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25일 목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1베드 5,5ㄴ-14
복 음 : 마르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삶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었을 때,
이제 막 후반기를 맞이했거나 곧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이미 후반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요?
그들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첫째, 인생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둘째, 이제 나답게 살고 싶다.
셋째,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인생 전반기에는 주로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하면서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많은 것을 하고 또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면,
이제 내려놓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도 황창연 신부님처럼 큰 신부가 되어야지.”
그 친척은 아마 유명한 신부를 큰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잘하고 이를 통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온 힘을 쏟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글이 아닌 몸으로 주님을 알려야 함을 묵상합니다.
특히 나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 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인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시지요.
2,000년 동안 읽히는 성경을 기술할 정도로 그의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그 뛰어남을 살려서 자기 이름을 더 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알려야 할 것은 주님뿐이었고, 주님의 기쁜 소식뿐이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만을 알리려고 하고,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만족을 얻었을까요?
의미 있는 삶을 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함으로 인해 모
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전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전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 전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러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먼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혹 복음이 아닌 다른 것, 자신의 가르침이나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대체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생활 시작 때 하신 말씀이고, 하나는 공생활을 마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요,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루카 24,6)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가라’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 하고,
내가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고,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할 일입니다.
곧 '온 세상' 어디든지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며,
누구나가 그리고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우리의 편리와 안락을 추구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응답해야 할 구원의 짝지이며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강요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며, 동시에 함께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일입니다.
정녕 함께하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일,
바로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 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길 기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행기를 타면 좌석이 늘 신경 쓰입니다.
저는 주로 창가보다는 복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창가에 있으면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복도 쪽에 있는 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도 쪽에 있으면 원하는 때에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옆에 있는 분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도 복도를 원했습니다. 다행히 복도 쪽으로 좌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좌석을 찾았는데 제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그 사람도 저와 같은 좌석번호였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오더니 착오가 있었다면서 제게 새로운 좌석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좌석이 복도 자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제 옆으로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옆에 두 좌석이 비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1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주 편안하게 거의 비즈니스 좌석의 수준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부활 선물로 편안한 좌석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해서 ‘발현산’을 올랐습니다.
저는 뾰족한 바위산을 오르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올랐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들것으로 모셔 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해서 올라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환희의 신비 5단이 청동으로 있었습니다.
저와 순례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이 발현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는데 성모상이 그곳에 모셔진 사연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발현산을 올랐고,
그분들의 자녀 중에 아픈 아이가 있었는데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비행기 좌석이 좋은 곳으로 옮겨져서 감사했다면,
아픈 아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순례자들은 아이가 치유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성모상 주변에는 많은 순례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모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하늘에는 둥근 해무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저와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하늘도 순례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하신 산상 설교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하였고, 그 믿음이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그 믿음이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기도 후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복음 선포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 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우리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동남아시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그야말로 극진히 챙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남국 특유의 향기 가득한 산해진미가 매 끼니마다 풍성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맛이 너무도 밋밋했고, 그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맛이 검증된 빵이나 음료, 야채, 과일 쪽으로만 손이 갔고,
제 머릿속에는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음식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치, 어리굴젓, 우럭매운탕, 부대찌개, 갈치조림...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인데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선교사 형제들이 우러러보였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기후, 환경이 180도 다른 이역만리 타국에서
가장 음식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수시로 떠오르는 향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당부 말씀에 따라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을 때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만민들 한 형제, 한 동포로 바라보는 만민동포애,
인류 전체가 이웃이요 한 형제로 바라보는 큰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과 기적을 이루는 힘을
선교사들에게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협력자인 성령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나 비유를 통해 성령께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령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람’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이 무엇입니까? 공기의 흐름입니다.
밀도 높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흘러가는 공기가 바람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 기쁨, 은총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령,
결국 고기압 자리에 위치한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 질병과 상처, 좌절과 분노 상태에 놓인 우리,
결국 저기압 자리에 위치한 우리 인간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뜨뜨미지근 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나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폭발적이며 뜨거운 하느님 현존 체험도 요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인 이웃 선교나 능동적인 복음 선포는 뒷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협조자이신 성령과의 친교가 활발하지 못해서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노력의 결핍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과 함께, 그분의 인도에 따라 하겠다는 의지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도 낮추고 그분께 내어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각자가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4월 25일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의 복음서 첫 문장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술하면서
교회 안에서 ‘복음’이란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했다.
마르코 축일을 맞아 마르코 복음사가와 복음서에 관해 정리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고 선포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역사의 인물인 나자렛 사람 예수가 믿음의 그리스도 바로 ‘구세주’라는 고백이다.
복음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돼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6)
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이 고백이 바로 ‘복음’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복음서 저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복음은 헬라어(희랍어) ‘에우안겔리온’에서 나온 말이다.
에우안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기쁜 소식을 전해준 대가로 주던 선물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모든 소식을 인편으로 직접 전달했다.
이들 중 특히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는 선물을 줬다.
성경에서 ‘에우안겔리온’은 과거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기쁜 소식에 관해 사용됐다.(이사 61,1)
이 에우안겔리온은 장차 메시아가 오시어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복음서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라 한다.
그래서 첫 복음서의 저자인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서 서두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란 말로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즉 교회 구성원들을 위해 저술됐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언행이 제자들과 목격자들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것을 ‘구전 복음’이라 한다.
이 구전 복음이 제자들의 필요로 서기 50년부터 90년 사이에 글로 남겨지기 시작했다.
첫 기록 전승은 서기 50-60년께 예수님의 말씀만을 모아 놓은 ‘예수 어록(Q)’이 있었다.
그러다 예수님 말씀 뿐만 아니라 행적과 기적, 비유 등을 모아
서기 70년 전후로 첫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가 저술됐다.
마르코⋅마태오⋅루카 복음서는 같은 관점에서 쓰였는데, 이를 ‘공관복음(Synoptica)’이라 한다.
라틴 말 ‘시놉티카’는 ‘함께 바라보다’는 뜻이다.
공관 복음 세 복음서는 내용과 언어, 사건 순서들이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기본적으로 마르코 복음서의 구성을 따르면서도
둘의 공통 문헌이나 각자 고유한 자료를 첨가해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했다.
서기 90년께 저술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과 구성뿐 아니라 관점도 다르다.
복음서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됐다.
당시 지중해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댜였으나.
언어와 문화는 헬레니즘화 돼 헬라어가 공식 교양 언어였다.
네 복음서와 신약성경은 382년 로마 교회 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정경(canon)으로 확정됐다.
마르코 복음사가
마르코 복음사가는 신약성경에 무려 10번 가까이 등장한다.
그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헬라식 이름이다.
그는 마리아라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의 집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집회를 했던 곳이다.
그는 바르나바와 사촌(콜로 4,10)이며,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이다.
마르코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수행하며 안티오키아로 갔고,(사도 12,25)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에도 함께했다.(사도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사도 13,13)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으로 그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함께하지 않았지만(사도 15,36-40),
로마에서 바오로가 투옥됐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다.(콜로 4,10)
베드로 사도가 마르코를 “나의 아들 마르코”(1베드 5,13)라고 할만큼
그는 베드로의 애제자였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천사의 도움으로 갇힌 감옥에서 기적같이 풀려나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사도 12,12)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마르코의 어머니 집을 찾았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고, 로데라는 하녀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마르코 복음사가는 집회를 열만큼 저택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와 관계가 깊었던 마르코에 대한 초대교회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베드로 사도의 진정한 대변인이며 통역관으로 여겼다.
마르코 복음서의 親著性에 관해 처음으로 증거를 제시한 인물은
프리기아 지방(現 터키)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60-130) 주교였다.
그는 마르코 복음사가에 관해 이렇게 증언했다.
“베드로의 통역괸이 된 장로 요한 마르코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것 가운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순서대로는 아니라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거나 그분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내가 말했듯이 훗날 베드로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과 관련해 해석하려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곤 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몇 가지 내용을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기억하면서 어떤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자신이 들은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며
거짓 진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파피아스의 단편,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39,14-15.
「교부들의 성경 주해 – 마르코 복음서」 번역 인용)
파피아스의 증언 외에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와
리옹의 이레네우스(135-202)도 마르코를 베드로의 제자이자 통역관으로 소개하며
그가 베드로 사도 순교 후 복음서를 썼다고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또한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집트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마르코는 최초로 이집트로 파견돼 그곳에서 자신이 기록한 복음을 선포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16,1-2)
교회 전승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가 된 마르코는
신자들과 불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이교도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다.
이교도들은 마르코의 목에 밧줄을 묶어 이틀 동안 거리로 끌고 다녔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했던 마르코는 그렇게 순교했다고 한다.
이교도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이에 놀란 이교도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버려둔 채 도망치기 급급했다.
그 틈을 타 알렉산드리아 신자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수습해 모셨다고 한다.
이후 마르코 복음사가의 성해는 829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베네치아로 옮겨졌다.
베네치아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조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대성당을 지어 그곳에 그의 성해를 안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본디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나지만
오늘 복음이 포함된 9절에서 20절은
부활과 승천,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과 함께, 이를 구현하고자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너희”라는 주어와 “주님”이라는 주어가 상응하면서, 복음 선포가 우리 몫이라면
그 뒤 여정은 하느님께서 몸소 완성하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제시하고,
“그분께서”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이나 설득 또는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일상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독서).
그러면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복음).
복음화를 완성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성 호세 마리아 수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미사 후에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복음 선포를 하는 데 있어 표징들을 따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그 표징을 알아보기란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표징에 대해 믿음을 청하며
표징을 기다려도 이것이 표징이라고 느낌이 오거나
눈으로 짠~ 하고 나타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면 예수님께 간절히 바라고 믿었던 그 믿음에 비해
이러한 표징이 뒤따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쉽사리 포기하게 되고
믿음과 거리가 먼 불신의 완고한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전했습니다.
승천하신 후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자들은 성실히 그 사명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런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며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사명을 지켜나갈 때
자그마한 표징이 뒤따르더라도 그것이 표징임을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이 숨겨 놓은 표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신앙의 마음 밭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