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UAmQF4dEMU
빙산과 충돌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타이타닉 침몰후 감춰진 이야기들...
캐나다 동북부 할리팍스라는 곳에 가면 벌써 112년전에 타이타닉이 할리팍스 근해에서 침몰하면서 죽은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유명한 공동묘지가 바닷가에 있습니다.
캐나다 할리팍스에 있는 페어뷰 묘지는 타이타닉호 희생자 121명을 안장하고 있는 묘지예요. 영화 ‘타이타닉’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던 남자 주인공 잭 도슨이라는 인물의 묘비도 있다고 해요. 페어뷰 묘지에서
타이타닉 비극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해 봐요.
오래전 그곳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 많았는데 최근에 알려진 새로운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닥쳐 침몰하는 과정은 영화로 재연되었지만 영화만으로는 실제 상황을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생존자인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드디어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습니다.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 되었습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래히틀러 씨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습니다.
아래는 찰스·래히틀러 씨의 타이타닉호 참사의 자세한 사정을 담은 17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입니다.
우측이 찰스 래이틀러
선장은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많은 여성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남아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라고 불렀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는 몇 명 없었습니다.
래히틀러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저는 갑판 위에 한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성의 남편이
“그러지 말고 어서 타세요 여보”라고 말하자,
여성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을 거에요.”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애스터 IV 내외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애스터 IV 씨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서 한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사랑해요 여보!"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 씨의 시신을
생존자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타아타닉호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구겐하임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로 갈아 입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
구겐하임 씨가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 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 답게 죽을 것이오."
메이시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 부부
Macy 백화점 벽에 럴려있던 기념비
미국 메이시(Macy’s)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씨는
세계 2번째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아내 로잘리 씨를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습니다.
아내 로잘리 씨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라며
남편을 두고 배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 슈트라우스씨께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구명정 탑승을 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슈트라우스 씨는 단호한 말투로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라며
생사의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 씨의 팔을 잡고
천천히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프랑스 상인 와트열 씨는 두 아이를 보트에 탄 여인들에게 부탁하고
배 위에 남아 아이들과 작별했습니다.
두 아들은 이렇게 구조되었고
세계 각지의 신문사들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연달아 사진을 실어주어 어머니와는 재회할 수 있었지만
배에 남겨진 아버지와는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는
남편을 꼭 껴안고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남편은 주먹으로 그녀를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보트 안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재가하지 않았으며 남편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스 로잔의 생존자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이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 돼서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서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기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대단한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헴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저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의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이등 항해사 래히틀러 외 전부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새벽 2시, 각자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번 연산사 존·필립스는 여전히 전산실에 앉아
마지막 순간까지 ‘SOS’를 입력하며 자신의 보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선미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게 외쳤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날, 우리 모두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제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호소노 마사부미
그러나 예외도 있었습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노 마사부미(細野 正文: 1870년~1939년)는
타이타닉에 탑승했던 유일한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철도관료로 러시아에서 2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지인이 있는 영국을 방문후 뉴욕으로 가기 위해 타이타닉에 탑승하게 됩니다.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한 그때
승무원의 외침에 깨어나 구명조끼를 받아든 그는 구명정 근처까지 갔다가
보트가 부족한 것을 보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좋게 눈앞의 구명정에 두명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그는 기적처럼 살아남았습니다.
구조 후 미국에 도착했을때 그는 '행운의 일본인'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일한 일본인이라는 것이 불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얼마 후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잡지에는 영국의 윤리교수 로렌스 비슬리(Lawrence Beasley)가
"사람들을 밀쳐내고 보트에 탄 비열한 일본인이 있었다"
라는 증언이 실려 있었습니다.
"창피한 일본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는 직장을 잃었고
언론에 의해 오랫동안 겁쟁이로 비난받습니다.
'일본 남자라면 명예롭게 죽어서 돌아와야 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소노는 평생 비난속에 살면서도 변명 한마디 없이
자식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찰스 존 조그힌
찰스 존 조그힌은 타이타닉의 제빵사였습니다.
배가 빙산에 충돌했을때 취침 중이던 조그힌은 급히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구명정을 내리는 작업에 동참하였고 승객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켰습니다.
또한 수십개의 의자를 바다로 집어던져
사람들이 잡고 떠 있을 수 있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헌신적인 행동 덕에 구명정에 탑승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를 바란다며 그는 그 기회를 사양합니다.
이제 죽음을 직감한 그는 '술이나 먹자'라는 결심을 하고는
술을 꺼내 퍼마시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구명정이 떠나고 결국 타이타닉은 침몰했습니다.
조그힌은 거의 두시간동안 차가운 바다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술 덕분에 거의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물 위에 떠있는 생존한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실은 머리가 물에 젖지 않아 저체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술이 나를 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를 기리는 자리에서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White Star Line는
희생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를 기리는 자리에서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White Star Line'는 희생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Unsinkable’의 저자 '다니엘 알란 버틀러'는 약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삶 앞에서 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치고 혼자 남겨져 돈과 유산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혹은 삶의 어떤 고난과 마주친다 해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 분들의
희생정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매일 만사에 허덕이는 우리 삶,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까요,
지금 내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에서 놓아서는 아니될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며, 잊었던 내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이타닉호 마지막 침몰 현장에서 당대의 세계 최고의 부자들의 인품을 만나 봅니다.
사업은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자기 혼자만의 힘과 능력으로 부를 쌓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이 돕고 남이 도와줘야 가능한 일입니다. 인격이 모자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도 외면하고 사람에게도 외면당하는 사람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성숙한 인격의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늘도 돕고
사람도 도와 큰 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