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37년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그
유명한 포은(圃隱)이며, 고려 중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자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생모 이씨가 꿈에서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트렸는데, 이에 놀라 깨어난 뒤 바로 그를 낳았다고 하여 정몽란(鄭夢蘭)이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는데, 어깨 위에 7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벌
여져 있었다고 하며, 9살에 생모가 낮잠을 자다가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
에
놀라 급히 나가보니 배나무에 정몽란이 있었다. (위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설화임) 그래
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꿨고,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정몽주로 이름을 갈았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학문에 정진했는데, 목은은 포
은에 대해 '학문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
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을 했다.
1357년 감시(監試)에 붙었고,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과 수찬(修撰
),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
사관(從事官)으로 따라가 고려의 그늘에 있던 동북 지역(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고, 전농시승(典農寺丞)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으며,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과(太常少卿
寶文閣應敎)와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1372년 정몽주를 싫어했던 친원패거리의 의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
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명은 고려를 크게 의식해 의도적으로 많은 무례를 범하면서
양국의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가는 길도
험난해 풍랑으로 고생을 했는데, 힘들게 명나라 남경(南京)에 가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
璋)이 태도를 달리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1376년 이인임(李仁任)의 배명친원(排明親元, 명나라를 멀리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냄)을 반
대하다가 언양(彦陽,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77년 나날이 극성을 부리는 왜구(倭寇)를 처리하고자 왜열도 규슈(九州)로 건너가 규수 지
역 지방 세력에게 왜구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규슈 지방 세력은 흔쾌히 협조를 약조했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구출하여 그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귀국하자
정몽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급부상했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와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
법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를 따라 전라도 지역의 왜구를 토벌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남원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싹 쓸어버리고 상경하던
중,
전주(全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주는 그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며, 전주이씨 일족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 ☞
관련글 보기)에서 이씨 일족을 모아 거하게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대풍가(大風歌)를 크게 불렀다. 대풍가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에서 부른 시로 이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지만 정몽주만큼은 그 시의 의도를 파악
하고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와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우국시(憂國詩)를 읊으며 착잡한 마
음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장차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되는 비극을 이때 예견했을지도 모
른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
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를 찾은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
었으며, 1388년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자 이성계를 지지하며 정벌을 반대했
다.
통한스러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했고, 1389년
에는 그와 함께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까지 폐해 그들을 공민왕(恭愍王)의 후손이 아닌 신
돈(辛旽)의
후손으로 왜곡시키는 일에 동참했다. 또한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수문하시중(守門下
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
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등의 다양한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이토록 이성계와 행동을 같이하며 때로는 백로가의 뜻을 저버리고 이성계 패거리와 까마귀 짓
도
하면서 나름 나라의 개혁을 갈망했으나 이성계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자 고려를 뒤엎고 그
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의 예를 통해
군주가
별로면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고 고려란 나라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자는 것인데,
이성계 패거리는 '고려는 이제 틀렸다. 다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
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함께 해온 이성계를 제거하여 고려 사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
렸다.
드디어 1392년 3월 때가 왔다.
공양왕의 세자(世子)인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자 이성계가 그를 마중하러 황주(黃州)로 나갔다. 거기서 사냥을 벌이다가 그만 말에서 떨
어져
크게 다쳤는데,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며 대간(大諫)을 움직여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
개경에 있던 이성계 패거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잡아 가두고 조
준과 남은(南誾) 등을 귀양 보냈다.
이성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다가 벽란도(碧瀾渡)에서 하룻밤 쉬려고 했는데, 아들인 이
방원이 급히 찾아와 정몽주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알리며 서둘러 상경하자고 했다. 정몽주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 이성계는 무슨 소리냐며 잔소리를 했으나 이방원이 계속 권하는 것이
심
상치가 않아 가마를 타고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정몽주의 대사는 그르치게 된다. 이때
그는 3일이나 밥을 먹지 않으며 기회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방원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이성계에게 제의했다. 이에 가족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데,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
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외치며 정몽주 제거를
모의
했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정몽주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가 상황을 살폈다. 허나 이성계는 평소와 비슷하게 그를
대해주면서 정몽주는 지금 당장은 일을 벌이지 않겠지 싶은 방심을 하고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에게 술 1잔을 권했다. 포은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정
도전과 핵심 패거리만 염두에 두었지 이방원은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저 어린 것이 나
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어느 정도 술을 주고 받자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하여가(何如歌)를 선보이며, 그를
시험했다. 허나 시험 결과는 역시나였다.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을 하며 하여가를 무색케 만
든 것이다. 즉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필요하면 죽음으로써 역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방원과 작별한 포은은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귀가를 했다. 곧 다가올 저승사자를 눈치채지 못
했던 것이다. 정몽주 제거를 결심한 이방원은 서둘러 수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귀가하던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때 포은이 흘린 피가 마르지 않고 다리
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실상은 붉은색을 띠는 돌이지 그의 피가 아니다. (정몽주 띄워주기의
일환으로 윤색된 것임)
정몽주가 잔혹하게 살해되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이방원을 꾸짖자 그는 정몽주가 우리를 공
격하는데 어찌 가만 있겠냐며 항변을 했다. 이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성계는 왕을 찾
아가 정몽주가
모함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를 추종한 이들을 잡아 족치며 정몽주의 목을 개경
십자거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성계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공양왕을 끌어내려 고려
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열었다.
정몽주는 시문에 뛰어나 단심가와 많은 한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글씨
와
작품들은 후손들이 정리하여 1439년에 간행된 포은집(圃隱集)에 담겨져 있다. 또한 지혜와
용기가 대단했고, 충효와 지조가 대단했으며, 학문을 좋아해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에서 들어
온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보급하여 동방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노력으로 이때
부터 집에서 가묘(家廟) 등을 세워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의창(義倉)을
세우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의
편리를 도모했다.
고려를 지키고자 나름 충신의 매운 얼을 드높였던 포은은 이성계 패거리에게 패해 역적이 되
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아들은 죄다 귀양 신세가 되었다. 그의 무덤
역시 개경
인근 풍덕군(豊德郡)에 대충 썼다.
1400년 조선의 3대 군주가 된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동안 뜨거운 맛으로 일관했던 정몽주 일
가에 대한 태조를 180도 달리하며, 후손을 달래주고 정몽주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
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지만 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드높인 것이다.
그래서 1401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고, 이어서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으로 추봉했으며,
후손의 소망에 따라 묘를 옮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또한 중종(中宗) 때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에 배향되면서 대대손손 두둑한
제삿밥을 받으며 영원히 추앙을 받게 된다.
그들 야망에 도움이 안되어 때려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진정한 충신이자 성리학
의 시조라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태종의 이중적인 행태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태종
의 입장에서도 솔직히 정몽주 스타일 즉 군주에 대한 일편단심 충신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
이 오래간다는 보장도 없고,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를 지
키고
망국(亡國)의 초라함을 달래달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고려는 비록 망했지만
정몽주와
그를
포함한 3은(三隱)과 최영 등 많은 충신이 있기에 그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권(臣權)과 개혁을 강조하며, 자신을 한때 괴롭게 했던 정도전보다는 이미 없어진 정
몽주가 훨씬
이용하기가 좋았다. 그러니 죽은 정몽주를 이용해 그들 입맛에 맞게 요리한 것이
다.
풍덕군에 있던 정몽주묘는 1406년 후손들의 뜻으로 그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운
구를
끌고 내려갔는데, 인근 수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명정(銘旌, 죽은 이의 품계, 관직
, 성씨를 기록한 기)이 갑자기 바람에 날라간 것이다. 명정을 쫓아가니 지금의 정몽주묘 자리
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연한 일도 아닌 것 같고, 그곳 자리도 좋아 보여 굳이
영천까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한다.
이후 정몽주의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후손들이 모두 그의 곁에 묻히면서
이곳은 정몽주 일가
의
묘역이 되었고, 1517년 중종이 정몽주묘 주변 능골 일대를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이곳에 완
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
작렬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의 핍박에 맞서며 정몽주 묘역을 둘러보고 충렬서원으로 길을 옮
겼다. 묘역으로 갈 때는 포은교를 건너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선죽교란 다리를 통해 오포로로
나왔다. 선죽교는 포은교 서쪽 90m 지점에 있는 다리로 능원초교(정몽주선생묘역입구) 정류장
바로 뒷쪽이다.
선죽교라고 해서 개성에 있는 그곳을 옮기거나 본을 따서 만든 것은 아니며, 그냥 흔한 하천
다리로 정몽주 묘역 입구라서 그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의미 부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죽교 북단에는 검은 주근깨가 자욱한 늙은 하마비가 서 있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
마비란 하마 서식지가 아니라 대소인원(大小人員) 모두 이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추상
같은 뜻이다. 보통 궁궐, 관아, 향교, 서원, 왕릉. 사당, 고위 관료의 묘역 입구에 세우는데,
정몽주 묘역도 그에 해당되어 하마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곳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의 중간
지점이라 이곳에 비석을 세운 모양인데, 여기서 묘와 서원이 제법 거리가 되어(묘는 도보 15
분
거리)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있다.
말을 타고 오가는 이들을 귀찮게 했던 하마비, 허나 이제는 하마비의 눈치를 보며 말이나 차
량에서 내릴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의 권위도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이제는 지
나가는 이들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나도 그의 존재를 여기서
처음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