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2-4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원도 속초에 가면, 중앙시장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닭강정도 유명하지만, 닭강정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막걸리 빵입니다. 그 시장 근처에 가면, 한 손에는 닭강정, 다른 한 손에는 막걸리 빵을 들고 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속초에 갔을 때, 닭강정은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살 수 있었지만, 막걸리 빵은 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서, 살 수 있었습니다. 사서 먹어보면, 맛있습니다. 막걸리빵,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 먹는 이유는,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에는 주로 집에서 만들어 먹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에 막걸리를 넣어, 이불 속에 넣어두면, 크게 부풀어 오르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70년대-90년대, 우리나라는 참 먹고 살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쌀독에 쌀이나 보리쌀이 들어 있는 것보다는 아랫목에 고구마를 쌓아두는 모습이 더 흔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잘 사는 나라에 속하지만, 그래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에 가게 되면, 종로 탑 공원을 지나가게 되는데, 점심때 무렵이면, 많이 사람들이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루하루, 한 끼를 해결한다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때에, 원망과 불평보다는 항상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끝까지 책임져 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 네 권을 합하여, 일반적으로, “사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이 네 권 모두에 기록된 이야기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이야기입니다. 그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넓은 벳새다 들판에서, 배고팠던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모두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 떡을 주었습니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는데,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람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만한 떡과 물고기의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아야, 그들이 배부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일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과거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군산에 가보면,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의 양식과 물자들이 수탈되어, 일본으로 실려 나갔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스러웠고, 배고팠습니다. 그런데, 그 먹는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배부르게 살 수 있다”라고 소리치며,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막걸리 빵으로, 고구마로, 옥수수로, 밀가루죽으로, 겨우 허기진 배고픔을 달래고 있는데, 쌀 한 가마니가 생긴다면, 얼마나 신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넓은 밭에서 일하던 농부도 전화 한 통화면, 짜장면이 배달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바닷가 해수욕장에서도, 전화 한 통화면, 치킨이 배달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배고픔이 그때 그 당시에는 있었습니다.
저는 “보리밥, 수제비, 칼국수, 국수, 누룽지, 고구마, 감자, 뻥튀기”라는 단어들이 아주 익숙한 시대를 살았기에, 배고픔이 어떠한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 넓은 들판에서, 먹을 것이라곤 하나 없는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았다고 하는 사실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들판에서, 배 터지게 먹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있는 배고픈 식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낮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기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고픈 식구들을 배부르게 하려면, 바로 그 기적을 행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해가 뜨자마자, 그들은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장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것, 먹을 것을 준비한다고 했지만, 너무나도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그리 많이 준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충분하게 준비한다고 했지만,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금방 떨어졌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목숨은 구했지만,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들을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넓고 넓은 광야요, 물없는 사막이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넓은 호수가 있을지라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사해였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애굽을 생각하며, 자유고, 해방이고, 그런 것 필요없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다 죽게 되었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쌓아두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하루의 양식이었습니다. 내일 먹기 위하여, 미리 쌓아두면, 썩어버렸습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들판에 나가면, 만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의 먹을 양식이 해결되었습니다.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어나 들판에 나갔는데, 만나가 없다면”이라는 그런 걱정을 밤새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은 그 만나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에도, 그 만나는 어김없이 내려왔습니다. 안식일에는 그 전날, 두 배로 얻을 수 있었기에, 안식일에 굶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루의 양식만 주신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벽 배송의 원조는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새벽 배송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을, 전날 자기 전에 주문해 놓으면, 다음날 아침, 일어나, 문을 열면, 주문했던 것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집 안에 쌓아놓고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날 그날, 먹을 것을 새벽배송으로 시키면, 아주 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애굽과 같이 모든 것이 풍부한 발달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있는 것이라곤, 모래와 돌과 바람밖에 없는 광야요, 사막이었습니다. 장정만 60만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한다고 한들, 그것을 어디에 보관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냉장고가 있습니까? 김치 냉장고가 있습니까? 우리 조상들처럼, 뒷마당에 묻어두거나, 장독에 담아둘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달치 식량이나 일년치 식량을 어떻게 보관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먹을 양식이 많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짐이 될 것입니다. 들고 다니기에,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도 세심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새벽 배송으로, 매일 매일 신선한 양식을 허락해주시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여, 이물질이 썩이지 않는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시니, 얼마나 세심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십니까?
청년 시절,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코엑스에서, 맥반석 정수기를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어느 가정에서나, 정수기 없이, 그냥 수돗물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맥반석 정수기를 판매했는데, 워낙 비싸서, 그리 많이 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맥반석 정수기는 어떤 원리입니까? 그냥 통 안에 맥반석을 넣어두고, 수돗물을 연결하면, 맥반석이 영양가 있는 맛있는 물로 변화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맥반석이 무엇입니까? 돌입니다. 한 마디로, 돌을 넣어두면, 물 성분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 모래 속에서, 아니면, 흙 속에서 물이 나오게 했다면, 60만명이 그 물을 떠서 먹는다고 한다면, 그 물이 온전히 깨끗했겠습니까? 그냥, 이물질이 가득한 흙탕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흙이나 모래에서 물이 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바위에서 나오게 하셔서, 이물질이 없는 항상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루의 양식인 만나와 깨끗한 물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을 얻었던 사도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냥 양식과 물을 주시고자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옛날 모세 당시의 만나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 6:31)
어쩌면, 배고플 때마다, 모세 때,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늘에서 너희에게 떡을 내려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 여인은 자신의 상황 때문에, 남들이 돌아다니지 않고 쉬는, 가장 더운 낮시간에,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와야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원한 시간에, 아무 때나 물 길러 나올 수 있었지만, 그 여인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흉 볼까봐, 남몰래, 물을 길으러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당신은 우리에게 무슨 물을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다가 금방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고자, 그 우물가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의 샘물을 그 수가성 여인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들판에 있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들에게 단 한끼의 배부른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하루의 배고픔을 해결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목소리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그들의 눈에 보이는 떡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먹고 배부를 수 있는 육신의 떡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 빌립도,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어찌,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이요, 빌립뿐이겠습니까?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그 당시의 백성들이요, 제자들뿐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했을 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의심 많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확실히 믿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당시 백성들처럼, 살아계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3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일반 백성들, 그리고, 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서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너희가 나를 먹어야, 영원히 살 수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며,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렸던 제자들은 하나둘,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날로부터,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찾아왔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듣고 들으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날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곁을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곁에서, 영생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시던 날, 배고프신 예수님께 시험하는 자, 마귀가 찾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는데, 우리야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벳새다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배불리 먹었던 백성들, 당장 먹을 양식이 해결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진짜 생명의 떡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잠시 잠깐 생명을 유지시키는 떡을 받아먹고는 좋아하는 그들, 그 오병이어 때문에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흥분한 제자들,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찹찹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짜 생명의 떡이고, 진짜 생명의 주인이신데,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백성들, 그리고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만을 걱정하는 철없는 제자들과 백성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외로워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기적은 어디 없는가?”라고, 그러한 것에 과도한 관심을 갖고, 거기에만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시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고, 예수님 안에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안에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찾아와 주옵소서.
우리의 미음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겠습니다.
주여,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 가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사오니, 아름다운 열매 맺는 복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