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고종명(考終命)
월배댁은 대단한 잠복을 타고났던 사람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사일이 좀 뜸해지는 시절,
마을의 늙수그레한 아낙들이 저녁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마을회관에 모여선
민화투며 윷놀이 따위로 한껏 열을 올릴 초저녁부터,
그 시끌벅적한 뒷목에 쪼그리고 앉아 종내 꾸벅꾸벅 졸기만 했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끼워 넣어 놀고 싶어 해도 불가항력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치 잠 하나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월배댁의 잠은 알아주어야 했다.
아낙들은 그런 월배댁을 두고 한편으론
'잠충이, 잠충이'하며 한편으론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며
모두들 은근히 부러워했다.
얼마나 팔자가 좋기에 어디든 가서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저리도 꾸벅꾸벅 졸까.
시쳇말로 그 흔한 스트레스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
그러니 오래 살기는 떼어 온 당상이 아니냐며.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법인가.
잔병치레 한 번 한 적 없던 월배댁이
어느 초겨울 이른 시각 아침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서다가
문지방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린 것이다.
이웃집이 소리를 해서 부랴부랴 도회지 큰 병원으로 실려 가긴 했으나,
수술을 받은 지 서너 시간만인 그 날 오후 늦게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가족들로서는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애운하고 허망하고 …….
생떼같이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아내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언뜻 좀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망자의 가족들이 들으면 노발대발할는지 모를 터이지만,
냉정히 따져 보면 월배댁이야말로 참말로 멋지게 살다 갔다고
박수라도 치며 축하를 해 줄 일이 아닌가.
정상적인 생활은커녕 제 몸조차 간수하기 힘들어
가족이나 친지의 신세를 져야만 하는 노인들을 주위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아 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요새 들어 웬만큼 살았다 하면 팔구십을 넘기는 경우가 보편화되다 보니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비극의 예고편을 보는 듯하다.
미국 상무부장관을 지낸 피터 피터슨은 그의 저서
『노인들의 사회, 그 불안한 미래』의 첫머리에서,
고령화 사회가 가져올 상황의 심각성을 '경제 대국이 나아가는 미래의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빙산'에다
비유해 놓았다.
건강비용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의료비 수급 불균형 문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퇴직자 연금 문제, 갈수록 거세어지는
세대간의 갈등과 충돌 등 고령화로 인한 부작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직접적인 사안은
이런저런 질병과 그에 뒤따르는 갖가지 문제들이 아닌가 한다.
당뇨, 고혈압, 퇴행성관절염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중풍이니 치매니 해서 수년간 자리보전하면서 자신은 물론 수하들에게도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우리들 주변에는 발걸음에 차이듯 흔하게 목격된다.
이게 다 너무 오래 살아서 생겨난 현상들임에 틀림이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대변을 봐 놓고 찰흙처럼 주무르고 있거나
지는 여름날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시원하다며
머리를 들여놓고 있는 등의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르는
치매 앞에서는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효자라도 두 손 두 발 들고 말 노릇이 아닌가.
"박수칠 때 떠나라"고 하는 말이 드라마에서 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들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들어맞을 성싶다.
내 고향 마을에도 남편과 사별하고 늘그막에 중풍을 얻어 지천구럭이 된 한 여인이 있다.
으레 돌봐 주리라 믿었던 맡며느리가 매몰차게 외면해버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맏며느리에게 가했던 갖가지 몹쓸 구박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업보였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 아들자식 집으로,
내일은 저 딸네 집으로 떠돌지 않으면 아니 되는 처량한 신세로 내몰린 것이다.
그 서글프기 짝이 없는 여생이라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
그러기에 우리 손으로 어찌할 순 없다 하더라도,
될 수만 있다면 안락사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이 수하의 입장으로서는
고래 아니면 굴뚝일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그놈의 영감쟁이(혹은 할망구)그만 잘 죽었지, 잘 죽었어."
하는 말이 그들에게 최대의 욕이 되지나 않을까.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사람의 수명이 최대 150세까지 연장될수 있으리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전망이 과연 현실로 나타난다면 이렇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 재앙인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앞둔 시점에서 어느 신문사가 이 설문을 가지고
전국의 일만여 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통계자료에 의하면 정확하게 50.1:49.9의 비율로 견해가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다.
결국 뭐라고 성급하게 예단하기 어려운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마르고 닳도록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모든 목숨 가진 존재의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다.
하지만 건강수명과는 별개로 '어쨌든 오래 사는 것이 꼭 축복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고개가 가로 저어진다.
시들마른 잎이 떨어져 주어야 싱싱한 새잎이 돋아나는 법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에서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이렇게 이승에 머물다,
참상(慘喪)까지는 아닐지라도 주위 사람들이 조금은 애운하다
싶게 여길 때 애중히 붙들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았으면 싶다.
이것이 참으로 솔직한 바람이다. 목숨에 대한 판관이 조물자가 아니라면.
- 곽흥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