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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는 고려 ‘개국벽상공신삼중대광영문하시중(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領門下侍中)’으로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진 김선궁(金宣弓)이고 사후(死後) 순충(順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오보(庚午譜)’(1690)를 보면, 김선궁은 신라 태보공(太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0세 손이자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8세 손으로 신라김씨(金氏) 왕세대(王世代)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이다.
* 김선궁 할아버지 묘
그는 약관의 나이에 고려 태조의 원정군으로 종군, 태조로부터 하사된 어궁(御弓)과 함께 선궁(宣弓)이라는 이름을 사명(賜名)받고 후백제군과의 일이천(一利川)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고려 삼한통일에 기여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김선궁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개경에서 출사 길에 오른 후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나중에 선주백(善州伯)으로 봉해졌다.
『이존록(彛尊錄)』을1) 보면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이었던 김선궁이 사거한 후 큰 아들 봉술(奉術)이 문하시중을 습작하고 이어 그 후손들이 개경(開京)에 계속 머물러 벼슬을 하게 되자 후예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일선(一善)’이라 하였다. ‘일선’의 지명은 그 후 선주(善州) · 숭선(崇善) 등 몇 차례 바뀌었다가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이 국령(國令)을 내려 ‘일선군(一善郡)’을 ‘선산부(善山府)’로 개칭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어 다스리게 한 후 5백여 년이 계속되면서 ‘선산(善山)’이라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따라 ‘일선(一善)’의 본관(또는 관향) 또한 ‘선산’으로 바뀌게 되었다.2)
1)『彛尊錄』은 조선 초기 金叔滋의 언행을 모은 책.2권 1책으로 되어있다. 아들 김종직이 28세 되던 세조 4년(1458년 · 天順 2년 · 戊寅), 父親(金叔滋)의 3년 喪을 마친 후 어버이의 知德과 茂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譜圖 · 紀年 · 師友와 평생의 莅官行事, 그리고 訓戒의 말과 家廟의 祭祀지내는 법이 될만한 부친의 언행을 빠짐없이 기록한 다음 外祖父와 어머니 朴씨 행장을 담아 이름을『彛尊錄』이라 했다. 金宗直은 다시 50세 되던 성종 11년(1480년 · 成化 16年 戊戌) 戊寅年에 撰述했던 譜圖 · 紀年 · 師友 · 姓氏登錄의 내용 중 일부를 考訂하고 事業 및 祭儀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彛尊錄』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死後인 연산군 3년(1497년) 제자들에 의해 初刊되고, 명종 1년(1546년)에 重刊되었다((申鶴祥,『金宗直 道學思想』, 도서출판 영, 1990, 145~146 · 171쪽; 이홍직,『국사대사전』하권, 지문각, 1963, 1214쪽). 李樹健의『彛尊錄』해제를 보면 “이 책은 선산김씨의 유래와 譜圖의 편찬경위를 서술한 다음 祖系와 族系를 ‘譜’와 ‘圖’로 구분하되 圖는 5층의 橫圖에 시조부터 아버지 金叔滋의 손자까지 父系의 직계조상과 씨족을 싣고 다시 ‘보’로써 시조 이하 각 조상의 內外世系(妻名 · 外祖 · 直役) 및 주인공의 高祖부터 그 자녀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이는 중국 송나라 歐陽脩(1007~1072년)의『歐陽氏譜圖』의 편찬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김종직은 이 譜圖를 편찬함에 있어 본관인 선산에 세거해 왔다는 사실을 자신이 선산도호부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점을 살려 善山府 所藏의 자료. 麗代 傳來의 戶籍斷簡 및 戚族의 族圖까지 동원해 世系를 밑에서 위로 遡及, 推尋하는 과정을 거쳐 譜圖를 완성했다. 이렇게 편찬된 선산김씨 先代의 世系譜圖는 뒷날『善山金氏族譜』에 그대로 제공되었다”(이수건,『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55쪽).
2) 善山에 계속 거주해온 일부 世族들은 ‘一善’이라는 貫鄕 호칭을 고집하는 이도 있다.
* 경북 선산군 금호리 소재하는 시조 선궁 할아버지 산소 바로 아래 위치한 미석제 전경. 이 곳은 매년 음력 10월 1일 시조 할아버지의 묘사를 준비하는 곳이고 팔도강산 에서 묘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종친들이 자고 가기도 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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