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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승리가 아닌 십자가가 적대적인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
복음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복음)에 대해서보다는 시민 사회적인 의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시민 사회적인 의가 우리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보스턴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배교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가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에서 찾는 것입니다. 배교의 구체적인 내용들, ‘공로적 의’의 내용들은 시대마다 다양합니다.”
“민주주의든지 자본주의든지, 중산층 문화에 속하는 특정한 가정 문화든지 간에 기독교적 생활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미국식 생활 방식에 대한 옹호도, ‘사회주의 건설’도, 심지어 ‘정의 사회 구현’까지도, 대안적인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죄에 의해 손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다른 복음들’ 가운데 있는 ‘공로적 의’는 정확히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행하기만 하거나 저런 일을 삼가기만 한다면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것이라는 암시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했던 바울의 책망이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야 한다. 복음에다가, 유대적 관습들과 의식 같은 것들을 덧붙임으로써 그리고 그런 것들을 고수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기독교적 정체성을 삼음으로써, 갈라디아교인들은 사실상 다른 복음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 다른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을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서 특정한 정치적 제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을 따르고 있으며, 갈라디아교회 에서 나타났었듯이,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나는 어떻게 참된 크리스천이 민주당원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직 믿음을 통한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보다는 문화적 세뇌 프로그램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는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직 믿음’ 은 공로적 의와 자기 의로 이루어진 다른 복음들을 파괴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직 믿음’ 은 문화적이며 정치적이며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우리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근거한 복음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오직 믿음은 또한 대속의 바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악질적인 죄인들의 죄책과 정죄도 묻어 버린다. 복음은 포르노 중독자, 아동 추행자, 동성연애자, 마약 딜러, 심지어, 낙태 찬성론자들까지도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 초청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우리의 사악함에서부터 돌이키고, 우리 자신의 의가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걸레 조각’임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의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적이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에서 함께 만나게 된다. 문화적 승리가 아닌 십자가가 마침내 서로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일에 대한 비전이다. 이 일은 복음의 선포들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쟁의 수사어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pp 155-160)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자기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 자기들에게 저항할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란 세속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조건, 삶의 상태(condition)이다. 세속주의는 크게 두 가지 운동의 결과이다. 첫째가 근대성(mordernity)이다. 이 근대성은 계몽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계몽주의는 기적, 구원, 계시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법칙, 도덕적 개선, 진보, 이성과 같은 자연주의만을 인정했다. 둘째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ty 혹은 후기 현대성)이다. 이 사조는 경험을 이성보다 앞세우며, 영혼의 내적인 실질을 객관적인 외적 세계의 실재들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근대성(모더니티)과 합리주의의 무미건조한 개선주의에 대해 여러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조다. 둘 다 세속적 운동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승복하고 있다. 종종 그런 일들은 ‘연관성(혹은 적실성, 적합성, 연결성)’ 의 이름으로, 그리고 오늘날 말하고 있는 소위 ‘상황화’의 이름으로 답습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이 시대의 정신에 천천히 영합해 가서 그런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적 저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저변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전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구제책은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에 담겨 있는 그런 회복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대한 초월적이며 영원한 관점 사이의 균형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크리스천이 너무 자주 장난처럼 들먹이고 있다. (pp 170-172)
복음주의자들은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느라 초월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낮아지는 일을 거부하면 할수록, 거부하는 그 정도만큼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엄위와 거룩하심과 주권을 깨닫고서 느꼈던 해방감과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들어오기를 추구하고 자신들의 찬란함을 추구하느라고, 적절한 공식을 통해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기들 마음 속의 신을 추구하느라고 초월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자손은 거듭해서 그들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길에서, 그들은 시편 121편을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회복의 비전을 약속하신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사17:7~8). 현재 우리가 마치 이스라엘 자손처럼, 우리의 조건에서 우리와 만나주는 신,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지를 보여 주고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며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현대의 교회 성장의 신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섬기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신은 매우 ‘실질적이며’ 매우 ‘적절하다.’ 그 신은 거룩하지도 않고, 그의 창조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정원에서 나와 함께 거니시고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얼마나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제단에-그 좋은 머리에서 만들어 낸 확실히 입증된 테크닉들과 프로그램들과 예배 스타일에-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훈련을 계속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심리학과 사회학과 비즈니스와 마케팅 전략들과 정치적 의사일정들과 이데올로기라는 현대의 제단들인 이 ‘산들(high places)’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이 자신들의 부흥과 구원에 대한 소망을 위해 갈보리가 아니라 캐피털 힐(미 국회의사당이 있는 언덕을 가리킨다)을 바라보고 있는가?
언제 우리는 그런 언덕과 산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볼 것인가? 우리의 봉사와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훈련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공과 쾌락과 자기 성취와 같은 지상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자아 성취라는 높은 언덕들과 산 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육체 대신에 하나님에게 우리의 신뢰를 두도록 인도해 주고 있는가? 그 예배에는 보좌에 좌정하신 천지의 주재의 거룩하심과 위엄이 칭송되면서 경탄과 존경과 초월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세상이 잉거솔의 말처럼 “우리가 헛되이 그 높은 곳들 너머를 바라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pp 177-178)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근대성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 지상의 혼란을 천국의 평화로 변환시키려는 추구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아담적인 신화에 대한 최대의 도전이다. 기독교 메시지는 어떤 사람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인종도 그 사다리를 기어 올라서 하늘에 오를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오히려 상실한 세계를 구원하시려고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사람에 대해, 아니 하나님 자신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세속주의는 초월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초월적인 현존 속으로 뚫고 들어가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듯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즉 데우스 누두스(Deus nudus, 벌거벗은 대로의 하나님)를 보려고 시도함으로써 긴장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다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정말 거룩하시며, 놀랍도록 초월적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한 위격 안에서의 두 본성이신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만난다. 승리는 인간성이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나 인종이나 국가가 구세주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현대의 모든 도그마와는 얼마나 다른가!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음의 권세들과 하나님의 진노를 이긴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그 위대한 승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지, 우리가 워싱턴에서 이룬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대중 집회와 행진을 통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죄와 구속에 대한 설명으로써 선포된다.
교회에게 존재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이지 무너져 내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치켜 세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꿈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가는 데 있어서 그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또 하나의 바벨탑, 또 하나의 이교주의의 높은 성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참 소망을 가지고서 하늘을 향해 우리의 눈을 들 수 있는 것은 그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12:29).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대로의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핵심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의 우상들의 유토피아들과 만병통치약들을 크게 반대하면서, 초월적인 해결책과 ‘영적인 것’으로의 복귀를 많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생에서 영적인 측면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대의명분과 운동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이데올로기나 전략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적 실재들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그 날 오후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에 대해 승리하신 역사상의 그 언덕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pp 187-189)
상대적 적용이 아니라 보편적인 절대적 원칙의 적용이어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오직 성경’이라는 개신교의 확신에 매여 있는 것은 정치 영역에서만이 아니다. 교리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윤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금함으로써, (하나님이 묶어 놓으시지 않은 것을) 양심에게 명령할 하등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이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상관 없는 것들'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어떤 규정된 입장에 묶임이 없이 크리스천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판단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회색 지대’를 가리킨다. 우리가 특별히 정책 이슈들을 살펴보아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다. 모든 정책이 다 똑같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크리스천은 인종문제에 있어서의 정의와 화해를 추구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기독교적 긍정은 소수계 우대 정책, 보건 정책, 프로그램들, 웰페어(welfare) 등을 둘러싼 찬반의 정책적 입장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이슈들 각각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주신 ‘큰 그림’ 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고 계시는 것과 우리가 그와 같은 명령에 비추어서 우리 스스로 유추해 내거나 이끌어 낸 것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인명을 보호하라고 외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정당이나 어떤 정책들에 대해 하나님이 축복하섰다고 주장하거나 한 민족이나 한 국가 전체를 하나님이 선호하신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시피, “내가 그 선지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그 자에게 내 말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 자가 내 이름으로 말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발칸반도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우리 시대의 신실한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 대해 말한다. 신실한 선지자는 공습과 같은 것에 대해 자신이 개인적으로 찬성하든, 반대하든지 간에 상관 없이, 공습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메신저일 뿐이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록되어 있는 메시지, 즉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분에게서 백지수표를 받은 것이 아니다. (pp 205-206)
우리는 하나님의 신용을 크게 훼손시켰다
만약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중받는 것을 보고 싶다면, 세상부터 판단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집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용을 크게 훼손 시켰다. 그리고 만약 개혁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 점을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중생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다시 지음받은 자다. 우리는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과 나라들로부터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도록, 현대 국가들의 소망 없는 도시의 한가운데서 소망의 도시가 되라고 하나님이 취하신 자들이다.
한 잔의 물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직업과 행하는 일을 탁월하게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돌볼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의 도성에 존재하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분야들의 연장일 뿐이다. 여러 통계를 보면 복음주의자들도 불신자들 만큼이나 물질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며, 쾌락주의적임이 입증된다. 복음주의자들 자신들이 가장 세상적인 이때에, 그들이 그토록 비판적이며 자기 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한 설문 조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시피 신자의 자녀들이 불신자의 자녀들보다 더 많이 MTV를 시청하고 있다면,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의 가정에다 냄새난다고 코를 들이대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먼저 청소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 나라에서 낙태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교회에서 창조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들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낙태의 육분의 일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국가가 공공 기도를 강요해 주기를 원한다면, 오늘 아침에 우리가 우리 자녀와 더불어서 기도를 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학교들이 도덕을 가르치기를 기대하면서, 그 도덕이 우리의 원하는 특정한 도덕적 신념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화를 낸다면, 우리는 내가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 죄와 구속,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및 기독교 신앙의 다른 위대하며 필수불가결한 진리들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자의 세계는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다. 신학적으로 아무도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우리는 스캔들에 빠져 있으며,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세상적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에 관한 신약 성경의 경고들에 비추어 볼 때, ‘내 코가 석 자’이며,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위기가 너무 심각하여 우리가 온 힘을 다 쏟아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개혁을 위해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pp 218-219)
두 왕국 사이에는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화란의 신학자이자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왕국의 관계를
반립(反立, antithesis)과 일반 은혜(common grace)의 맥락에서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는 말을 듣는다. 나는 자라나면서 고등 학생들의 댄스 파티나 영화 제작, 소설가, 정치 및 가장 악하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시간 낭비라고 간주되는 여타의 분야로 진출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세상’이 무슨 뜻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 즉 ‘죄인의 욕망과 죄인의 눈의 정욕과 죄인이 가지고 있으며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랑’이다. 요한은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문화와 교육과 과학과 예술 등을 미워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사도 요한이 정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허영과 물질주의와 자기 연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 사이에는 이런 반립(antithesis)이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에도 반립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일에 대해 가인을 심판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그 땅에서 내쫓는다면,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다짐해 주셨다(창4:15).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일반 은혜 가운데서 가인으로 하여금 한 도성, 하나의 문명을 건설하도록 하실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화적 활동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그래서 타락에도 불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 활동은 아니었다. 그 활동은 하나님이 섭리로 정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공통적인 일이지만 거룩한 일은 아니었다. 그 일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4:15~16). 가인이 ‘약속된 땅’에서 쫓겨 나가서 ‘에덴의 동편’에서 살았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거기에서 가인은 한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곳은 하나님 나라 밖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물론 그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했으니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가인 후손들의 계보는 그 핵심적인 인물들이 어떻게 문화 가운데서의 다양한 활동의 창시자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21-22절). 그러나 우리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셋의 출생과 그의 계보로 인도된다. 셋의 자손이 문화 가운데서 이룬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본문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로써, 셋의 가문의 중요성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두 개의 도성이다. 하나는 수평 지향적이며, 다른 한 도성은 수직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가정(아담과 하와를 통한 인간 가정)을 통해서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가정들을 통해 일을 하신다. 비록 셋의 자손도 문화에 동참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늘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인 족속과 통혼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의 신앙이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도성을 건설하는 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올 것임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이 두 왕국을 혼동해서,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 우리의 노력들을 통해 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 전체는 이 사상에 대한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즉 문화적 활동(정치, 도덕, 과학, 기술, 예술 및 교육 등을 통해 우리의 맨손으로 우리 스스로 에덴(세계 평화와 고난과 고통, 질병과 빈곤의 종식)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에게 조차도 이 비전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선포하는 대신에,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처럼,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승리들을 쟁취하고 미국을 ‘크리스천 국가’로 만드는 맥락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 크리스천 국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정도는 다양하겠지만, 기독교적인 신념들과 가치들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국가들이나 민족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지상에 더 이상 특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가인이 건설하기 시작했던 그 도성, 그 도시가 바로 오늘날 그 문화적 추구들을 통해 사람들이 건설하고 있는 바로 그 도성, 그 도시다. 그 도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로 세워진 도시다. 그러나 타락 때문에, 그 도성은 마지막 때까지 구원의 영역 너머 ‘에덴의 동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리는 ‘소금’이 되도록 부름받은 크리스천들로서 사회를 보존하고 문화의 쇠퇴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떤 나라도 어떤 제국도 세상은 고사하고서라도 그 자신도 쇠퇴로부터 구할 수 없다.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상당히 비관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시피,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이 영원히 아벨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왕국 사이에는 일종의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애굽과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을 동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로 대접을 잘 받았다. 그리고 그 외국 문화의 관습들과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들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실은 동전의 또 다른 측면을 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만약 ‘반립적 성격’이 두 왕국 사이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투쟁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고 한다면, ‘일반 은혜’는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함께 공동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 공동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pp 226-230)
일반 은혜로, 불신자들에게도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들이 있다
타락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초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참사랑, 의로움에 대한 열망 등)과 우리가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재능, 지혜, 지식, 이성 도덕, 창조성 등)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이 둘을 다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초자연적인 부분은 타락과 함께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 소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자연적인 개입으로써만 회복될 수 있다.
사람들의 의지가 죄에 노예화되어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왜곡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는 건강함이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한 채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의 행위들에서조차 사곡(邪曲)함을 보실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사곡함을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 이후에 본성상으로 영적인 의로움에 대해 무능력할지라도, 시민 사회적인 덕은 행할 수 있다. 인간의 부패를 뚫고서 빛나는 하나님 형상의 광채들은 ‘그가 이성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가 이해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를 야수들로부터 구별시켜 준다.’ 물론 그 이해력도 무지로 얼룩져 있지만 말이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전2:14).
불신자들이 의로운 법률들과 좋은 음악과 건전한 교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불신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며, 여전히 빛의 광선들이 빛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적인 주권을 통하여 행사되고 있는 일반 은혜는 우리의 부패와 무지가 우리를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깊이까지 가지 못하도록 사악함과 악습과 무지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오직 크리스천만이 국가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비기독교인들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고 그들과 함께 하거나 그들의 작업도 즐길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일반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통찰들이 여기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속 작가들에게서 이런 내용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빛나고 있는 진리의 경탄할 만한 빛으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이 비록 타락했으며 온전함으로부터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탁월한 선물들로 옷입고 있으며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샘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않도록, 진리가 나타날 때마다 그 진리 자제를 거부하지도 그 진리를 경멸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처럼 위대한 형평성을 가지고 시민 사회의 질서와 기율을 확립했던 고대의 법률가들 위에 그 진리가 비추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것인가? 자연을 세련되게 관찰하고 솜씨 있게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눈이 멀었다고 말할 것인가? --- 의학을 발전시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그 사람들을 실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 모든 수학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 학문들을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들로 취급할 것인가? --- 성경(고전2:14)에서 ‘자연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진실로 땅에 속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예리하게 통찰을 한다. 따라서, 그 참된 선함이 훼손된 이후에라도 주님은 인간 본성에게 얼마나 많은 선물을 남겨 두셨는지를 그들의 예를 통해 배우도록 하자.(강조는 덧붙인 것임)
터어키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계’에 침공해 들어와서 유럽 전체를 삼킬 듯이 위협하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차라리 나는 부정직한 크리스천보다는 정직한 터어키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비록 영적인 분별은 한 사람이 중생할 때까지 완전히 상실되어 있지만 불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혜와 탁월함과 덕성과 아름다움이 상당히 있다. 이런 선물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 비록 그 선물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크리스천들 자신들도 중생했지만 여전히 죄인들이다. 그리고 분명 여전히 악하기도 하다.
구속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은 우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그 참여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일반 은혜’의 시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기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5:45). 언젠가 한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치 않았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눅9:54-'56).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세상의 마지막 때다. 지금은 올바른 때도 아니며, 우리 또한 올바른 재판장들도 아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지만, 교회는 통치자들과 세속 권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롬13장). 이는 사악한 통치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pp 23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