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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딤전6:11-21)-2017.8.13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신자는 그냥 자기들이 살아가던 방식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한 방법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목사는 설교할 때처럼 살면 됩니다. 성가대는 예배시간에 찬양할 때처럼 살면 되고, 성도는 조용히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아니 가장 은혜스러운 예배 현장에서 예배하는 것처럼 살면 됩니다.
오늘날 속칭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지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에게 덕을 세우며 말입니다. 문제는 사회 지도층에 있는 기독교의 저명인사들이 물의를 일으키며 지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 목사들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4성장군의 갑질 사건은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이유는 교회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중직을 맡은 자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정말 마음이 무겁고 참담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없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만 출석하면 무엇 합니까? 신앙의 연륜만 깊어지면 무엇 합니까? 혹은 교회의 직분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단의 앞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런 사람들을 활용하는 것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영혼을 전도하기가 얼마나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먼저 믿는 자들을 통해서 상당수의 영혼들이 상처를 받고 실족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영향력 있는 성도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붕괴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 한 사람의 언행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를 주저합니다. 물론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 다니는 것으로 안심하거나 직분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금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불신자요, 복음의 훼방꾼입니다. 때문에 내가 주님의 성전인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고전3:16). 내안에 주님이 계신지를 말입니다(고후13:5).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요일3:9).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른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신앙의 직분이나 경륜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신앙의 교육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부지런함이나 열정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신으로 되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단어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신분과 정체성이 들어있고, 거기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귀함이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난 사람, 된 사람, 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된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당신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구약의 암울했던 흑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셨고, 신약의 우울했던 암흑 속에서도 당신의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아래서도 여전히 당신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구약의 모세와 사무엘, 다윗과 스마야, 엘리야와 엘리사, 신약의 디모데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을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물론 이미 기록된 성경에 우리 이름이 등록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록에 등재되는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말이나 일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입술은 정직해야 하고, 마음은 진실해야 하며, 영혼은 정결해야 합니다. 행실은 바르고 성품은 곧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언행심사가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며, 사람들 보기에도 칭찬을 받을 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사단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덟 살 먹은 아들과 엄마가 TV를 보면서 밥을 먹습니다. 마침 미인대회를 보고 있는데 아들이 미인대회가 무어냐고 묻더랍니다. 엄마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뽑는 대회란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런데 엄마는 왜 안 나갔어?’ 그러더랍니다. 그 아들의 눈에는 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다들 천사 같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지탄과 핀잔을 받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호칭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덕목들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바울 사도가 보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합니다(딤전4:12).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유혹들이 즐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침서와 같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다리는 교회에, 한 다리는 세상 속에 들여놓고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살아갑니다. 매우 어정쩡한 상태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야 자유롭고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면 어설프고 자신감도 없을 뿐 아니라 자유도 없습니다.
본문에는 동사형 단어가 몇 개 나옵니다. 피하고(11절), 좇으며(11절), 싸우라(12절), 취하라(12절), 지키라(14절), 행하고(18절),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은 14절에 나오는 ‘이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에 다 걸립니다.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셋 중에 하나는 소극적인 방법이고, 두 개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소극적인 방법은 잘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방법은 잘 좇아야 하고, 잘 싸워야 합니다.
(1) 잘 피해야 합니다(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피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9-10절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정욕이요, 10절에 나오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돈과 정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에 약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것을 미끼로 하나님의 사람을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범죄에는 돈과 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런 것들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우리의 육신을 자극시켜 범죄케 하는 것들로 충분합니다. 눈을 즐겁게 하고 귀와 입을 즐겁게 자극합니다. 때문에 방심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어금니를 깨물며 각오를 단단히 해도 춤추는 나이트와 캬바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영성이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강도들의 굴혈이요, 죄악의 지뢰밭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적인 욕구입니다. 꼬리치며 유혹하는 성적인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성적인 유혹을 극복하려면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자기 주인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끈질긴 성적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하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주인의 처는 날마다 요셉을 꼬드겼지만 요셉은 동침치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습니다(창39:10). 함께 있는 상황을 피했습니다.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 영혼을 망보고 있습니다. 요셉은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고 마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가 위험합니다. 그 여인은 요셉의 옷을 잡고 자기와 동침해 달라고 교태를 부립니다. 그러나 요셉은 벗겨진 자기 옷을 버리고 현장을 도망쳐 나옵니다. 하지만 여인은 자기의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 히브리 사람이 자기를 겁간코자 했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마귀는 그것을 빌미로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죄를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혜롭게 피해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스포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격도 잘해야 하지만, 수비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피하는 것이 후퇴는 아닙니다. 비굴함도 아닙니다. 피하는 것은 지혜로움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부부끼리도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툴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따지고 덤벼들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서 곤란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여 냉각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이 누그러지고 냉정해집니다. 감정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피하는 것은 우리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유혹의 장소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피해야 할 목록들을 직접 거론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망령되고 허탄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말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말과 변론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섞다보면 더 많은 말을 만들어내고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성적 유혹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의 힘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물질 앞에서는 작아집니다. 물질을 내가 잡으려고 쫓아다닌다고 잡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물질을 피할지라도 물질이 나를 좇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피할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4절에 나오는 모든 것들도 우리가 피해야 대상들입니다. 변론이나 언쟁이나 분쟁이나 투기나 훼방이나 악한 생각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잘 피해야 합니다.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전략이요, 전술이며, 지혜입니다. 잘 피하십시오.
(2) 잘 좇아야 합니다(11절)
하나님의 사람은 피할 것은 피하고, 좇을 것은 좇아야 합니다. 좇는 다는 말은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앞에 나오는 피하는 것의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항상 잘 피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뭔가 우리에게는 채워져야 할 영적인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수비만 잘 한다고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수비만 잘하면 비길 수는 있지만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잘해야 비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피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좇을 것은 잘 좇아야 합니다. 좇는 것에 실패하면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잘 좇아야 합니다. 무엇을 잘 좇을까요?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피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요, 좇는 것은 채우는 것입니다. 버렸다면 채워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을 버렸다면 반드시 신령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정욕을 피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했다면, 영적인 것들로 채워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가구들이 채워지고 사람이 살아야 집다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속적인 것들을 피하고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들을 좇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좇아야 할 6가지 목록들이 나옵니다.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의와 경건입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의로움을 얻습니다. 의로워진 사람은 경건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다른 이름은 거룩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가 없는 경건은 바리새적 위선이요, 경건 없는 의는 생명 없는 조화입니다. 의와 경건은 한 지붕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자동차의 앞뒤 바퀴와 같습니다. 믿음 곁에는 항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인과관계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사랑스러워집니다. 사랑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믿음과 사랑도 한 지붕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 번째 짝을 이루는 단어는 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덕목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지 못하므로 인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내하면 온유해집니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온유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인내합니다. 인내하는 자는 온유합니다. 온유는 무조건 얌전하다는 말이 아니요, 연약함도 아닙니다. 실력이 없거나 무능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온유는 강하고 담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거칠고 힘이 센 야생마가 길들여질 때 온유하다는 말을 씁니다. 인내 없는 온유는 일시적이고, 온유 없는 인내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좇아야 합니다.
(3) 잘 싸워야 합니다(12절)
본문 12절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싸움을 잘해야 합니다. 아니 잘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싸움의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싸움에는 선한 싸움도 있고, 악한 싸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싸움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싸움이요,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싸움입니다. 한마디로 싸움의 목적이 자기 육신의 배를 채우고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것은 모두 다 악한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입니다. 이방인들의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근본적으로 싸움의 목적이 다릅니다. 비록 주의 일을 한다는 목회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배와 유익을 도모하고 있다면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싸우는 악한 싸움꾼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목적도 확실히 알며, 싸움의 방법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6:11).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엡6:13).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은 선한 싸움입니다. 물론 본문 18절의 말씀처럼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일에 부요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것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은 24시간동안 죄악과 부딪혀 싸우는 사람입니다. 마귀는 휴전도 없고 종전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싸울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최후승리를 얻을 때까지 말입니다.
사실 이 싸움의 가장 큰 대적은 자기와의 싸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게으름과 싸우고, 교만함과 싸우며, 자신 안에 있는 열등감과도 싸우며, 못된 성품이나 기질이나 습관과도 싸워야 합니다. 죄악으로 달려가는 자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잘 싸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잘 싸우지 못하면 무기력하게 되고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다고 안 싸우고, 피곤하다고 타협하며, 무능하다고 포기합니다. 싸우다가도 너무 쉽게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것들과는 피터지게 싸웁니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싸움의 대상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며, 싸우는 방법도 모릅니다. 진짜 싸워야 할 것은 싸우지 않고 아무것에나 쓸데없이 끼어들어 싸우다가 중요한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한 채 영적인 싸움에는 어떤 관심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자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싸우는 것이 선한 싸움인지, 혹은 악한 싸움인지 분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이 선한 싸움인지 악한 싸움인지 분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안에서 싸우는 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별하면 됩니다. 내안에서 내가 주인 되어 싸우는지, 혹은 주님이 주인 되어 싸워주시는지를 분별하면 됩니다. 싸우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악한 싸움은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싸웁니다. 이런 싸움은 아무리 잘 싸워도 패배합니다. 그러나 내안에서 주님이 주체가 되어 나로 하여금 싸우게 하시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이 방법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성경의 예를 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장 먼저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을 비무장한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것은 절대 무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 안에서 하나님이 싸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아이 성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주 작은 성입니다. 그들은 아이 성을 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아이 성 정도는 자기들만의 힘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 없이 삼 천 명만 올라가서 싸우게 했습니다.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이 싸움은 악한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는 자기들 안에서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선한 싸움이었지만, 아이 성의 전투는 자기들이 주체가 되어 싸우는 악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싸움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선한 싸움과 악한 싸움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힘과 능력만 믿고 싸우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 있는 장수라도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는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싸우는 자는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십니다. 찬송가 384장을 보십시오. 2절 가사입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성경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인 골리앗과 싸우는 소년 다윗을 기억하십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합니다(삼상17:4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싸우는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명예롭게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십시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머리, 나의 전부로 믿고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을 적시고 흘러가도록 주님의 마음을 구하십시다. 그러면 내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싸우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잘 피하고, 잘 좇으며, 잘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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