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소장 이승호씨(66). 한때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수많은 장병들을 호령하던 그가 이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의 남편’으로 통한다.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54)은 첫 부인과 사별한 이씨가 1994년 만나 이듬해 결혼한 인생의 반려자. 9년이 지난 오늘, 김씨의 동료 음악가들은 “김 원장 가는 곳에 이 장군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항상 곁을 지키는 ‘그림자 외조’로 이미 이씨는 음악계의 유명인사가 됐다.
“퇴역한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내 영역에서 더 이상 공헌할 게 없죠. 그렇지만 이 사람은 현역이잖아요. 숱한 음악영재들을 가르치고 행정업무를 집행하며 손꼽히는 국제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나가 민간 문화외교를 펼치고 있으니, 힘닿는 한 돕는 거죠.”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4년. ‘한번 만나 보라’는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 ‘쓸데없는 소리’라며 역정을 냈으나 집요한 권고에 항복했다. 어색할 듯한 분위기가 신경 쓰여 미리 소주를 한 병이나 마시고 나갔다. 김씨는 인터뷰 때문에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이혼한 지 15년째, 김씨 역시 나름대로 독신생활을 ‘즐기고 있던’ 터라 볼이 부은 채 마지못해 나왔다.
“커피 한잔 마시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눴죠. 술을 마셔 차를 안 가져왔는데, 이 사람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차에 앉으니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평생 아랫사람을 지휘하고 보살피기만 했는데, 이런 ‘배려’도 받아보는구나….”
집에 들어온 뒤 30분간 기다렸다 “잘 들어갔느냐”고 전화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안부전화는 이어졌다. 이듬해인 95년 11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 전인 8월, 광복 50주년 기념음악회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어요. 이 사람과 또 다른 여러 음악가들이 출연했죠. 그때 처음 콘서트란 걸 가봤어요. 사실은 처음 만나기 전엔 김남윤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지는 성격 탓에 그는 곧 ‘현악 마니아’가 됐다. 김씨의 대외활동에도 빠짐없이 동행하기 시작했다. 때로 악기를 들고 김씨 옆을 걷는 그를 보고 김씨의 제자들은 “닭살 돋아요”라며 놀려댔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더 붙어서’ 걸었다.
97년 그는 스위스의 ‘티보 바가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김씨와 동행했다. 1차 예선에 90명이 넘는 학생이 참가했다. 그는 최종결선까지 전 과정을 객석에서 지켜봤다. 그 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도 모두 따라다녔다. “이제는 누가 통과할지 거의 맞히고 있죠. 저 사람은 ‘어라, 신통하네’라며 놀리죠.”
그의 ‘그림자 외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김씨에게 배우다 꾸지람 듣고 어깨가 축 처진 학생을 달래주는 일, 학교 행정의 골치 아픈 일을 조언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조직관리는 내 전공이나 다름없죠.” 때로는 대외행사의 인사말도 작성해준다.
한국의 열악한 공연장 문화, 형편 어려운 음악도들에 대한 지원방안 등 그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한 길을 가는 ‘또 다른 김남윤’의 모습이 읽혔다.
▼김남윤 교수가 말하는 '나의 남편' ▼
“이 양반, 나이 든 한국남자치곤 꽤 스위트(sweet)해요.”
김남윤 교수는 처음 이씨가 자신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점차 한없는 배려의 마음에 감동했다.
“현역 시절엔 백지장 하나도 옆에서 부관이 들어주던 분이었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챙겨주어요. 예술가니까 어느 때는 처절하게 고독에 빠지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속상해도 얘기를 나누며 풀 사람이 있고, 어려울 때도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학교 행정에 대해 조언할 때 ‘군인다운’ 맺고 끊음이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남편과 ‘예술가 세계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가끔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 중간을 선택하면 일이 잘 풀려요. 역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야 새 세계가 탄생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