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 비유
2004년 3월 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13:47-50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구로부터 심판을 받고 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아예 자신을 점검할 그 어떤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가치성에 대해서 외부 용역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작동하고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판에 또 외부에서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인간의 고유 가치성과 자립성이 침해받기 때문에 상당히 성질 건드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창조주께서 꼭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심판 기준이라도 미리 알아내어서 그것을 준수함으로서 스스로 알아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시켜 주는 방도를 고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세월에 떠내려가는 인간입니다. 자기 딴에 잘했다고 장담해도 돌아보면, 그것은 그 당시 그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즉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노고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굽힐 줄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입니다.
즉 "과연 너희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보시기에 형편없는 인간인 줄을 알고있냐?"라고 묻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을 정죄할 고유의 행함이 자기가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남을 정죄 할 자기만의 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열심히 자기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자기 의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부하고 나섭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자기 의를 위한 시도들입니다. 군대 조직에서 하급자를 괴롭히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공동체에서 기존 주민들이 새로 이사온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두 자기 의를 따로 장만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교회에는 이 점이 더욱 노골적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가 행한 사항을 목사가 일일이 지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은 목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목사의 말에 최선을 다해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의를 따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 말을 잘 들었으니 그 순종에서 의가 나올 것이고 그 의에 대해서 하늘의 축복을 쏟아 부어달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들에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함으로써 명령하는 당사자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그 반대급부로 그 교회에서 봉급받는 생활자로서 나름대로 정당함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조직체일수록 회칙과 규칙은 강화되어서 만약에 그 규칙에 어긋나는 자는 그 집단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어 천국의 주인공은 그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단 모든 인간들을 한 그물 안에 모아들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절에 다니든 알라신을 믿든 예수님을 믿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손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것부터 인간들은 아예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가 전체 심판을 위한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무심코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도 전부 전체 심판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가 자신를 심판하는 구실마저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겨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될 환경인양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지켜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힘에 붙이네요"라고 변명을 널어놓게 됩니다. 사실은 이렇게 고백해서는 안될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 속에도 주님의 심판성을 잊지 않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역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구실이 된다는 점을 아시고 요한복음 3:16을 봐야합니다.
거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임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에 보니 당연히 심판받아야 될 세상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믿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 이미 이 세상은 벌써 저주 안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세상 관을 오늘날 인간들이 지니고 있을까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자기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의를 만들어나는 방식을 가동하기 일 수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한 점수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선택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보이시는데 주안점을 둔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즉 은혜로 선택된 자만 필히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되지 못함을 보이시는 그런 심판을 감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잘 살겠다는 자는 지옥을 가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됨을 믿는 자만 구원되는 결론으로 심판이 감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심판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한 그물 안에 거두시는 분께서 심판하실 때,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자만 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위인도 하나님에게 만족할 만한 의를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심판 안 받을 자격도 없을 뿐더러 심판 주이신 예수님의 의향에 구원해 달라고 압력을 가할 권리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이런 절대적인 권한이 전부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26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의롭다, 의롭지 않다 의 결정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내세워서 검사 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기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갖고 있는 기준으로 인해 예수님의 기준과 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의의 기준을 따로 갖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자 벌리는 생존 경쟁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의해서 누가 희생을 당했느냐 하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마저 희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살벌하고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은혜로 분에 차지 않아서 거기에다 또 자신의 선행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은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을 몇 번이고 죽일 위인들입니다. 그런 위인들이 모여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세우고 궁극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정 심판을 제대로 안다면, 이런 심성으로 십자가만 바라 봐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타인의 기준에 준해서 남에게 정죄 당하지도 말고 목사로부터도 정죄 당하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거기서 제시한 기준과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이 벌리시는 심판만을 겨냥해 간다는 점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교회/이근호 목사
첫댓글 질문)마태복음 13:47-48 비유를 풀이 좀 해주세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마 13:47-48)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천국은 그 당시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천국과 달리 소위 선택되었다고 자부하는 유다나라에 대한 심판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유대교의 천국관은 인간이 율법을 따라 수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마는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은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달리 말씀 드리자면, 유대인들의 천국관은, 인간이 능히 들어갈 만한 천국은 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들어가고 그렇지 않는 자는 못 들어간다는 천국관이고, 예수님의 천국관은, 예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선택 행위에 따라 천국이 새삼스럽게 만들어지는 천국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아예 천국에 해당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말씀 성취 (예를 들면, 이사야 6:9 같은 말씀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참조: 마태복음 13:14-16 )에 준해서 예수님이 자의로 (요 5:21) 선택해 주는 천국 백성이 생겨납니다.(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의 주제)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이루어놓으신 자신의 의를 근거로 하시는 거지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마태복음 13: 47-48을 보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즉 천국은,
① 예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지상의 인간들의 말씀 순종에 의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 ② 따라서 천국은 심판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칭 천국 사람이라는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③ 심판의 목적은 '허락된 자'와 그렇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에 의해서 빼앗긴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12절)
④ 심판의 기준은 앞으로 진행될 예수님 자신의 공생애와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점차 이 기준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부는 일단 고기를 잡아놓고 해변가에서 새삼스럽게 심판 행위 감행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기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최종 형태에서 마감됩니다. 그것은 '십자가 시건'입니다.
결론 : 천국은 오직 예수님 자신의 말씀 성취에 준한 그 공로성에 은혜로 참여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 참고로, 대표적인 잘못된 해석 - 교회는 일단 누구든지 전도하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최종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할 일은 무조건 사람들을 교회 등록 시켜놓고 볼 것이다. - 이 해석이 잘못된 이유는,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지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도' 속에는 교회가 결코 전도의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전도의 주체자라는 사실도 내용으로 필히 포함되어 있어야 마땅합니다. (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