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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테레사 덩(鄧麗君,등려군,Teresa Teng)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양안의 관계는 훨씬 더 빨리 성숙되고 어쩌면 중국의 현대역사를 바꾸었을 수도 있다. 마치 덩샤오핑(鄧小平)이 그랬던 것처럼. 오는 5월 8일로 다가 온 사망 15주기를 맞아 추모 열기가 덩리쥔이 살아 돌아 온 것처럼 뜨겁다. 타이완에서는 기념우표 발행과 기념행사로 분주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15주기라 하여 특별한 소식이 들리지는 않으나 노래방마다 일 년 내내 그녀의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낮은 덩(鄧)샤오핑이, 밤은 덩(鄧)리쥔이 지배한다."는 말이 있었다. 어딜 보아도 조신하기만 하고 소심할 것만 같은 타이완의 한 여성 가수가 파리에서의 공연 중에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톈안먼 학생들의 생각을 지지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톈안먼 사태로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지경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발언의 주인공이 덩리쥔이었다. 중국과 타이완에서는 덩리쥔, 서구에서는 테레사 덩, 일본에서는 테레사 텐(テレサテン), 우리에게는 등려군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여가수다. 그녀의 본명은 마지막 글자가 군(君)이 아닌 '균'을 써 '鄧麗筠'이었다. 군가와 혁명가가 전부이던 1970년대 중반 무렵의 중국 대륙. 입에서 귀로 은밀하게 스며들던 덩리쥔의 노래는 그야말로 '천상의 음률' 자체였다. 낮엔 덩샤오핑을 노래하고 밤엔 덩리쥔을 노래한다는 의미로 그녀는 그렇게 대륙의 '밤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덩리쥔은 우리가 중국에 접근하는 문화적 대표 아이콘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가기 전에 가장 먼저 배우는 중국 노래는 인도네시아 민요에 중국 가사를 붙인 영화 첨밀밀의 주제가 '톈미미(甛蜜蜜)' 아니면 "웨량다이피요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이다. 덩리쥔의 이름은 몰라도 이 노래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음률 못지 않게 아름다운 가사 역시 은은한 '달빛'처럼 우리 마음을 적신다.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내게 물었죠 / 내 사랑은 진실해요 /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 말해 주네요" 이렇듯 시 같은 가사를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우리의 이미자에 비길 만큼 곱고 발성 기교가 주현미에 비할 만큼 매우 정교해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애절함과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화교 출신인 주현미는 실제 덩리쥔의 예라이샹(夜來香)을 번안해 부른 적이 있었다. 어느 아마추어가 평한 것처럼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슴 속 제일 깊은 곳에 숨겨뒀던 자신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뭔가에 닿는 묘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 와 닿는다. 그녀의 노래하는 목소리는 고우면서도 강하고 감정이 깊으면서도 강한 절제감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지금 낡아 빠진 동영상으로 남아 있는 '안녕, 내 사랑(再見我的愛人)'을 감상해도 그 세련된 무대 매너는 당시 실연 공연을 보는 그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이었을 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공연 중 왜 흘리는 지 모를 그 눈물이 어떤 사랑과의 이별인지 몰라도 너무나 애절하게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 헤어진 연인이 바로 쿵푸 엑션스타 청룽(成龍)이라고들 말한다. 11살에 첫 공식 무대에 섰고 14살에 프로 가수로 데뷔한 가수였기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그녀는 노래 말고도 중국 표준어, 광둥어, 민난어, 산둥어, 영어, 일본어, 불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학구파이기도 했다. 21세 때 일본에 데뷔. 2장째 싱글 '공항(空港)'이 크게 히트함에 따라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내 최고 스타덤에 올랐다. 그녀는 1953년 1월 29일에 타이완의 윈린(云林)현의 티엔양(田洋)이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995년 5월 8일 프랑스인 남자친구와 여행중 타이 치앙마이의 한 호텔에서 43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기관지 천식염으로 전해졌다. 세계적 스타 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무대에서는 세계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덩리쥔도 삶에서는 고달팠다. 사랑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녀가 위안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일찍 험난한 세상에 발을 들인 탓인지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오직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덩리쥔이 사망한 날 타이완 총통은 특별히 그녀의 뜻을 기리고 칭송하는 포양령(褒揚令)을 선포하고, 예술계에 그 향기가 높이 받들어진다는 뜻의 예원양분(藝苑揚芬)이라는 만장을 수여했다.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타이완과 일본, 말레이지아, 프랑스 등 세계 무대에서 노래하면서 독학으로 외국어 배우기에 바빴던 그녀가 공연 중 왜 대륙의 정치문제에 대해 발언한 걸까. 정치에 대한 이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사무친 민족애와 단절된 관계에서 오는 슬픔 때문에 복받친 설움이 그녀를 그렇게 외치게 한 것일 게다. 그 당시에도 이미 대륙에서는 누구나 그녀를 알고 덩리쥔을 노래할 때이니까 그게 너무 애틋했겠지만, 그녀는 나중에 대륙에 갈 수 있을 때에도 대륙 무대에서 공연을 하진 않았다. 어쩌면 당시만도 대륙이 노래하기에는 두려운 땅이었거나, 아니라면 가슴 안에 묻어두고 싶은 무엇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화제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 지난 2009년 중국신문판공실이 운영하는 중국망(中國網)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대륙 네티즌 2천4백만 명 중 압도적으로 무려 850만 명이 중화권을 통틀어 '조사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가수'라고 답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화권에서는 그 이전에나 이후에도 그녀를 능가할 만한 가수는 없었다고 평할 정도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도 남자들이 구애를 할 때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가 바로 '짜이지엔워더아이런(再見我的愛人)'일 정도다. 역시 2009년 한 토크쇼에 출연한 청룽(成龍)은 옛 애인이었던 덩리쥔과의 결별 이유를 털어 놔 충격을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용하고 우아한 성품의 덩리쥔은 시끌벅적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따라서 청룽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끝내 헤어졌다고 한다. 그처럼 그녀는 노래에서와 달리 번번이 사랑에서는 쓰디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몇 해 전인 2007년 10월에는 그녀의 사망 원인이 다시 이슈에 오르기도 했다. 그녀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던 한 내과의사(吳繼敏)가 "덩리쥔의 사망 원인은 기관지 문제가 아니라 위식도의 문제였다"고 새로운 가설을 주장해 현재는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인이 되었다. 위식도 역류로 인한 천식은 주로 인후두 이물감 증상이 있고 단시간에 질식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덩리쥔의 사망 원인을 새롭게 분석한 이 뉴스가 전해지자 팬들은 "어제 꿈에 덩리쥔을 만났다"거나 "아니, 그걸 몰라서 응급처치를 못해 덩리쥔을 놓쳤다니!"하면서 마치 덩리쥔이 자기 곁에 있었던 연인이었던 것처럼 아쉬워했다. 만인의 연인이었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한 남자의 여자였던 덩리쥔은 죽은 후 역시 그녀의 노래와 삶을 사랑했던 한 독지가가 대만 돈 1원을 받고 헌사한 진바오산(金寶山)의 묘지와 1원을 더 받고 기증한 대리석 묘비의 "나라를 사랑한 예술인, 덩리쥔(愛國藝人鄧麗筠)"이라는 묘비명 아래 고이 묻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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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월이 되기전에 벌써 신문에 기사가 올랐군요...등님이 흘리는 눈물은 비행기사고로 세상을떠난 연인때문일것 같은데요....
요절을 한 등려군님 생각을 하면 참 서글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