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명인 비하인드 스토리] 공자 편-제3회: 공자의 벼슬길
(사진설명: 공자의 동상)
제3회 공자의 벼슬길
공자는 집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다. 공자가 이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죽간을 연결한 소가죽 끈이 벌써 세 번이나 닳아 끊어졌다. 이 때 계손씨가 보낸 사자(使者) 비인(費人)이 찾아왔다.
“부자께 감축 드립니다. 저희 주인께서 부자를 중도재(中都宰)에 임명하셨습니다.”
공자는 떨리는 손으로 임명장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저녁 공자는 침대에 누워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세상에서 예악이 무너지고 노나라의 권력이 계손씨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자신의 정원에서 감히 예법을 벗어나 천자의 팔일(八佾) 무용을 감상하는 그가 무슨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지 못하겠는가?”
몸을 뒤척이던 공자의 생각은 또 이렇게 흘렀다.
“이는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만약 이 벼슬을 받지 않는다면 극기복례의 꿈을 어떻게 이루겠는가?”
공자는 끝내 역사가 부여한 이 사명을 짊어지기로 작심했다.
공자가 1년 만에 중도(中都)를 잘 다스리자 노 정공(定公)은 공자를 사공(司空)으로 승진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그를 법 집행을 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로 임명했다. 공자는 대사구를 담임한 동안 삼도(三都)를 무너뜨리고 소정묘(少正卯)를 제거한 두 가지 큰 일을 했다. 삼도는 바로 당시 노나라 권력을 장악한 계손씨와 숙손씨, 맹손씨 세 가문의 봉지(封地)를 말한다. 당시 그들의 봉지는 노 나라의 도성(都城)보다도 더 컸다. 공자는 그들이 모두 예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며 기존의 규모로 회복해야 노나라 도성이 도성으로서의 모양을 유지하게 된다고 했다.
공자의 집행으로 숙손씨의 후도(郈都)와 계손씨의 비성(費城)은 무너뜨렸으나 맹손씨는 성성(成城)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다. 성재공(成宰公) 염양(斂陽)이 말했다.
“성성을 철거했다가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해오면 어떻게 방어하겠소?”
공자가 웃었다.
“기필코 소정묘가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는 노 정공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소정묘가 허튼 말로 나랏일을 어지럽히니 법에 의해 목을 베어야 합니다. ”
공자는 소정묘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그의 죄를 묻고 당장에서 그의 목을 베어 “가신이 국정을 논하는(陪臣執國政)”는 현상을 정돈해 한 때 세상을 들썩하게 했다.
이 때 제나라의 상대부 안영이 병사했다. 제 경공은 공자가 상국(相國)을 대행하며 노나라를 잘 관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나라가 강대해질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때 대부 여미(黎彌)가 좋은 말 120필과 미인 80명을 노나라 군주에게 선물로 보내라는 계책을 경공에게 냈다. 노나라의 군주 경공과 경(卿) 계손씨는 과연 여미가 생각한 대로 미인계에 말려 들어 낮에는 가무, 밤에는 주색에 빠져 더는 나랏일을 보지 않았다. 공자가 아무리 간언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심지어 제례를 지낼 때에도 군주가 계손씨에게 밀고 계손씨는 가신에게 맡길 정도였다. 그날 집에 돌아온 공자는 밤 늦게 기다렸지만 끝내 제육(祭肉)을 받지 못했다. 제례가 끝나면 군주는 신하들에게 제육을 보내 신임의 의사를 전했다. 공자가 제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더는 중시를 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더는 자신을 등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벼슬을 버린 제자들인 자로와 염유(冉有)를 거느리고 노나라를 떠나 송(宋) 나라로 갔다.
사실 공자는 송나라 사람이었고 송나라 군주 양공(襄公)의 자손이었다. 공자의 6대 조상 때 공씨 가문은 송나라의 내란을 피해 노나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나라도 공자를 반기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송나라의 대사마(大司馬) 환추(桓魋)가 공자를 질투해 송 경공(景公)에게 공자를 받지 말라고 말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이 사관직에까지 이르러 조정의 정권을 한 손에 장악했습니다. 그런 공자가 왜 노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왔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공자는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주께서 공자에게 관직을 내리시면 송나라는 언젠가는 공자의 천하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공자는 송 양공의 자손입니다,”
송나라의 나랏일을 보던 환추는 공자가 자신보다 능력이 있어서 민심을 얻으면 자신의 라이벌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공자가 송나라에서 자신의 지위를 대체하며 심지어 공자가 경공의 자리까지 넘볼 것이라는 질투심에 불탔던 것이다. 그 바람에 워낙 환추와 사이가 좋은 경공도 공자를 반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송나라 여관의 마당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예의(禮儀) 시연을 하고 있는데 환추가 군대를 보내 그 나무를 잘라버리게 했다. 그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말했다.
“스승님을 원수 같이 보는 환추가 언젠가는 스승님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송나라를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공자는 환추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고 단지 쫓아내기 위해 그런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송나라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정(鄭)나라로 갔다.
공자와 자공은 정나라로 가는 길에 서로 흩어지게 되었다. 공자는 자공을 찾으러 다니면 오히려 만나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성문 밖에서 자공을 기다렸다. 자공도 이곳 저곳 다니며 스승을 찾았다. 그러다가 정나라의 사람을 만나 물었다.
“저의 스승님을 보셨습니까?”
“성 동쪽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머리는 당요(唐堯) 같고 목은 고도(皋陶) 같고 어깨는 자산(子産) 같으며 허리 아래는 하우(夏禹)보다 짧은데 온 몸이 먼지투성이어서 마치 상갓집 개와도 흡사했소. 그 사람이 당신의 스승이시요?”
자공이 그 말을 듣고 바삐 동쪽 성문에 이르니 과연 공자가 그 곳에서 급한 마음으로 조바심을 내면서 여기 저기 살펴보며 자신을 찾고 있었다. 한 시름을 놓은 자공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금방 한 사람이 스승님께서 상갓집 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 아니냐? 지금 나는 정말로 상갓집 개 신세구나.”
그 때 정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나 공손흑(公孫黑)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공자의 유세 원칙은 위험한 나라와 내란이 일어난 나라는 피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자공을 데리고 정나라를 떠나 위(爲) 나라로 갔다.
위나라 군주 영공(靈公)은 공자를 환대해 노나라와 같은 봉록을 주었으나 벼슬은 내리지 않았다. 능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공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였다.
위 영공은 미남자인 미자하(彌子瑕)를 좋아하고 영공의 군부인(君夫人) 남자(南子)는 송나라의 미남자 공자(公子) 건(健)과 내연관계에 있어 위나라 궁은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영공의 부인 남자는 공자가 성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영공은 공자에게 입궐해서 자신의 부인 남자를 알현하라고 명했다. 영공의 봉록을 받는 공자는 거절할 수 없어서 궁에 들어가 남자를 만났다. 돌아온 공자를 보고 자로가 불만을 터뜨렸다.
“남자는 명성이 좋지 않은데 스승님께서는 왜 그 여인을 만나러 가셨습니까?”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공자가 맹세했다.
“만약 내가 그 여인과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
어느 하루, 영공은 부인인 남자와 한 차를 타고 외출하면서 공자에게는 다른 차를 타고 따르게 했다. 이는 성인을 아주 존중하지 않는 행위였다. 마차가 거리를 지날 때 위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영공을 풍자했다.
같은 차를 탄 사람은 여인이겠지?
차를 따르는 사람은 성덕(聖德)이겠지?
너무도 난감한 공자는 돌아와서 탄식했다.
“위나라 군주는 정말로 덕보다 여색을 좋아하는구나.”
당시 위나라에 또 이런 스캔들이 터졌다. 영공의 부인인 남자가 공자(公子) 조(朝)와 사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공은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오히려 영공의 세자(世子)인 부귀(剻瞶)가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가신을 보내 남자를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자가 울면서 영공에게 하소연을 하자 영공은 부귀를 세자에서 폐위하고 위나라에서 쫓아낸 다음 부귀의 아들인 첩(輒)을 새 세자로 세웠다.
그 후 영공이 붕어하고 세자 첩이 그 뒤를 이어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위 출공(出公)이다. 아들이 보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부귀가 위나라로 돌아와 군주 자리를 다투었다. 진(晉) 나라가 부귀를 지지하고 제나라가 첩을 지지하면서 뒤에 대국을 업은 두 부자는 군주다툼에 열을 올렸다. 아들은 성을 지키며 부친을 막고 부친은 성을 공격해 아들의 보위를 빼앗으려 하는 인륜에 어긋나는 허황한 일이 벌어졌다. 공자는 차마 그런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또 위나라를 떠났다.
그 후 9년 동안 공자는 다른 제후국들을 여러 개 다녔지만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수모를 당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 번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공자는 집에 돌아와 고서를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편찬하면서 다시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도한 것이(滔滔者) 온 천하가 다 그러한(天下皆是也)”난세를 만난 공자는 시종 극가복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