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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 밴드에서 부산에 있는 사찰의 스님과 옷깃을 스쳤다. 불교 범망경의 인연인가? 그 스님이 내게 보낸 댓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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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님
#지금무슨책을읽고계십니까
#질의응답
우연히 큰 기대없이
읽게된 책이지만 평소
제가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는 좋은 내용입니다
함께 읽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을 버리고 내일만
사는 별종, 사피엔스'
'미래중독자'
'다니엘 S. 밀로' 지음
'추수밭'
질문
'사실 뇌(150억개 뉴런)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원한다.' 😊
그런 뇌는 줘 맞아야함
답변
사실상 매일 줘 맞고
살고 있습니다(두카)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일체개고'라고 하신
겁니다
미래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고 사는 생명체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는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두려움과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하는 희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불만족한
상태이거나
막상 원하는 바를
얻고서도 성취감보다는
공허함에 시달리게 되고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우울증 등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산 동래구 금정마을
무량사 법천 합장
시간여행자이시니
꼭 읽어보셔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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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밭/정재현
연세大 연합신학대학 종교철학 교수의 글로, '삶이라는 물음의 끝에서 마주한 천 년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어 최근에 나온 책이다. 성경을 비롯한 고전과 명저 혹은 명언이나 속담을 소재 삼아 '종교철학적' 사유를 마음껏 풀어낸다. 종교에 대한 깊은 교리나 이론 따위를 설명할 것 같은 예감이었지만,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문장은 흘러간다. 종교 근본주의의 폐단부터 시작해 현재의 종교가 얼마나 병들었으며, 잘못된 '믿음'에 의해 얼마나 천박해졌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주를 이룬다. 엄중한 말의 채찍이 기독교의 종아리를 향하고, 둔탁한 죽비는 불교의 등을 향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신뢰하되 진리를 붙잡았다고 하는 자는 의심하라." - 앙드레 지드
1장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주제 파악'의 장이고, 2장은 우리가 한계에 부딪히고 넘어서려는 이유를, 3장은 정답 없는 삶을 내다보는 역설의 통찰을, 마지막 4장은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다.
각 장에는 25개씩의 소제목 하의 명언이 나온다. 결코 쉽지 않은 사고의 실행과 행동의 변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여 지치고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발걸음을 옮겨야만 한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이끌면서 살아가도록 말이다.
이제부터 주요 소제목 하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진리에 다가서 보자.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이 세계를 주무를 수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함은 싫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나 계속 성장하는 이는 그런 익숙함을 이길 수 있다. 천문학, 생물학,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교만과 착각을 깨부수는 정신사적 혁명을 이루었다. 인간은 '파편'에 불과하고(폴 틸리히), '죄인의 괴수'(바울)와 같다. 인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무지인 동시에 폭력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물론 '우연'이라는 요소도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삶은 충동과 욕구가 이끄는 '불순한 삶'이라고 인정해야 자기파괴를 막을 수 있다.
'값싼 은총'과 '헤픈 자비'가 사람들을 미끄러지게 하는데, 종교를 갉아먹는 가장 큰 폐해다. 사실 그런 종교는 종교가 아닌 그냥 '거짓 장사'에 불과하다. '미움'보다 '무관심'이 더욱 나쁠 수 있다. 미움은 애정이 과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무관심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존재를 의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왜'라는 질문을 통과하면서 얻은 삶의 깊이는 무수한 '어떻게'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든다. 인생의 '꼴'을 보면서 나 지신의 진면목 혹은 실체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그런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종교성의 영역으로 넘어가 본다.
유한성의 의식과 초월지향성은 인간에게 종교를 갖게 한다. '위약효과(placebo)'는 종교에서도 발휘되는데, 믿고 먹으면 효과가 발휘된다고 선전한다. 그런데, 그 약 자체에 대한 질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믿음이 없거나 약한 탓이라고 비난 당한다. '자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실현하기 힘든 가치다. 숙명과 무작위, 불안과 절망, 강박과 방종 사이쯤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고 종교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창조물에 포로가 되었다. 신은 절대적인 차원이 있지만 인간의 신앙은 그렇지 못하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종교적 율법교사로 각색하여 맹종과 희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종교를 작동시킨다. 맹종과 희생을 바치면 잠시라도 '평안'은 얻을 수 있다.
온갖 인간의 욕망을 풀어놓는 기도는 '자기도취'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자기도취는 쾌감까지 얻게 하고 기도에 힘이 있다고도 믿게 한다. 믿음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에 의심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다름없다. 하느님을 자기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더불어 그렇게 행동하는 자체가 우상일 뿐이다. 평안과 안식을 얻기 위해 선택한 '독실한 신앙'으로는 종교 근본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참된 종교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고통과 희생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진리의 이름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도 속이는 종교는 진리는커녕 약간의 자유조차도 실현하지 못한다.
지식은 채워가는 것이라면 지혜는 비워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졌'기에 생명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신념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 '최선'이란 말로 우리는 쉽게 폭력을 저지른다. 뻔해 보이는 것은 앎이지만 그것에서 새로움을 보는 것은 삶이다. 삶을 저주하고 의미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때에 오히려 의미가 삶으로 밀고 올라온다. 산문이 내가 밖으로 내는 소리라면, 시(詩)는 내게 들려오는 소리를 적은 것이다. '삶'과 '사람'은 모두 동사에서 나온 파생적 명사로, '살다'에서 나왔다. 희망과 목표 달성을 이유로 오늘을 미룬다면 결국은 신기루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 몸속에서의 '밥'과 '똥'의 경계는 불분명한데, 그런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산다.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부림은 '기도'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형식주의로 빠진 제의, 미적 직관의 충만함을 은총으로 새기니 자아도취는 극에 달한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의 향연을 보는 듯한 예배 형식에 사람들은 취한다. 그런 종교에서 기도는 자신의 삶에만 집중할 뿐이고, 신과의 거래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주술에 가까운 '투자'일 뿐인 기도,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리가 없다. 삶 자체가 혹은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종교는 도덕과 함께 맹종의 믿음을 요구하며 사람들을 억압한다. 인류 역사상의 수많은 살생과 분열의 원인이 종교였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도는 효과적으로 주고받는 상행위가 아니다. 기도는 그런 면에서 무용한 시간이어야 한다. 신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아니다. 신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수난에 동참한다. 신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런 신의 행위에 동참하라.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의 행위에 인간은 못 견뎌한다. 침묵 역시 하나의 말이거나 혹은 말보다 더 큰 행위일 수 있기에 그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참아내야 한다. 십자가의 수난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개념도 있겠지만, 신이 피조물과 더불어 그 고통에 함께 하신다는 사건이었다. '욕망충족체계로서의 종교'를 지양하고 수양과 수행이라는 과정에 동참하자. 우리는 '줄(啐)'하면서 신의 '탁(啄)'을 기다리자.
100가지 이야기의 소재는 성경, 리그베다, 도덕경, 논자, 바가바드 기타 같은 '고전 및 경전'과 고민하는 힘(강상중), 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니체) 같은 '현대 인문학', 노을(기형도), 빈방(박완서), 침묵(엔도 슈사쿠) 등의 '문학 및 에세이'에서 발췌했고, 몇 개의 속담이 포함되었다. 이 책은 종교 이야기이고, 종교에 대한 처절한 성찰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모태신앙인으로서, 대부분의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한국 교회들(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겠지만)은 잘못된 신앙관을 교인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샤머니즘과 결합된, 주술의 행위를 믿음의 증거라고 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묻지마 믿음'만 외치는 개신교(천주교는 잘 모르겠지만)의 모습이 부끄럽다.
미래중독자/다니엘 S. 말로(이스라엘)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느 날 문득 '내일'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서 '오늘'만 살아가는 동물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사피엔스를 오늘의 인간으로 만든 힘은 뇌의 비약적인 성장, 엄지손가락, 불의 발견이나 언어도 아닌 "내일 보자"라는 인사였다는 것이다.
이 대담한 주장은 "왜 5만 8000년 전 인류는 갑자기 아프리카를 떠났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인류가 언제 아프리카를 떠났으며 어떻게 전 세계로 흩어졌는지에 대해 규명해왔다. 그러나 '왜 인류가 굳이 괜찮은 환경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어떤 종이 거주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상황과 맞닥뜨렸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주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각오하는 특수한 행위다. 그런데 지구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오직 인간 일부만이 소말리아 반도라는 비옥한 환경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극까지 지구 전역으로 퍼졌다. 물론 기후 조건이나 자원의 부족, 또는 다른 종과의 경쟁이나 내부적인 갈등 등 어떠한 생태학적 이유를 추정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여느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징을 찾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느 날 문득 '내일'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아"라는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오늘을 사는 낙원인 아프리카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만이 지구상의 동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이미 존재하는 현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심지어 "내일 저곳은 오늘 이곳보다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오늘까지 일궈낸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험을 감수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이 '내일'에 집착한 나머지 돌아온 반대급부도 있다. 어쩌면 이게 더 핵심이다. 인류는 내일이라는 상상을 발명한 이후 삶에서 항상 불확실한 미래를 염두에 두느라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또 상상된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에서 축적과 잉여가 탄생했고, 이윽고 호모 사피엔스는 '과잉'의 소용돌이라는 현세의 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과잉으로 치닫는 현대사회의 모습은 어쩌면 이미 수만 년 전부터 예정되었던 셈이다. 결국, 인류에게 내일이라는 발명품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이자 저주였던 것이다. 책은 미래에 중독된 인류에게 어떤 내일이 기다릴지에 대한 중대한 화두를 던진다.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 물론 모두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미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미래에 발생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 중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한다. 동물은 오로지 현재에 집중한다. 인간은 미래에 집중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과거에 했던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이 책 는 미래에 집중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사피엔스/유발 노라 하라리(이스라엘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우리는 아프리카 동쪽 지역에서 발생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종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일한 인류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동시대에 유럽과 서아시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번성했고 동아시아에는 호모 에렉투스라는 종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교접도 했다. 현재 인류의 DNA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이런 다른 인종의 DNA가 약간씩 섞여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부터 북상하며 다른 종들을 몰아냈다. 약 1만2000년 전에 지구의 유일한 인류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지식의 나무
사피엔스의 지구 정복은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덕분이다. DNA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사피엔스는 ‘픽션’, 즉 실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믿게 되는 성향을 갖게 됐다. 픽션을 믿게 되면서부터 대규모의 그룹으로 일하고 싸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른 인류나 동물의 경우 최대 100~150명의 그룹을 형성하는 게 고작이지만* 픽션을 믿는 사피엔스는 수천, 수만, 혹은 수억 명이 동질감을 느끼는 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 종교, 국가, 기업이 대표적인 픽션이다. 예를 들어 푸조라는 자동차 회사는 프랑스의 법률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픽션이다. 푸조의 전 직원이 사고로 사망하고 모든 공장이 문을 닫는다 해도 프랑스 사람들이 푸조라는 픽션을 계속 믿어주는 한 새로운 직원을 뽑고 새로운 공장을 만들어 회사는 금세 다시 일어설 수 있다.
(*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이름을 따서 ‘던바의 수(Dunbar Number)’로 불린다. 한 사람이 정기적으로 만나서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사람의 수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때문에 150명 정도에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사피엔스는 떠돌아다니며 수렵, 채집을 하며 먹고 살았다. 동물과 식물, 버섯류를 골고루 섭취했으며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해도 충분했다. 수렵채집 시대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이후 농업시대의 유골들보다 키도 크고 영양상태도 좋다. 농사를 짓지 않으니 흉작 걱정도 없고, 음식이 떨어지면 이동했다. 가축을 키우지 않으니 전염병도 없었다. 다만 부족의 이동에 방해가 되는 어린이와 노약자에게는 무자비했다. 건강한 동안에는 비교적 행복한 삶을 즐겼다고 볼 수 있다.
4. 대홍수
사피엔스는 발을 내미는 곳마다 환경 대재앙을 불러왔다. 근현대뿐 아니라 원시시대에도 그랬다. 호주 대륙에는 과거 24종의 대형 동물이 살았지만 약 4만5000년 전 사피엔스가 도착해 캥거루 빼고 다 죽었다. 북미와 남미대륙 역시 사피엔스가 건너간 지 2000여년 만에 대형 포유류 47종 가운데 34종이 사라졌다. 800여 년 전에는 마오리족이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뉴질랜드에 도착해 토종 대형 동식물들을 대부분 멸종시켰다. 이제 지구엔 오직 사피엔스와 사피엔스가 키우는 가축들만이 번성하고 있다.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약 1만2000년 전 농업혁명이 시작됐다. 수렵채집을 그만두고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며 살게 됐다. 당장은 안정적인 식량원을 확보한 것 같았지만 생활수준은 오히려 나빠졌다. 노동시간은 길어지고, 흉작에 취약해졌고, 가축으로부터 전염병도 옮았다. 땅의 소유권과 잉여생산물을 놓고 벌어지는 폭력도 늘었다. 잉여 식량은 농부 본인의 생활환경을 개선시키는 데 사용되지 않고 엉뚱하게도 인구의 증가와 유한계급(有閑階級)의 출현을 가져왔다. 즉, 농업혁명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번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전반적으로 악화됐다. 어떻게 보면 사피엔스가 쌀과 밀을 정복한 게 아니라 쌀과 밀이 사피엔스를 이용해 지구를 정복했다고 볼 수 있다.
6. 피라미드 건설하기
농사 때문에 한곳에 모여 사는 인간 집단의 규모가 커지자 이들이 믿는 픽션의 스케일도 커졌다. 과거엔 수백 명 단위로 부족의 신이나 부족장을 섬겼다면 이젠 수만, 수백만 명이 따를 수 있는 종교와 국가지도자와 이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푸조라는 회사, 프랑스라는 국가, 천부인권이라는 사상, 유로화라는 화폐 등이 모두 이렇게 사피엔스의 집단 환상에 의해 ‘창작된 제도(imagined order)’다. 이제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런 가상의 제도에서 탈출할 수도 없다. 만일 푸조의 CEO가 어느 날부터 푸조라는 픽션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다. 그의 말이 옳다 해도.
7. 메모리 과부하
인간은 기억력의 한계를 넘기 위해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꾸로 글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인간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상상과 연상에서 점차 멀어졌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이제는 글이나 숫자로 표현하기 쉬운 방식으로만 생각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가장 극단적인 예다. 인간이 프로그래밍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에 맞게 인간 사고가 바뀌고 있다.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인종 차별, 남녀 불평등, 빈부격차 등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흑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차별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고, 그래서 그의 자식도 차별을 받는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다. 또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유를 신체적 우위나 공격성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남성들 가운데서도 힘을 잘 쓰고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낮다. 이처럼 역사엔 별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믿지 말라.
제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농업혁명 이후 인간 집단이 믿는 신화와 픽션들은 좀 더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파고들며 이른바 ‘문화’가 됐다. 지구 전체적으로 볼 때 문화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거대한 ‘메가문화’들이 번성하고 있다. 화폐, 제국주의, 종교가 그것이다. 특히 화폐의 힘이 가장 강하다. 미국 문화를 증오하던 빈 라덴도 미국의 화폐인 달러만큼은 매우 좋아했다.
10. 돈의 향기
화폐, 돈은 교역과 부의 저장을 편리하게 해준다. 낯선 사람들끼리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내미는 돈은 신뢰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돈을 신뢰할수록 그 돈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신뢰가 돈을 만들고 돈이 신뢰를 만든다. 물론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의 경계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기도 한다.
11. 제국의 비전
대부분의 세계인은 제국인이다. 중국의 한(漢)족 대부분은 사실 몇 백 년 전에는 소수민족이었다. 한족에 차차 점령당하고 완전히 동화돼서 이젠 스스로를 한족이라 부른다. 과거 로마제국도 그렇게 주변 민족을 로마인으로 동화시키며 확장했다. 근대 제국주의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비록 독립했을지언정 유럽식 사회제도와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구 전체가 제도와 사상을 공유하는 단일 글로벌 제국이 되고 있다.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글로벌 엘리트들과 사업가, 학자, 엔지니어들은 서로 뭉친다.
12. 종교의 법칙
인류 역사엔 유일신교나 다신교처럼 신을 믿는 종교도 있고 불교나 도교처럼 사람의 수양을 중시하는 종교도 있다. 이들의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한편 현대에는 사람을 숭배하는 종교, 즉 인본주의가 새로운 종교로 떠올랐다. 인본주의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자유적 인본주의는 개인의 인권을 숭배한다. 둘째,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인류의 공존을 중시한다. 마지막, 진화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더 우수한 종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화적 인본주의의 대표주자는 히틀러였다.
13. 성공의 비결
왜 어떤 국가와 어떤 종교는 번성하고 다른 것들은 소멸하는가. 이런 질문에 정답은 없다. 기독교가 번성한 건 우연일 수도 있고, 과학 혁명이 서구에서 시작된 것도 우연일 수 있다. 역사는 반드시 인류의 이익을 위해 발전하는 것만도 아니다.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지난 500년간 인류의 모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결국 지구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까지 갖게 됐다. 과학혁명 덕분이다. 예전에는 인간이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갈구하지 않았다. 현재에 만족하며 살았다. 500여 년 전부터 이런 태도가 달라졌다. 인류 스스로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더 많은 것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과거의 지식인은 플라톤이나 공자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현대의 지식인은 아인슈타인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 자신의, 그리고 인류 전체의 무지(無智)를 인정한 것이 과학혁명의 시작이다.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서양의 과학정신과 제국주의는 함께 발전했다. 둘 다 지식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채우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다. 15세기 이전의 세계지도를 보면 유럽인들이 모르는 곳도 상상해서 종이를 꽉 채우게 그려놓았지만 16세기 이후의 지도를 보면 자신들이 확실하게 아는 지역만 그려놓고 나머지는 공백으로 놓아둔다. 나중에 그 공백 지역을 탐험해서 정복하겠다는 의지다. 이런 정복욕이 학문에도 발휘되면서 과학혁명이 시작됐고 유럽이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6. 자본주의 교리
유럽의 제국주의와 과학혁명은 자본주의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유럽의 세계 진출과 식민지 운영은 국가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같은 기업 차원에서 시작했다. 국가와 기업이 손을 잡고 아편전쟁 같은 일도 벌였다. 이런 자본주의의 핵심은 신용(credit)과 대출이다. 은행은 들어온 예금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고, 사업가는 대출받은 돈으로 사업을 일으켜 돈을 갚고 사업을 더 확장한다. 이런 선순환이 생기려면 새 사업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즉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대출도, 신용도, 자본주의도 무너진다.
17. 산업의 바퀴
과학 덕분에 인류는 에너지와 자원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게 됐다. 그래서 기업과 국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으로 더 많이 구매하고 소비하도록 재촉한다. 과거에는 부유한 지배계층이 대부분의 소비를 했고, 피지배계층은 돈을 아끼며 살았다. 현대의 소비자주의(consumerism)는 이와는 정반대다. 지배계층은 주로 투자를 하고, 피지배계층이 주로 소비한다.
18. 끝없는 혁명
산업혁명과 함께 수많은 혁명이 이어졌다. 철도가 발명되고 철도시간표를 짜게 되자 인류는 시계를 통일하고 서로 시간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과 지역사회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국가와 시장의 힘이 커졌다. 소비자들은 소비활동에 따른 연대감을 느낀다. 동시에 지구상에는 폭력이 줄고 평화가 늘어났다. 20세기는 인구 대비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문명의 발전과는 별개로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에는 별 발전이 없다. 진흙집에 살든, 펜트하우스에 살든 사람이 느끼는 행복의 양은 세로토닌 등 두뇌의 호르몬 분비에 달려 있다. 이런 호르몬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 나오는데, 그 사회적 의미라는 것 자체가 환상인 경우가 많다. 인간의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것은 바로 불교다. 서양에서는 불교 사상의 핵심을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내적인 행복을 추구하라’로 잘못 이해해왔다. 불교의 진짜 가르침은 ‘내적인 감정 상태(=호르몬)에도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지금까지의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고 자연의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 스스로 인간을 설계할 수 있는 생명공학의 시대가 열렸다. 7만 년 전의 인지혁명처럼 인간 뇌의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지능이나 다른 기능이 크게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사피엔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듯 사피엔스는 새로운 슈퍼 휴먼의 세계를 미리 짐작해볼 수도 없다. 무엇이 됐든 그 존재는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사상, 종교, 성별과 같은 구분과 무관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새 인류의 출현과 함께 사피엔스의 종말은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