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하(熱河) 피서산장(避暑山莊)은, 중아(中亞)지방(地方)?
※ 열하(熱河)특별(特別)구역(區域)【2012년 11월 13일 게재(揭載)】을 보충(補充), 추가(追加)한 것임.
열하(熱河)! 하천(河川)이다. 란하(灤河)상류(上流)를 말한다.
열하(熱河)【역사통설(歷史通說)】는 : 『옛 무열수로, 그 발원처가 3 개소가 있고, 이 모두는 열하(熱河)지경에 있으며, 이 세 개의 물이 합쳐져 ‘승덕(承德)현’으로 와, 이곳의 온천(溫泉)에 물을 대기 때문에, 처음으로 “열하(熱河)”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이 물은 남쪽으로 흘러 난하(灤河)에 모인다. : 古武列水.有三源.皆在熱河境.中略.合流入於承德縣.有溫泉注之.始名熱河.南流注於灤河.』고 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 열하(熱河)지대(地帶)는 “청(淸)”나라 황제(皇帝)들의 “피서(避暑)산장(山莊)”으로 그 이름이 처음 시작(始作)된 것인데, 조선사(朝鮮史)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열하(熱河)는 황제(皇帝)의 행재소【 行 在 所 :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곧 연경(燕京)의 동북(東北) 4백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열하(熱河)지대(地帶)의 위치(位置)를,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막 북 행 정 록 (漠 北 行 程 錄) / 《 8월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월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막 북 행 정 록 서 (漠 北 行 程 錄 序) / <고전번역원의 번역본 / 인용>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 군주(君主)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 덕 주 (承 德 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곧 연경(燕京)의 동북(東北) 4백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 (熱 河 志)》를 상고해 보면, “한(漢) 시대에 요양 (要 陽)ㆍ백단 (白 檀)의 두 현(縣)으로, 어 양 군(漁 陽 郡)에 속하였고, 원위(元 魏) 때에는 밀운(密雲)ㆍ안락(安樂) 두 군(郡)의 변계(邊界)로 되었고, 당대(唐 代)에는 해족(奚 族)의 땅이 되었으며, 요(遼)는 흥 화 군(興 化 軍)이라고 하여, 중경(中京)에 소속시켰고, 금(金)은 영 삭 군(寧 朔 軍)으로 고쳐서, 북경(北京)에 소속시켰으며, 원(元)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 都 路)에 속하였다가, 명(明)에 이르러서는, 타 안 위 (朶 顔 衛)의 땅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이때까지 열하(熱河)의 연혁(沿革)이다.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의 인용문(引用文)을 보면, 그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것은,
㈀ 한(漢)나라 때의 요양(要 陽), 백단(白 檀)현의 땅으로 어 양(漁陽)군에 속했다.
㈁ 원위【元 魏=북위(北魏)】 때는 밀운(密雲). 안락(安樂) 두 군(郡)의 변계(邊界)였다.
㈂ 당대(唐 代)는 해족(奚 族)의 땅이었다.
㈃ 요(遼)때는 흥 화 군(興 化 軍)으로, 중경(中京)에 소속시켰다.
㈄ 금(金)때는 영 삭 군(寧 朔 軍)으로 고쳐서, 북경(北京)소속이었다.
㈅ 원(元)때는 상도로(上 都 路)에 속했다.
㈆ 명(明)때는 삼위(三衛)의 하나인 타 안 위 (朶 顔 衛)의 땅이었다.
● 위 각(各) 왕조(王朝)시대의 여러 설명(說明)중에서, 가장 최근(最近)의 것은, “명(明)”나라 때이다. 명(明)을 건국(建國)한, 고 황제(高皇帝)가 설치(設置)한 삼위(三衛)의 하나인, 『열하(熱河)는, 타안 위(朶顔衛)땅에 있었다.』는 설명(說明)이다. 명(明)초의 “타안 위(朶顔衛)땅을 찾는다.” 면, ㈀ - ㈅까지, 또 “열하(熱河)의 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삼위(三衛)와 열하(熱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토론(討論)해 본 것이다. 보충(補充) 및 고증(考證)본을 추가(追加)한 것이다.】원(元)나라를 멸(滅)하고, “명(明)”이란 새로운 왕조(王朝)를 출범(出帆)시킨 “고 황제(高皇帝)”가, 친히 설치(設置)했다는 “삼위(三衛)”는, “타안(朵 顏). 복 여(福 余 : 옛 부여(夫餘) 땅이라고 한다.). 태 녕(泰 寧)”의 3 개의 위(衛)를 말하는 것이다.
명사(明史) 열전(列傳) / <瓦 剌. 朵 顏(福 余. 泰 寧)>
《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中略.洪武二十二年置泰寧,朵顏,福余三衛指揮使司,中略. : 타안(朶顔). 복 여(福餘). 태 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가 설치한 삼위(三衛)이다. 그곳은 올 량 합(兀良哈)의 땅으로, 흑룡강(黑龍江)남쪽이며, 어 양(漁陽)새 북쪽이다. 한(漢)의 선비(鮮卑), 당(唐)의 토 곡 혼(吐谷渾), 송(宋)의 글란(契丹), 모두의 그 땅이다. 중략. 홍무(洪武)22년, 태 녕(泰寧), 타안(朶顔), 복 여(福餘)의 삼위(三衛)지휘(指揮)사사(使司)를 설치하였다. 중략.》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①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로 보면 : 「흑룡강(黑龍江)남쪽, 어양(漁陽)새 북쪽 땅」 이다.
② 종족(種族)으로 보면 : 본래(本來) 「올량합(兀良哈)족(族)」 들이 살던 땅이다.
③ 땅으로 보면 :『당(唐)나라 때, 토곡혼(吐谷渾) 땅이다.』 라고 하였다.
➠ 흑룡강(黑龍江)이나 어양(漁陽)이니 어양새(漁陽塞)니, 또 올량합(兀良哈)족들에 대한 현대(現代)의 역사통설(歷史通說)은, 하북성(河北省)과 그 동방(東方)의 땅에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빼도 박도 못하는” 종족(種族)에 대한 기록(記錄)은 “토곡혼(吐谷渾)”이다. 이들 “토곡혼(吐谷渾)”은 선비족(鮮卑族)으로 동호(東胡)에 속한다. 이들은 청해(靑海)호를 중심으로 남북(南北) 2천리(千里), 동서(東西) 4천리라는 방대(厖大)한 곳에서 살던 자(者)들이다.
※ 통전(通典) 서융(西戎) / 토 곡 혼(吐谷渾) 편 /《 屬 永 嘉 之 亂 , 始 度 隴 西 , 至 於 枹 罕 , 而 後 子 孫 據 有 甘 松 之 南 , 洮 水 之 西 , 南 極 於 白 蘭 , 在 益 州 西 北 。 : 영가의 난(永 嘉 之 亂)때, 롱서(隴 西)로부터 시작해, 포한(枹罕)에 이르렀으나, 그의 후손(後孫)들은 감송(甘松)의 남쪽, 조수(洮水)의 서쪽, 남쪽 끝은 백란(白蘭)인데, 익주(益州)서북이다. 其 地 四 時 常 有 冰 雪 , 唯 六 七 月 雨 雹 甚 盛 。 若 晴 ,則 風 飄 沙 礫 。 有 麥 , 無 穀 。 : 그 땅은 사철(四時)내내 항상 얼음과 눈(氷雪)이 있었다. 유일하게 6, 7월에 비와 우박(雹)이 심하였다. 날이 개면, 바람이 모래와 자갈을 말아 올린다. 보리(麥)이 있으나, 곡식은 없다. 其 青 海 , 周 迴 千 餘 里 。 海 中 有 小 山 , 每 冬 冰 合 後 , 以 良 牝 馬 置 此 山 , 至 來 冬 收 之 ,馬 有 孕 , 所 生 得 駒 , 號 曰 龍 種 。: 그곳의 청해(靑海)는 한 바퀴 둘레가 천 여리이며, 바다가운데 작은 산이 있이 있는데, 매 겨울철에 얼음이 언 후에는, 이 산은 말을 방목하는데 아주 좋은 곳이며, 다음 겨울에 이르면 거두어들이는데, 말들은 새끼를 배며, 이곳에서 태어나는 망아지는, 용종(龍種)이라 일컫는다. 吐 谷 渾 嘗 得 波 斯 草 馬 ,放 入 海 , 因 生 驄 駒 , 能 日 行 千 里 , 故 時 稱 青 海 驄 焉 。: 토 곡 혼(吐谷渾)은 파사(波 斯)의 초마(草 馬)를 획득하여, 바다에 들여보내 놓는데, 이로 인해 살아나는 청총마(驄)의 망아지는 능히 천리(千里)를 간다. 옛 적부터 칭하기를 “청해 총(靑海 驄)”이라 하였다.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특히《옛 땅은 모두 빈 곳으로, 서평 임 강 성(城)의 서쪽, 차말(且末)의 동쪽, 기련(祁連)이남, 설산(雪山)의 북쪽이며, 동서 4천리, 남북 2천리이다. : 其 故 地 皆 空, 自 西 平 臨 羌 城 以 西, 且 末 以 東, 祁 連 以 南, 雪 山 以 北, 東 西 四 千 里, 南 北 二 千 里. (중략). (註釋) - 其 地 在 今 西 平 郡 之 西, 張 掖, 酒 泉 郡 之 北. 隋 氏 置 西 海, 且 末, 河 源 等 郡. : 그곳은 지금 서평군의 서쪽, 장액(張掖), 주천(酒泉)군의 북쪽이며, 수나라 때 서해(西海), 차말(且末), 하원(河源)등의 군을 설치한 그곳이다.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차말(且末)은 타클라마칸사막(沙漠)의 동남(東南)쪽에 있으며, 그 이북(以北)과 서북(西北)지대는 유사(流沙)의 땅 (곧 타클라마칸 사막지대를 말함)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결과적(結果的)으로, 당시 올 량 합(兀良哈)은, 『서평(西平) 임 강 성(城)의 서쪽, 차말(且末)의 동쪽, 기련(祁連)이남, 설산(雪山)의 북쪽이며, 동서 4천리, 남북 2천리의 광활한 땅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 그곳은 지금 서평군의 서쪽, 장액(張掖), 주천(酒泉)군의 북쪽이며, 수나라 때 서해(西海), 차말(且末), 하원(河源)등의 군을 설치한 그곳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곳에 고 황제(高皇帝)가 삼위(三衛)를 설치(設置)했다는 것으로 판단(判斷)할 수 있다.
======================================================================================
○ 열하(熱河)특별(特別)구역(區域) / 中國古今地名大辭典 : 東與東北界奉天.南界直隷京兆.西與西北察哈爾.春秋時爲山戎地.漢初屬匈奴.武帝時爲塞境.後入於烏桓.後漢又於鮮卑.東晉時爲慕容氏所據.北魏以後入於庫莫奚契丹.遼金爲大定興中諸府境.元爲大寧上都全寧三路境.明初屬北平府.尋改屬北平行都司.永樂初入於朶顔.泰寧後爲察哈爾所倂.中略.康熙四十二年.建避暑山莊於熱河.中略.民國三年.割置熱河特別區域.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 동(東)쪽과 동북(東北)은 봉천(奉天), 남쪽 경계는 직례(直隷) 경조(京兆), 서(西)쪽과 서북(西北)쪽은 찰합이(察哈爾)이며, 춘추(春秋)때는 산융(山戎)의 땅이었으며, 한(漢)나라 초에는 흉노(匈奴)가, 무제(武帝)때에는 성채의 지경이었는데, 뒤에 오환(烏桓)이 들어왔고, 후한(後漢)시는 또 선비(鮮卑)가, 동진(東晉)때에는 또 모용(慕容)씨가 이곳에 의지하였으며, 북위(北魏)이후로는 고 막 해(庫莫奚). 글란(契丹)이 들어왔다. 요금(遼金)나라 때에는 대정, 흥 중의 여러 부(府)의 지경이었다. 원(元)때에는 ‘대 녕. 상도. 전 녕’의 3로 지경이었다. 명(明)나라 초에는 북 평(北平)부에 속했으나, 이름을 고쳐 ‘북 평 행 도 사’에 속했다. 영락(永樂)초 이곳에 타안(朶顔)이 들어왔으며, 태녕(泰寧) 후에는 찰합이(察哈爾)가 이곳을 병합하였다. (중략). 강희(康熙) 42년에, 열하(熱河)에 피서(避暑)산장(山莊)을 건립하였다. (중략). 민국(民國) 3년, 이곳을 분할하여 ‘열하(熱河)특별(特別)구역(區域)’을 두었다.
① 전한(前漢) 무제(武帝)이후(以後)에, 『이곳에【열하(熱河) 땅】오환(烏桓)이 들어왔다』고 하였으니, 오환의 정체를 살펴보자. <오환(烏桓)의 위치(位置)에 대해서 누차(屢次)에 설명하였다. 《 烏 丸 者, 東 胡 也. 漢 初, 匈 奴 冒 頓 滅 其 國, 餘 類 保 烏 丸 山, 因 以 為 號 焉. 俗 善 騎 射, 隨 水 草 放 牧, 居 無 常 處, 以 穹 廬 為 宅, 皆 東 向. 日 弋 獵 禽 獸, 食 肉 飲 酪, 以 毛 毳 為 衣. : 오환(烏桓)은, 동호【東胡 :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말】이다. 한(漢)나라 초, (흉노) 모돈(冒頓)이 그 나라(오환을 말함)를 쳐 멸하자, 나머지 무리들이 오환(烏丸)산에 의지하여 보존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오환(烏丸)”이라 칭하게 되었다.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풍속으로 하였고, 수초(水草)를 따라 (가축을)방목하였으며, 상시 거처하지 않고, 궁려(穹廬)를 집으로 하였는데, 모두 동쪽을 향했다. 화살로 금수(禽獸)를 사냥하여, 고기는 먹고, 유즙은 마시며, 옷은 (짐승의) 솜털로 만들어 입었다. 特屬累犬,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赤山在遼東西北數千里,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 : 사자(使者)가 죽은 사람의 혼령(魂靈)을 보호(保護)하여 적산(赤山)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적산(赤山)은 요동(遼東) 서북(西北) 수천(數千)리에 있는데, 중국(中國)인들이 죽은 사람의 귀신(鬼神)이 태산(泰山)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 : 땅(地)에 산(山)이 없고, 사막(沙漠)과 유수(流水)와 초목(草木)이 있고, 살모사 뱀이 많다. 정령(丁令)의 서남(西南)에 있고,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인데, 궁벽한 곳이다.》
곧 『정령(丁令)의 서남(西南)에 있고,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에 오환(烏丸)이 있다.』라 한 것은, 어떠한 경우(境遇)를 가정(假定)하더라도, 현재의 『천산산맥(天山山脈)과 알타이산맥(山脈)을 벗어 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오환(烏桓)”이 살고 있는 땅에는, 『地 無 山, 有 沙 漠, 流 水, 草 木, 多 蝮 蛇 : 땅(地)에 산(山)이 없고, 사막(沙漠)과 흐르는 물과 초목(草木)이 있고, 살모사 뱀이 많다.』는 것은, 그곳이 사막(沙漠)과 반 초원(草原)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정령(丁令)의 서남(西南),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지대』임을 기록이나 옛 지도로 보면, 현 신 강성(新疆省)지방(地方)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남북(南北)쪽 지방과 알타이산맥(山脈) 주변(周邊)을 벗어날 수 없다.』
--------------------------------------------------------------------------------------
② 사기(史記) / 조(趙)세가(世家), 《營 州 之 境 卽 東 胡, 烏 丸 之 地 : 영주(營州)의 지경(地境)에 동호(東胡)가 있는데, 오환(烏丸)의 땅이다.》라 했다. 이 말은 『영주(營州)의 경계 땅에 동호(東胡)가 있는데, 이곳은 오환(烏丸)의 땅이다』라는 말인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이르기를, 오환(烏丸)의 땅은 『沙漠之中 : 사막(沙漠)의 가운데에 있다.』라 했고,
--------------------------------------------------------------------------------------
③ 통전(通典) 북적(北狄)편을 보면 : 《오환(烏丸)의 기마(騎馬)가 흉노(匈奴)의 동쪽 변경에 있던 “고 석 왕(姑夕王)”을 공격(攻擊)하자, “고 석 왕(姑夕王)”은 무리(衆)들을 데리고, 오손(烏孫)과 강거(康居)사이에 있던 소국(小國)이었던 “오선 막”【烏 禪 幕 : <注> : 본래 “오 선 막 (烏 禪 幕)”은 오손(烏孫)과 강거(康居)사이의 소국(小國)으로, 오환(烏丸)이 침입하여 해치는 것을 몇 번 보고, 무리들을 데리고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였다. 】 으로 도주해 버렸다.》고 적고 있다.
【 인용(引用) / 통전(通典) / 북적(北狄) / 南 匈 奴 : 握 衍 朐 鞮 單 于 烏 維 單 于 耳 孫 也 , 名 屠 耆 堂 。 暴 虐 , 國 中 不 附 。 烏 桓 擊 匈 奴 東 邊 姑 夕 王, 頗 得 人 民 , 單 于 怒 。 姑 夕 王 恐 , 即 與 烏 禪 幕 本 烏 孫, 康 居 閒 小 國, 數 見 侵 暴, 率 眾 降 匈 奴. 】
이러한 “오환(烏丸)”이 『현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등지에 있었다.』는 말은 역사해설(歷史解說)로 옛 진실(眞實)을 조작(造作)한 것이며, 『오환(烏丸)은 신 강성(新疆省)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남북(南北)지대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을 벗어날 수 없다.』
위의 기록(記錄)을 보면 『오환(烏桓)이 흉노동변(匈 奴 東 邊 : 흉노 동쪽 변경)을 공격(攻擊)하여 인민(人民)들을 득하였다(포로로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흉노(匈 奴) 좌지(左 地)의 땅은 바로 강거(康居)의 동쪽 땅을 말하는 것이며』, 『흉노(匈奴)란 결국 강거(康居)들을 말하는 것이고, 오손(烏孫)의 서쪽지방에 사는 나라와 무리들을 흉노(匈奴)라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④ 북위(北魏) 이후에, 고 막 해(庫莫奚)가 열하(熱河)땅에 들어왔다.
고 막 해(庫莫奚) : 통전(通典) 변방 전(邊防傳) /《庫 莫 奚 : 其 先, 東 部 鮮 卑 宇 文 之 別 種 也. 初 為 慕 容 晃 所 破, 遺 落 者 竄 匿 松 漠 之 閒. 其 地 在 今 柳 城 郡 之 北. 即 鮮 卑 故 地 : 고 막 해(庫莫奚)의 그 선조는 동부 선비(鮮卑) 우문 씨의 별도 종류이다. 처음 모용 황(慕容 晃)이 파하자, 그 흩어진 자들이 송 막 지 간(松漠之間)에 숨어 보존한 자들이다. 【 注 : 그 땅은 유성군(柳城 郡)의 북쪽에 있다.】곧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다.
유성(柳城)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누회(累回)에 걸쳐 설명(說明)하였다. 유성(柳城)은 신강 성(新疆省)과 포창해(蒲昌海) 동쪽과 청해(靑海)사이에 있었으며, 이곳의 북쪽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이, 남쪽엔 곤륜산맥(崑崙山脈)이, 동남(東南)쪽에는 기련 산맥(祁連山脈)이 있다. 이곳은 본시 “번족(蕃族)”의 터전이다. “유성(柳城)”은 번족과 돌궐(흉노)과 선비(鮮卑)와 밀접(密接)한 관계에 있는 땅 이름이다.
--------------------------------------------------------------------------------------
○ 이라한 자(者)들을 『일만(一萬)리 동쪽으로 이동(移動)시켜, 현 하 북 성(河北省)과 그 북쪽이나 요 녕 성(遼寧省) 및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땅의 동(東)쪽과 동남(東南)쪽에 있었던, 많은 조선(朝鮮) 왕조(王朝)들은 “꼼짝없이” 반도(半島)와 그 북방(北方)일부 땅으로 한정(限定)될 수밖에 없다.』
======================================================================================
▣ 그렇다면, 『역사적(歷史的)으로, 지리적(地理的)으로, “열하특별구역(熱河特別區域)” 설치(設置)될 수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과 산서(山西)편”을 보면서, 우리 한 번 솔직(率直)하게 생각해 보자.
(1)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편 / 《咽麵亦敕勒種,居得嶷海.唐咸亨四年.弓月部北招咽麵,連兵以叛,既而復降. : 인면(咽麵) : 『인면(咽麵)』은 또한 칙 륵(勅勒)의 종류(種類)이며, 『억해(嶷海)』를 얻어 산다. 당(唐) 함형(咸亨) 4년, 궁월(弓月)부 북(北)쪽의 “인면(咽麵)”이 부르자, 연병(連兵)하여 배반하였으나, 이미 다시 항복하였다. 永淳初,西突厥阿史那車薄叛,圍弓月城,咽麵復與車薄合,安西都護王方翼擊破之於熱海.唐志:有咽麵州,寄於北庭府界內. : 영순(永淳) 초에, 서돌궐(西突闕) ‘아사나거박’이 배반하여, 궁월(弓月)성을 포위하자, 인면(咽麵)은 다시 ‘거 박(車薄)’과 함께 합쳤으나, 안서(安西)도호(都護) ‘왕방익’이 ‘열해(熱海)’에서 격파(擊破)하였다. 당지(唐志) : 인면(咽麵)주가 있는데, 북정(北庭)부 경내(境內)에 붙였다.》【 ➠ 산서(山西)편에 <신강 성(新疆省) 서부(西部)지역>까지를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산서(山西)”지방의 의미(意味)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산(山)의 서쪽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 이곳에 “열해(熱海)”라는 특이(特異)한 지명(地名)이 나오는데, ‘바다 해(海)자’가 있다고 해서, 오늘날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誤解)없기를 바랄뿐이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의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이다.
(2)《怛邏斯城在故石國東北.杜佑曰:碎葉川長千餘里,東頭有熱海,西頭有怛邏斯城. : 달라사성(怛羅斯城)은 옛 석국(石國)의 동북(東北)에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쇄엽천(碎葉川)은 길이가 천여(千餘)리인데, 동쪽의 꼭대기엔 열해(熱海)가 있고, 서쪽 꼭대기엔 달라사성(怛羅斯城)이 있다. 중략(中略). 天寶十載,高仙芝自安西討大食,大敗於怛邏斯城,是也. : 천보10년, 고선지(高仙芝)가 안서(安西)를 토벌(討伐)할 때, 대식(大食)에게, 달라사성(怛羅斯城)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곳이다. 》
※ 참고(參考) /【달라사성(怛羅斯城)은, 바로 탈라스(怛羅斯, Talas)를 말하는 것이며, 고선지(高仙芝) 장군(將軍)의 7만 군대(軍隊)【3차 원정대(遠征隊)이다.】와 서역(西域) 각국(各國)의 연합군(聯合軍)이, 탈라스(怛羅斯 : Talas)의 대평원(大平原)에서 격돌(激突)하였는데, 갈라록(葛邏祿 : Karluk)이 배후(背後)을 공격(攻擊)하는 바람에, 고선지(高仙芝)부대(部隊)는 패배(敗北), 후퇴(後退)하였는데, 이것이 유명(有名)한 “탈라스(怛羅斯)전투(戰鬪)”이다.】
※ 참고(參考) /【갈라록(葛邏祿) : 葛邏祿國在漠北,近故庭州境.唐紀:在北庭西北金山之西,亦突厥諸種也.一名哥邏祿,有三族:一謀落,亦作謀剌.二熾俟,亦作婆匐.三踏實力. : 갈라록 국(葛邏祿國)은 막북(漠北)에 있다. 예전의 정주【庭州 : 본인(本人)주(注) : 신강 성(新疆省) 적화 부(迪化府)이며, 옛 고창(高昌)이며, 한(漢)때의 거사후왕 정(車師侯王 庭)의 땅이다.】지경에 가깝다. 당기(唐紀)에 : 북정(北庭) 서북(西北)의 금산(金山)의 서(西)쪽에 있는데【본인(本人)주(注) : 금산(金山)의 서(西)쪽이라면, 현(現)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및 ‘아스타나’ 지방이다.】, 모두 돌궐(突闕)의 여러 종류(種類)이다. 일명 ‘가 라 록’이며,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모락(謀落)이며, 또한 모 랄(謀剌)이다. 둘째는 치사(熾俟)이며 또한 파복(婆匐)이다. 셋째는 답 실력(踏實力)이다.】
➠ 쇄엽천(碎葉川)은 길이가 천여(千餘)리에 이르는데, 「동(東)쪽 꼭대기에 열해(熱海)가 있고, 서(西)쪽 꼭대기엔 달라사성(怛羅斯城)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3) 그렇다면 “열해(熱海)”란 도대체 어떤 조건(條件)을 갖춘 하천(河川)이란 말일까?
《熱海在碎葉城東.雖寒不凍.唐永淳初,王方翼敗西突厥叛部於伊麗河. : 열해(熱海)는 쇄엽성(碎葉城) 동쪽에 있다. 비록 추워도 얼지 않는다. 당(唐) 영순(永淳)초에, 왕방익이 배반한 돌궐(突闕)에게 이려하(伊麗河)에서 패하였다. 既而三姓咽面與西突厥合兵拒方翼,方翼又敗之於熱海,是也. : 삼성(三姓)의 인면(咽面)과 서돌궐(西突闕)의 연합(聯合)병이 이미 왕방익 군에게 대항하니, 왕방익은 열해(熱海)에서 패하였다. 이곳이다. 杜佑曰:碎葉川長千里,東頭有熱海,西頭有怛羅城.又有雪海,亦在碎葉城北數百里,春夏常雨雪. : 두우가 이르기를 : 쇄엽천(碎葉川)은 길이가 천리(千里)인데, 동쪽 꼭대기에 열해가 있고, 서쪽 꼭대기에 달라성(怛羅城)이 있다. 또 설해(雪海)가, 또한 쇄엽성(碎葉城) 북쪽 수백(數百)리에 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상시 비와 눈이 내린다. 》
➠ 결국(結局), 쇄엽천(碎葉川)의 동쪽 상류(上流)측에 “열해(熱海)”가 있다는 말이며, 이곳은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 온화(溫和)한 곳이란 이야기다.
➠ 또한 쇄엽성(碎葉城) 북(北)쪽 수백(數百)리에 설해(雪海)가 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비와 눈이 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곳에 황제(皇帝)들이 더운 날씨를 피해 행재소(行在所)를 설치(設置), 정무(政務)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
▣ 연경(燕京) 동북(東北) 420리에 열하(熱河)가 있다. 쇄엽성(碎葉城) 북방(北方) 수백(數百)리에 설해(雪海)가 있다. 쇄엽성(碎葉城) = 연경(燕京)이다? 북방(北方) 수백(數百)리에, 설해(雪海)=열하(熱河)가 있다.
모두 함께, “연경(燕京)”에 대한, 논의(論議)가 필요(必要)하다고 본다.
2015년 04월 04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당나라때의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의 위치가 현 중국 서부(신강성)에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안동도호부(현 만주와 한반도)와 안남(베트남) 안북도호부(몽골지방)등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요...그렇다면 당나라는 현 중국대부분이요 신라는 반도땅이 되는데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애매합니다. 안서와 북정도호부는 기존주장대로 사실이고(신강성일대이고), 안동 안남 안북 및 선우도호부는 왜곡 이동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요....?
저는 당나라의 안서도호부니 북정도호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원전에서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사의 영역을 설명할 때 참고로, 또 글을 읽는 분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할 뿐입니다. 당의 안서도호부는 고구려의 5부중 서부에 속한다고 봅니다. 당나라의 도호부는 조선사를 왜곡, 조작하는 과정에서 대륙 땅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례로 운중도호는 현 산서성 북방이라고 합니다만 자치통감을 보면 당의 운중도호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포함한 그 남쪽지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 이미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청황제의 피서산장의 위치에 대하여, 반도사학(기존의 주장)에서나 대륙조선을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나, 혹은 현 북경 동쪽만을 조선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지도가 하나 있는데 어느측에서 보더라도 왜곡,혹은 잘못된 지도라 할 것입니다. (이 지도에 피서산장이라고는 되어있지 않고 피서처라 되어 있지만 같은 의미로 봅니다 ....맨 오른쪽 위)
즉 반도사관에서는 잘못된 그림이다라 할 것이고 대륙조선설에서 보면 왜곡 이동된 것이다 라 할 것입니다. 왜곡 이동된 것이라면 지금의 승덕시가 아닌 왜 하필 현 산서성일까요....현 산서성에 피서처가 있으면 누구에게 유리할까요...제 개인적 판단은 실제 피서산장의 위치가 얼추 맞다 보아집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청석령’에 있는데.....
청석, 혹은 청석령은 조선사나 연행록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 입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서로 다른 청석령이 세군데 나오는데 첫재는 압록강 건너 심양가기전의 잘 알려진 청석령 고개이고 두번째는 <중국에서는 분묘(墳墓)에 이 나무를 많이 심어서, 청석령(靑石嶺 심양과 산해관 중간에 있다) 같은 데는 숲을 이루고 있었다.(열하일기 동란섭필)>에서 보듯이 심양과 산해관 중간이라 풀이해 놓았읍니다...(.잘 못 안 것인지..?)
그리고 세번재가 <개고 따뜻하다. <환연도중록 8 17일>
새벽에 길을 떠나 청석령(靑石嶺)을 지날 제, 때마침 황제가 계주(薊州)동릉(東陵)에 거둥하게 되었으므로, 벌써 도로와 교량을 닦되 ....>에서
연암이 열하(피서산장)에서 북경(연경)으로 되 돌아 오는 중간쯤에 청석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푸른 돌이 있는 고개는 어디든지 청석령이란 이름이 붙을수도 있지만 왠지 연행록에 나오는 청석령은 같은 고개이거나 서로 인접지역이란 생각을 지울수 없읍니다.
위의 지도가 태반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피서처의 위치는 어느정도 믿고 싶읍니다.
열하지방은 "열하"라는 하천으로 인해 생긴 지명이며, 이 열하는 또 "란하"의 상류 지류중 하나입니다. 란하는 또 조선왕조의 오래된 왕조인 고죽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란하에 황락성인 고죽국의 도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죽국은 고구려의 선대국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동이왕조인 '은'황실의 왕족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감안한다면 "란하"의 위치는 요사지리지에서 말하는 남경도지방이며, 남경도 지방은 중원지방을 벗어난 서쪽 땅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곳은 진시황제의 장성의 종점이며, 산해관이 있는 곳이며, 요서지방이며, 유주지방입니다. 이곳에 열하가 있고, 란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원전과 고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세부적인 검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맑은영혼님께서 주장하시는 내용도 충분한 일리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가 상호 요구되기도 합니다. 대략적인 윤곽이 나오고, 그 다음은 세부적인 지명의 위치를 확정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봄니다. 성원! 그리고 관심!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