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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짜 거듭났는가?
서론
신자의 구원에 관한 주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측면이다.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주시고, 의롭다 해주시며, 거룩케 하시고 또한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해주시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책임은 회개하고, 믿고, 또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신자의 구원 문제에서 거듭남(regeneration, 또는 중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적 영역에 속한다.
거듭나게 하는 일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이 부분에서 인간이 해야 할 어떤 역할이나 몫은 없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이라고도 하고 위로부터 난다고 말하기도 한다(요3:3). 출생은 태어나는 사람의 노력이나 수고가 전적으로 배제된다.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욱 영적으로 태어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다.
거듭남은 영적인 부활에 비유되기도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의심할 여지없이 부활은 인간의 영역 밖의 일이다. 죽은 시체가 자기 스스로 되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도, 혹은 집단도 죽은 몸을 되살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를 나오라고 말씀으로 명하실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와 허물을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영혼을 새 생명으로 소생시키실 수 있다.
다시 말해,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새로이 들어가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전에 존재조차 없던 것을 존재하게 하실 수 있다. 창조에 있어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일을 도울 수도 없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은 잔디밭의 풀들을 창조해낼 수 없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거듭남은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은 조금도 도울 수 없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초자연적인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단지 외형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고쳐먹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전도자의 간청에 못 이겨 강단 앞으로 나아가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이다. 거듭남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영혼에 임하는 것이다. 경이로운 경험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육체적인 출생도 경탄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보아도 거듭난다는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경이로운 역사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경이로운 역사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의해 경이로운 역사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경이로운 일이다. 거듭남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며, 우리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한다. 거듭나는 역사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 중의 기적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또한 신비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 속에 싸여 있다. 인간의 생명, 자연계의 생명, 그 기원 그리고 그 특성과 변천 과정들을 뛰어난 과학자, 생명공학자, 심지어 인문학자까지도 좌절하게 만든다. 영적인 생명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실체는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 스스로도 거듭남은 신비로운 일이라고 단언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박식한 과학자들도 바람에 관한 한, 잘 알지 못한다. 바람의 특징, 바람을 통제하는 힘의 법칙, 그 인과 작용 등 바람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연구의 한계, 그 너머에 있다. 거듭남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듭남은 심오한 신비이다.
거듭남은 지극히 엄숙한 일이다. 거듭남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갈림길이다. 하나님의 시작에서 볼 때,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새 생명으로 살아난 사람들이다.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삶과 죽음, 그 중간 영역에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람의 생기가 아주 약할지라도 생명이 있는 동안은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당신이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아무리 값지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을지라도 당신은 다만 시체일 뿐이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죄인이거나 성도이거나, 둘 중 하나다. 영적으로 살아있거나 영적으로 죽어있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아니면 사탄의 자녀다. 이러한 엄중한 사실 앞에 중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당신은 진짜 거듭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 당신이 지금의 상태로 죽는다면 그 날이 왔을 때, 당신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을…’이라고 간절히 바랄 것이다.
제 1장. 거듭남의 필요성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거듭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따로 제쳐놓거나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일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남이 하나의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볼 때 명백하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7)
주님은 “네가 거듭나갈 바란다.” 또는 “네가 거듭났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You must be born again).”라고 명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서도 이처럼 강한 어조로 반복하여 말씀한 곳이 없다.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다른 성경 구절에서 주님은 긍휼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을 보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그러나 요한복음 3장에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거듭나지 않은 모든 자들에 대해서 천국문의 빗장을 의도적으로 닫으신 것이다. 진리의 강권함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셨을 리가 없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단 한 영혼도 영원한 축복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더욱 엄숙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분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거듭남이 그토록 중대하고도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인가?
첫 번째 이유로, 인간의 본성은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그는 영적으로 죽었고 그 후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녀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선천적인 혈통에 의해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상태가 되었다(엡2:1,4:18).
이것은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닌 명백한 사실이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은 영적 생명의 단 한 줄기의 생기도 없이 이 세상에 들어온다. 그러면 여기에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또 들어갈 수도 없다는 대답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영적으로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영적 생명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 이유로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영적인 성품이 요구되기 때문에 거듭남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난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이다. 그 나라는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고, 오직 거룩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존전에 거할 수 있다. 이는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만약 내가 살아있는 물고기를 물 밖으로 잡아내어, 은쟁반에 담고, 꽃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가지고 가서 아름다운 하프가락이 울려 퍼지는 곳에 둔다고 해도 그 물고기는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물고기 본래의 생활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주어진 가치를 인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는 영적인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지할 능력도 없고, 거룩한 아름다운 가운데 예배할 능력도 없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귀머거리나 벙어리가 오라토리오(종교음악의 일종)을 즐기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천국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앞 못 보는 봉사를 미술관에 데려가는 것과 같다.
영적인 나라를 영적인 본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우주적인 법칙에 따른 것이다. 음악의 가치를 인식하고 또 음악을 창작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한 소년을 유능한 음악 교사의 손에 부탁했다고 하자. 몇 년 동안 소년은 유능한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음악이론을 공부했고, 화성법에 정통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루에 수많은 시간들을 정기적으로 연습하는데 쏟았다.
수년이 지난 후, 그는 음악가가 되었을까/ 그 여부는 오로지 한 가지 요소, 그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음악가는 타고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가는 기계적인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부적 재능의 결과이다. 미술적 재능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미술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수학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수학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음악성이 있어야 하고, 예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예술가적 영혼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경건하고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거듭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은 3장7절에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을 순응하는 요구조건이다.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진정 선하고 순결한 여인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은 그녀에게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그녀가 현재 영적인 기도집회를 즐겁게 함께 하지 못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천국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녀는 사교적인 만남이나, 춤, 영화 관람을 더 좋아하고 있는데, 만약 그러한 것들을 못하게 된다면 불만족하게 되고, 혹 경건한 무리의 사람들과 억지로 시간을 보내게 한다면 그녀는 비참해질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거듭남이 필요하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타락한 피조물이며,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부패했다. 인간의 마음은 속임으로 가득하며 극도로 악하여졌고, 인간의 지성은 감각을 잃고 어두워졌으며, 또한 인간의 생각은 다만 악할 뿐이다. 인간의 이성은 불합리하며, 인간의 감정은 왜곡되었고, 그 의지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없고, 죄와 사단에게 종노릇하고 있을 뿐이다!
진실로 인간의 상태는 절망적이며 비참하다. 그 안에 조금도 선한 것이 없기에 자기 스스로 개선할 수도 없고 또 개선될 수도 없다. 인간은 “힘이 없는 사람”(시88:4)과 같기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영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6:15)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이다. 이것은 나뭇잎 몇 개 정도가 시든 것이 아니라, 뿌리와 가지 등 나무 전체가 썩은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 있다. “근본적”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뿌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부정하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주 밑바닥부터 몸 안의 모든 조직까지 본질적으로 타락했고 구제불능으로 악하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다만 열매에 불과하다. 죄의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성이 있기에 죄를 짓는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성이 있기에 죄를 짓는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이기에 본성적으로 죄가 있다. 따라서 자연스런 결과로서 인간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위에 계신 권세자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재창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여기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명령적인 요구가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고 완전히 무력하지만, 큰 권능의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다.
네 번째로, 거듭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다.
거듭남을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육으로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다. 교육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단지 가르칠 뿐이다. 교육은 개발시킬 뿐이지, 없는 것을 있게 하지 못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들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상적인 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경우, 후에 다른 이의 양육에 의해서도 그 부분은 채워지지 않는다. 촉감을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훈련할 수는 있지만 그 훈련이 잃어진 시각을 되찾아 주지 못한다. 청각을 극도로 날카롭게 발달시킬 수는 있지만, 미각이나 후각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육신을 아무리 개량하거나 개혁을 한다 해도 영적인 본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최고 수준까지 교육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완전히 다른 상태로 발달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완전히 말과 같이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존재로 진화되거나, 짐승이 새와 같이 변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본성과 영성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생긴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이 육이요.” 육은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따라서 영적 본성은 영적 출생의 결과이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양육하거나 교화시킨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개선시키는 일이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다. 개선된다는 것은 사람의 습관과 관련된 것이지, 사람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 시계가 고장이 났다고 가정할 때, 손목을 바꿔 다른 쪽에 시계를 차거나 시계 겉면에 광택을 낸다고 해서 시계가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부에 있다. 죄인도 이와 같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거나, 좋지 않은 습관을 바로잡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격식을 차리고 행동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이다. 한 바리새인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11:39)
이것은 단지 겉만 개선시킨 사람의 모습이다. 아무리 많은 개선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33)
들판에서 잡초 더미를 뽑아서 나의 정원에 가져다 심었다고 가정해보자. 비료도 주고 물도 대주며 정성을 다해 손질했을지라도 잡초더미를 장미 덤불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새로운 환경이 인간의 죄성을 바꾸어 주지 않는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날 필요가 있다.
종교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한다. 찰스 스펄전은 말했다.
“인간이 여전히 죄로 인해 죽은 채로 종교에 깊숙이 안주하고 있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바리새인들도 성경을 읽었고, 자주 금식했으며 십일조를 드렸고 긴 기도를 드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교회 명부에 올릴 수는 있지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올릴 수는 없다. 종교적인 의무가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다. 즉 종교적인 의무를 다한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성경을 읽고 교회를 참석하고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에 의지해서, 반석되신 그리스도가 아닌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거듭남의 필요성은 전 인류에게 해당된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은 간음을 저지른 여인에게가 아니라, 십자가의 강도에게가 아니라, 바리새인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흠잡을 곳이 없던 니고데모에게 하셨다. 니고데모 또한 거듭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보고 놀라지 말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7)
당신은 머지않아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 당신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얼마나 엄청난 학식을 가졌으며, 또한 당신이 얼마나 인기와 명예를 누렸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과연 “거듭난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혹 고뇌하는 독자들 가운데 “어떻게 거듭날 수 있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지?”하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답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다.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명하는 것이로다.”(요5:39)
그렇다! 부지런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라. 왜냐하면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딤후3:15)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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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듭남과 성경 ..
하나님의 말씀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