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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海月 崔時亨(1827~1898)】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본관:경주, 출생:1827년(순조 27) 사망:1898년 6월 2일경,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생애와 활동사항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포항시 흥해읍 마북리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다.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 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
1861년 11월 최제우가 호남 쪽으로 피신한 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몸에 익히기 위해 보인 정성과 노력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이 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이처럼 교세의 재건이 이루어지다가 1871년(고종 8) 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李弼濟)가 최제우의 기일(忌日)인 3월 10일에 영해부(寧海府)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관헌의 추격을 피해 소백산으로 피신하면서 영월·인제·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구축하여 1878년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집회를 만들었다.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치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충청도·전라도관찰사에게 청원했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靑山)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向我設位)·삼경설(三敬說)·이심치심설(以心治心說)·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양천주설(養天主說)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897년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신관은 범신론적·내재적 경향을 띠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나아가 만물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以天食天)’으로 파악된다. 이런 신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삼경사상(三敬思想)이 도출되는데, 이는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사상이다. 또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잘 길러나가는 것[養天主]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라는 입장도 같은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문헌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도원기서(道源記書)』(강시원, 1879 ; 윤석산 역주, 문덕사, 1991), 『천도교창건사』(이돈화,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동학사』(오지영, 영창서관, 1940), 『해월신사의 생애와 사상』(김용천 편, 천도교중앙총부, 1969), 『동학의 사상과 운동』(최동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이이화 선생은 인물 한국사에서는 최시형을 최보따리 라고 했는 데 잠행을 하면서 보따리를 자주 쌌는데 여기서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해월선생’이라 부르기보다 어딘지 측은하게 느껴지는 이 별칭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았다.
1894년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에 동학교도들과 함께 참여했다. 1898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한다. 최시형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고생을 하였으며, 종이 만드는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였다. 1861년(철종 12년) 조지소를 찾아 온 먼 일족인 최제우와 세상과 철학 담론 등을 나누었으며,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최시형.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뒤에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을 거쳐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 등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원군에 의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 뒤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그와 연결을 계속 하였다.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은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고종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고종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였다. 그와 함께 교조의 신원과 부패 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 어윤중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엄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그러한 폭력 사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나중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북접(北接) 산학 동학도를 궐기시켜, 청산(靑山)에 집결했다가 회덕(懷德)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으나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우선 해산시켰다.
그러나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여 요구 조건의 이해를 수락 받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던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음력 9월 다시 기포(起包)하자 그도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였으며,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논산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하였다.이에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워 참패하고,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교수형 되었다.
죽은 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최시형의 후계 동학 교주로는 의암 손병희가 이어받아 3대 교주가 되었으며 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게 된다. 최시형은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선교와 정치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1871년 충청북도의 동학 접주 중의 한사람인 이필제가 교조의 신원을 명분으로 봉기하려 하자 최시형은 이를 반대하며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결국 이필제의 봉기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은 남접의 다른 지도자였던 전봉준의 기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 에 가담했다. 부친 최종수(1804~1841) 아내: 안동 김씨(? ~ 1887. 2. 24.) 아들: 최덕기(德基 솔봉) 딸: 최윤(潤) 아내: 밀양 손씨 (? ~ 1889.10.11.) 아내: 손시화(孫時嬅) - (의암 손병희의 누이동생)
아들: 최동희 아들: 최동호 손자 최익환(1913 3.19 ~ 1999 6.14) 손자 최진환 손녀 최문환 증손녀 최인혜
해월신사 최시형 묘
조선시대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천대한 것과 달리 며느리를 한울로 높임하였던 일화로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그는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를 이어 제2교조였다. 그가 수운이 있는데 교조가 된 이유는 수운이 혹세무민(惑世誣民 :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고 어지럽힘)을 들어 비명에 가고 그의 사상이 담긴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필사본을 보존하여 정리 간행하였고, 인내천 사상에 더해 모든 사물이 한울이라는 사상적 확대와 그를 통한 동학 교세의 확장이 제2교조라는 지위를 갖게 하였다.
더욱이 그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통해 수운의 신원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한편, 많은 동학교도가 결집하였다. 특히 보은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가 주창되며, 동학이 가지는 사회변혁인 후천개벽(後天開闢 :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백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림)이 민족운동으로까지 확장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동학이 그의 처남이자 제자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가 3대 교주가 되어 천도교로 개창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을 전국적이고 전민족적 운동으로 촉발시킨 중심된 저력에 천도교가 있었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들어가는 기금을 중앙대교당 건립비용 모금으로 충당하였듯 우리 민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내었다.
1894년 남접의 녹두장군 전봉준 등 수많은 농민이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일제의 경복궁 침탈인 갑오왜란으로 다시금 봉기하는데 이때 해월 최시형은 남접과 더불어 북접도 합세하게 하여 이를 손병희에게 이끌게 하였다. 결국 이 일로 해월은 1898년 5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고등재판소에서 근대적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가 이루어지고 72세의 나이로 좌포청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당시 재판은 고부학정의 원흉 조병갑이 판사로 참여하였고 그의 사촌 조병직이 재판장(법부대신)으로 최종 사형(교형)을 선고(음5.29)하였다.
판결 선고서(判決宣告書)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평민. 피고 최시형(崔時亨). 나이 72세.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평민. 피고 황만기(黃萬己). 나이 29세.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평민. 피고 박윤대(朴允大). 나이 53세.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평민. 피고 송일회(宋一會). 나이 33세.
위의 피고 최시형,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의 사건을 검사(檢事)의 공소에 따라 이것을 심리하였다.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 상인인 박춘만(朴春萬)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동학(東學)을 전수 받아 선도(善道)로 병을 치료하고 주문(呪文)으로 신(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며 여러 군(郡)과 도(道)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字)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 강신문(降神文) 및 동학원문(東學原文)의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도(符圖)로 인민(人民)을 선동하고 무리를 규합하였다. 또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 만 년 묵은 가지 위에 꽃이 피어 천 떨기요)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 사해의 구름 가운데 달 솟으니 한 개의 거울일세)”이라는 시구를 사모하고, 법형법제(法兄法弟)의 실심(實心)과 경신(敬信)을 따라 법헌(法軒)의 호를 부르며 해월(海月)의 인장(印章)을 새겨 교장(敎長), 교수(敎授), 집강(執綱), 도집(都執),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頭目)을 각 지방에 임명하였다. 또한 포(包)와 장(帳, 회소)을 설치하여 무리를 모았는데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법에 따라 죽은 최제우를 신원(伸寃)한다고 하여 지난 계사년(癸巳年, 1893년)에 신도 몇천 명으로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올렸다가 바로 해산을 하였고, 보은(報恩)의 장내(帳內)에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 순무사(巡撫使)의 선유(宣諭) 때문에 각자 해산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徒黨)인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이 고부(古阜) 지방에서 같은 패를 불러 모아 기세를 타고 일어나서 관리를 해치며 성(城)과 진(鎭)을 함락시켜 양호(兩湖)의 땅이 썩어 문드러져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피고가 이때 호응하여 지휘한 게 없다고 하지만 난리의 단계와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피고가 주문(呪文)과 부적(符籍)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데서 연유하였다.
피고 황만기(黃萬己)는 지난 갑오년(甲午年) 5월에 동도(東徒) 임학선(林學善)의 협박을 받아 입도(入道)하여 바로 귀화하였다가 지난해 7월에 다시 임학선의 말을 듣고 도(道)를 섬기는 처지에 대종선생(大宗先生, 교조를 의미), 최시형을 의리상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여 도망 중인 최시형을 방문하고 생선을 보내주었다.
피고 송일회(宋一會)는 갑오년(甲午年) 4월에 동학에 들어가서 최시형이 청산군(靑山郡) 지방에 있을 때 1차례 찾아뵈었고, 올해 1월에 친한 동도 박윤대(朴允大)에게서 최시형이 이천군(利川郡)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옥천(沃川)사람 박가(朴哥)에게 말을 했다가 경무청(警務廳) 관리에게 체포되어 박윤대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 먼저 가서 최시형을 포획하였다.
피고 박윤대(朴允大)는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의 사위 김치구(金致九)의 집에서 고용(雇傭)살이를 하다가 경무청 관리에게 잡혀 송일회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서 최시형을 붙잡고 뒤에 이 때문에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친한 동도 박치경(朴致景)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엽전 20냥을 가지고 서울에 먼저 와서 최시형의 식비를 도우려고 경무청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그 사실은 피고 등이 자백한 진공(陳供)에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법에 비춰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에, “잘못된 도에 호응하여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또는 도상(圖象)을 숨기며 향을 태우고 사람들을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해산하면서 겉으로는 선한 일을 수행하나 인민을 선동해서 우두머리가 된 자”의 형률로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한다.
피고 황만기는 같은 편(編)의 같은 조(條)에, “종범(從犯)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笞刑) 100대에 종신(終身) 징역형에 처하고, 피고 송일회는 같은 편의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하나 피고 최시형을 잡을 때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본래 형률에서 2등급을 감해 태형 100대에 10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피고 박윤대는 같은 편의 같은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할만하나 최시형을 잡을 때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송일회와 똑같이 2등급을 감해야 하지만 최시형이 갇혀 있을 때 식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1등급을 감하여 태형 100대에 15년 징역형에 처한다.
광무(光武) 2년(1898년)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검사(檢事) 윤성보(尹性普)와 태명식(太明軾) 및 검사시보(檢事試補) 김낙헌(金洛憲)이 입회(立會), 참관하였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재판장(裁判長) 조병직(趙秉稷)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주석면(朱錫冕)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조병갑(趙秉甲)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권재운(權在運)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김택(金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주사(主事) 김하건(金夏鍵)
선고 이틀 후 교수형이 집행되어 그의 유해는 4일간 효수되었고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이종훈 등이 경기도 송파의 한 도인집으로 뒷산에다 매장하였다. 시신을 수습할 당시 묘에 동학괴수 팻말로 확인하였고 효수 당시 동학에 원한진 사람의 소행으로 보이는 몽둥이질로 뒷머리가 깨져 비가 많이 오는 가운데 수습이 매우 어려웠다. 전한다.
현재 여주군 금사면에 안장
그후 1900년 5월 1일 경기도 여주 원적산 천덕봉 아래(주록리) 이장하였다. 1907년 고종에 의해 신원되고 제대로된 장례를 치루지 못하다 2006년 6월 3일 제1회 동학문화예술제에서 108년 만에 장례식을 취뤘다. 까막눈에 인자한 노인, 마치 신선과 같은 풍모, 단순히 사민평등을 넘어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자연만물을 한울로 존귀히 여긴 선인 해월, 오늘날 해월은 유교에서는 맹자, 기독교에서는 베드로, 우리 불교에서는 원효와 같은 입지적인 인물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인데 1986년 4월 10일 여주시의 향토유적 제8호로과 광주시 만선리 경계로 묘지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다. 기울기가 60도 정도이다. 그래도 묘 아래까지는 시멘트포장길이라 쉬이 오를 수 있고 묘 1km 전방 숲으로 이어진 길은 70도 정도 가파른 길을 걷는데 다행인 것은 바닥에 흙길은 아니고 마줄로 엮은 바닥재가 깔렸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일부 통신사는 불통이다. 오르다보면 중간에 왼쪽 오솔길로 빠지면 장남 애국지사 최동희와 장손자 최익환의 묘가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트인 산마루에 최시형의 묘가 있고 그 아래 처 손시화(의암 손병희 동생)의 묘가 있다. 최시형 묘가 있는 산마루 바로 아래부터 샘솟은 물이 작은 개울을 이루며 흘러 청정계곡에 이른다.
해월신사의 가계
해월신사는 최고운선생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종수요 모친은 배씨다 큰따님은 윤이요 사위는 정수현이다. 의암성사의 여동생 손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동희는 상해에서 고려혁명당의 당수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환원하여 건국독립포장을 받았고 둘째 동호는 기미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 끝에 환원하여 건국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받다 동희는 부인 남양 홍씨 사이에 큰딸 문환 맏아들 익환 작은아들 진환을 두었는데 익환은 천도교 도정을 지냈고 부인은 홍창섭이며 아들 재홍 처 박진숙 재원 처 김덕순 재형 처 이혜용 재신 처 정순과 딸 정혜(차광수처) 경혜 영혜(이진봉처) 인혜를 두었고 현손이 많다.
경기도 여주고을 이 산속에 묻히신 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님은 포덕전33년(1827년) 신라의 고도 경주 황오리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5세에 어머님을 12세에는 아버님을 여의고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어 하루 세끼 식생활을 유지하기도 매우 고달픈 신세였다. 하지마는 17세 때부터 비로소 제지소의 일꾼이 되어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한 결과 자립생활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9세에 밀양 손씨댁 규수와 결혼하여 성가하게 되니 날이 갈수록 더욱 근면 성실한 역량을 발휘하여 그 이름을 인근에 떨치고 남다른 소임도 맡아보게 되었다.
35세 되던 포덕2년(1861년) 한울님의 조화와 이치를 직접 수운대선사께 배워 깨닫기 위하여 동학교문에 들게된 바 밤낮없이 정진하는 이 분의 모습과 줄기찬 신앙생활은 어느덧 대선사의 눈길을 끌고 드디어 막중한 도통의 계승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뛰어난 선각자와 성인이 내세우는 진리의 교훈은 매양 억세인 거부반응과 시련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를 외치며 온갖 수난 속의 농민대중을 신바람 나게 고무격려 하면서 민족적 차원의 인간혁명을 기도하고 제창하는 사민평등의 동학운동이 오백년 왕조 말기의 완명고루한 양반 권력층에서 용납될 리도 만무하여 위선 수운대선사가 포덕5년(1864년)에 억울하게도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피흘리고 순교하게 되니 동학교문 전체가 무자비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얼핏 보아 재기불능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이미 대선사의 도통을 계승한 해월신사만은 엄동설한을 맞이한 거목의 뿌리처럼 지하로 깊숙이 파고들어 교문의 소중한 문서 보따리를 둘러메고 계속 은밀한 포교 행각을 일심정력을 바칠지언정 결코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각지에 숨어사는 열신동덕들을 두루 찾아 위로 격려 하는가 하면 후일의 포덕천하를 위한 기본대책을 용의주도하게 다져나가는 것이라 우선 대선사에게 물려받은 필사본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비밀리에 판각 간행하여 보급시키고 둘째는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고 하는 새 윤리도덕의 본보기로 어린이와 부녀자의 인격부터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셋째는 누구나 근로정신을 발휘하여 유진무퇴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같이 20년동안 배양한 저력이 있었기에 동학운동은 마침내 농민대중을 이끌어 포덕35년(1894녀)의 갑오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일양국의 무력간섭으로 성공 직전에 실패하고 포덕35년(1898년) 해월신사 또한 순교 하시고 말았다 하지마는 두 분 교조계서 차례로 이 땅을 적신 순교의 혈맥은 포덕60년(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으로 다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영광된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원천이 되었으니 이 자리에 묻히신 스승님의 유훈 유덕은 정녕 이 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영생불멸 할 것이다
포덕121년(1980년)3월21일, 문학박사 이선근은 글을 짓고 관암 양재환은 글씨를 쓰고 김한은 제자하고 해월신사묘비건립위원회의 전체교민 성금으로 조성한다.
* 묘비에 宣道師, 宗法師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한울은 사람에 의자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니,
그러므로 천지가 주는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아는 것이 만사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삶을 이루어 갑니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숨 쉬고 움직이고 입고 먹는 모든 것이 다 한울님 조화의 힘이니,
한울님과 사람이 서로 돕는 기틀은 잠깐도 떨어지지 못합니다
기운이 마음을 부리나요, 마음이 기운을 부리나요.
기운이 마음에서 나왔나요, 마음이 기운에서 나왔나요.
몸이 생기고 자라며 변화하는 것은 한울님 생명의 기운이고
몸을 움직이려는 것은 내 마음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기운을 조절하지 못하고
기운이 바르지 못하면(병이 생기면) 마음이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몸의 기운을 바르게 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기운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기운이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편안치 못하고,
마음이 편안치 못하면 기운이 바르지 못하니,
그 실인즉 내 마음도 또한 한울 기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본래 비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다” 하였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신령한 깨달음이 절로 생깁니다.
그릇이 비어야 물건을 담을 수 있고,
집이 비어야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으며,
천지가 비어야 만물을 용납할 수 있고,
마음이 비어 선입견이 없어야 모든 이치를 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세요.
저 사람이 포악하게 나를 대하면 나는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저 사람이 교활하고 거짓으로 말을 꾸미면 나는 정직하게 순히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자연히 돌아와 화할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몸소 행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이때 그 사람의 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혹 도의 마음이 부족하여 경솔하고 급하여 인내하지 못하면 서로 충돌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이런 때, 마음을 쓰고 힘을 쓰는 데 내 마음을 따라 순순히 처신하면 쉽고,
내 마음을 거슬려 처신하면 어려워집니다.
이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욕을 참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스스로 자기 잘못을 꾸짖으며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주로 하고,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말하지 마세요.
마음이 맑고 밝게 행하면 그 아는 것이 신과 같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맑고 밝은 것은 곧 도를 지극히 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매일 행하는 모든 일이 도 아님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착해지면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해지면 한 집안이 화해지고,
한 집안이 화해지면 한 나라가 화해지고, 한 나라가 화해지면 천하가 같이 화할 것이니,
비 내리듯 하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일이 있으면 일의 이치를 따져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 공부를 하세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하는 것은 마음 공부에 가장 해롭습니다.
천 칸이나 되는 넓고 큰 집이라도 주인이 잘 보호치 않으면
그 기둥과 들보가 비바람에 무너질 수 있으니 어떻게 두렵지 않을까요.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과 같고,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편안치 않은 것은 천지가 편안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공경하지 않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천지부모를 따르지 않는 것과 같아서, 이는 불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이보다 더 큰 불효가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