 밝혀져 있다.
요한 12장을 처음부터 살펴보자.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기적 때문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예수께 대한 대대적인 수배 명령이 이미 내려진 가운데(11,57)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소생한 라자로가 살던
베다니아 동네 사람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하셨고,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예수의 장례를 예고한다.(12,1-8)
그 다음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공생활 중 마지막 과월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큰 군중의 무리가 환영하였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12,12-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정적인 환영을 받으셨으나,
이제 더 큰 영광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암시하였다.
바로 수난과 죽음의 예고이다.
이 죽음의 예고는 서로 상반되는 놀라운 대조적 原理 안에서 시사된다.
그것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
아들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원리,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빛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원리이다.(12,20-36a)
이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일단 몸을 피하셨다.(36b)는 구절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이것으로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자기 계시적 공적 생활을
마무리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2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보도(12,37-50)는
자연적으로 저자의 독자적 편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첫째로(37-43절) 예수께서 행하신 그동안의 표징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지적하고 있으며,
둘째로(44-50절) 예수의 자기 계시적 정체성과 파견 사명을 요약하고
불신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큰소리로(44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어조는
자기 계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구사하는 것으로서
말씀의 내용이 선언문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암시한다.
오직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버지까지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따로 있으면서 一致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둘이 철저하게 하나라는 원리에 있다는 것, 빛과 어둠이 함께 共存할 수 없다는 것,
불신하는 자체가 불신자 스스로를 심판하리라는 것,
아들이 아버지의 命을 따르는 것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願을 따르는 것이,
복음사가가 보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요약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시면서 예수를 파견한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곧 진리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구원이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인 기원과 파견의 목적을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적 결단이며,
관계 속에 실존하는 인간 존재의 意味인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본문도 “나”라는 말이 절마다 등장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직접적으로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당신께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체’이신 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자 보내지셨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어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이라는 ‘대조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두 가지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우리가 어둠 속에 방치되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체’라는 주제로 돌아가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당신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언제나 진리이고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살아 있고 역동적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증언합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크라조’는
비명을 지르듯이 격하게 소리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없이 증거와 표징만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사명으로 오셨는지
격렬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에 있지 않게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가 여전히 소모적 의심으로 어둠을 붙잡고 있으면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단단하고 격렬한 어조로 경고하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김 성심 수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2,46)
빛으로 오신 분은
24시간 억지로 불을 밝혀 도리어 세상을 공허하게 만들거나
주위와 상관없이 지나치게 밝아 스스로만 빛나고
오히려 나머지는 어둡게 하는 그런 빛이 아니라,
나의 내면까지 밝히고 따뜻하게 채우는 빛이시다.
머무르지 않게 하신다는 말은
내 머무는 곳을 어둠에서 빛으로 짠하고 바꾸시는 게 아니라
어둠에서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도록
나를 다독이고 이끄신다는 말이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