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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원 부의장, 친일파 박씨는 누구
철종 임금의 부마인 박영효는 11세 나이로 부마가 됐을 당시 '끈 떨어진 연'과 비슷했다. 그가 세 살 많은 영혜옹주와 결혼해 왕실 사위가 된 것은 1872년 3월 30일이다. <고종실록>에 표기된 음력 날짜는 고종 9년 2월 22일이다. '고종 9년'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인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고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부마가 됐던 것이다.
철종의 7촌 조카뻘인 고종은 철종의 6촌 형제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됐다. 그래서 철종의 부마라는 지위는 고종 시대에는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혜옹주마저 혼인 4개월여 만인 187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박영효의 아들들은 그 후 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자신과 왕실을 잇는 끈이 거의 떨어진 뒤에도, 박영효는 부마 지위를 활용해 정치적 위상을 높여갔다. 17세 때인 1878년에는 장관급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그 뒤로는 판의금부사·특명전권대신·한성부판윤·광주유수 등을 역임했다.
부마 지위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 역량에도 기인했겠지만, 가문이 노론당 출신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구한말을 다룬 황현의 <매천야록>은 "박영효는 금주군 정(炡)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박정은 노론당의 뿌리인 서인당 정권을 확립시킨 1623년 인조 쿠데타(인조 반정)에 참여해 공신 반열에 올랐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역사학자 윤해동의 기고문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는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노론 척족세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조선 왕실에 도전적인 행보
부마 지위에 더해 가문과 당파를 배경으로 위상을 높여나간 박영효는 인연의 끈이 약해진 처가와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됐다. 처가인 조선 왕실에 대해 도전적인 행보를 걸어나갔다. 끈이 약해진 뒤로 조선 왕실로부터 점점 멀어진 게 아니라, 공격적 모습을 드러내며 왕실에 달려드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23세 때인 1884년에 김옥균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동학군 진압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침투한 1894년에 귀국한 그는 이듬해인 1895년에 또다시 역모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있을 때인 1900년에는 고종의 아들인 의화군 이강을 왕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결석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처가와 고종 임금을 상대로 도전적 행보를 걸었던 박영효는 처가 멸망 3년 전인 1907년 하반기에는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고종 황제의 퇴위를 반대하는 대열에 가담했던 것이다. 고종에 뒤이어 순종이 즉위한 7월 24일로부터 한 달이 지난 8월 23일, 이완용을 비롯해 고종 퇴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고종에게 도전적 인물로 비쳤던 그가 이때는 고종을 지키려 한 일로 구속된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고종이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고종 퇴위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기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교포들로 구성된 공립협회가 발행한 그달 30일 자 <공립신문> 2면에 따르면, 경무청에서 조사받을 때 그는 '이완용은 역적'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영효 편은 "1907년 7월 조선과 일본 양국인의 친목을 도모하여 조선에 부식(扶植)할 목적으로 한일동지회를 조직해 회장에 선출되었다"라고 설명한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일본과의 친목을 위해 한일동지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처럼 '처가 망하라'며 친일 행보를 보였던 그가 고종 퇴위를 반대한 것은 이완용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윤해동 기고문은 "이는 이완용과의 갈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의 최고 파트너가 된 이완용과의 갈등 관계가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박영효는 이완용 등에 대한 암살 미수로 1년간 제주에 유배됐지만, 얼마 뒤 복귀해 친일 행보에 속도를 냈다. 이 과정에서 '레드 라인'을 벗어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09년 6월 신궁봉경회 설립과 함께 총재에 선임"된 일을 소개한다.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왕검, 조선왕실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 일본 왕실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숭배하는 단체의 총재가 된 것이다.
단군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숭배하는 것도 문제지만, 처가의 시조인 이성계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함께 받드는 것도 문제였다. 처가에 대한 도전적 의식이 이런 데로도 발현됐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이완용보다 더 필요했던 사람
일본은 그런 박영효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완용 때문에 잠시 '탈선'했던 그를 관대하게 대했다. 일본은 그의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에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20년에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부여했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일왕 하사금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일본이 볼 때 한국 강점 이전에는 이완용이 더 필요했어도, 그 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다. 대한제국을 값싸게 넘겨받는 데는 매국노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일단 넘겨받은 뒤에는 한국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다. 왕실 일원인 박영효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것이 일본에 더 유용했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에게 은사공채 83만 원을 준 데에도 그런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작위와 은사공채로 박영효를 이완용보다 위에 놓은 일본은 두 사람의 강점을 활용해 식민지 한국을 지배해 나갔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은 "박영효는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했지만, 고종의 폐위를 반대했던 전력으로 인해 조선인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라면서 "이완용은 을사조약 이후 매국의 상징으로 송병준과 나란히 비교될 정도로 세간의 혹평을 받고 있었지만, 정치 기반이 탄탄했고 전직 고위 관료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라고 비교한다.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이 되고,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의장직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했기 때문에, 중추원 부의장은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일제는 이 둘을 앞세워 한국인 특권층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다. <이완용 평전>은 "조선귀족원 의장 박영효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을 구심으로 조선 귀족을 포함한 조선인 상층의 결집이 다시 시작"됐다고 서술한다.
1907년 고종 퇴위 때만 해도 박영효와 이완용은 대립 관계였다. 그랬던 것이 조선귀족회가 창립된 1911년부터 달라졌다. 위 책은 "이완용과 박영효는 조선귀족회 활동 과정에서 친밀한 관계로 돌아섰다"고 설명한다. 조선귀족회장 직과 중추원 부의장 직을 분점해 상호보완 관계가 되면서 두 친일파가 우호적이 됐던 것이다.
이완용과 함께 핵심 부역자 지위에 오른 박영효는 일제하에서 안정적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1913년에는 조선무역회사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경제침략 기관인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됐다.
그런 후광에 힘입어 1919년에는 경성방직 사장도 되고 1920년에는 동아일보사 사장도 됐다. 1921년부터 5년간은 중추원 고문으로 일하며 연봉 3000원을 받았고, 1926년부터 1939년 사망 시까지는 중추원 부의장으로 일하며 연봉 3500원을 받았다. 193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勅選議員)에 임명됐다.
친일재산을 축적하는 가운데,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침략전쟁을 응원하는 데도 적극성을 보였다. 1937년 9월에는 국방비 5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2월에는 경성부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이 됐다. 4월에는 조선군사후원회연맹에 1200원이 넘는 금비녀 등을 기부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고문이 됐다.
처가가 존속하는 동안 박영효는 불안정했다. 처가를 상대로 정변을 자주 일으켰고 망명 생활도 오랫동안 했다. 그러다가 막판에는 처가를 무너트리려는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았다.
그랬던 그가 49세 때인 1910년에 처가가 무너진 뒤로는 더 이상 반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완용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9년 9월 21일 사망했다"라며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중추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자문 역할을 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 중추원 의장직을 겸임했고,
부의장 이하의 직임은 조선인에게 돌아갔다.
조선총독부의 짱은 총독이고,그 밑에 각 부처 총괄했던 게 정무총감
<파묘>에서 친일파 조상님으로 알맞은 인물은 이완용이 아닐까?
2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고,
자식들에게 나 죽으면 미국 편에 서라 했다.
물론 실제로 박씨 성을 가진 친일파에다가 중추원 부의장직을 지낸 이들도 있다.
박영효, 박중양.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 대한제국 개혁의 중심에 섰던 때도 있었으나.
결국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벌이다가 1930년대 사망했다.
박중양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아닌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줄곧 독립운동을 조롱하고, 3.1운동을 폄훼하는 일관된 행보를 보였다.
광복 이후 별다른 처벌없이 서대문 형무소에 잠깐 수감되는 걸로 끝이 났으며.
죽기 직전까지, 그의 회고록에서도 조선이 일본 덕에 개선되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