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3때 연합고사 치른다고 '열공'하던 도서관입니다.
놀랍게도 34년 전 그 건물 그대로입니다. 강산은 변해도 시멘트 건물은 변하지 않는가봅니다.^^
제가 중학교를 다니던 1975년도엔 사진에 보이는 건물만 도서관으로 쓰였고
저 안 쪽은 교육청이었습니다만 언제인지 교육청은 이사를 가고 교육청 자리엔 전체가 도서관이 들어서 있더라고요.
중3 때부터 의성읍에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 저 도서관에 다녔습니다.
옛 출입구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봉해버렸더군요. 출입문은 없앴지만 입구 계단과 캐노피는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저 도서관에는 여름이면 천정에서 선풍기가 빙빙 돌아갔습니다.
날개가 세 개 달린 천천히 빙빙 도는 천정 형 선풍기 있죠? 바람이 세지 않아 어머니가 부쳐주는 부채처럼 시원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 도서관에는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고정으로 출입하던 학생은 의성종고 형들 몇과 제가 거의 전부였죠. 여학생은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선풍기 아래 '명당' 자리도 언제든지 쉽게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면학분위기도 꽤 괜찮았습니다. 주위가 산만하지 않아 본인이 하고자만하면 얼마든지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엔 졸음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세수를 하고 잠을 깨워 보건만 책만 펴들면 또 잠이 오고
잠시 엎드려 잠을 자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돼면 동중 동문 앞에 있던 가게에 가서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했습니다.
저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동아일보 신문을 처음 보게 됩니다. 당시 신문은 거의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중학생들이 쉽게 기사를 읽을 수가 없었지만 대학생들의 데모하는 기사가 조그맣게 실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자취집은 어떻게 얻다보니 우리 중학교 학생과장이시던 김윤섭 선생님 댁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얻은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얻었는데 처음에는 불편하거니 했지만 나중에는 참 잘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을 위시해서 사모님 그리고 가족들 모두가 한 식구처럼 대해줬습니다.
특히 후덕하신 사모님은 시골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맛있는 반찬도 많이 주셨습니다.
지난 설날 웃골재를 넘으며 옛 통학 길을 거슬렀다가 읍내의 옛 자취집을 들러보았는데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바로보이는 철 대문 집이 아니라 왼쪽 집입니다. 대문이 잠겨있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문틈으로 보니 집도 그대로였습니다.
당시 학생과장님의 큰 따님은 저와 동갑이었지만 의성여고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홉 살에 학교를 들어갔고 그녀는 일곱 살에 들어갔기 때문이죠.
동갑이라는 것도 늦게 알게 되었지만 저는 아직 발육이 늦어 어린 티를 못 벗고 있었고
그녀는 이미 키도160이 넘었고 튀어 나올 데는 쑥 튀어 나오고 들어갈 데는 쏙 들어간 성숙한 여자였습니다.
타이트하게 줄여 입은 교련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등교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참 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감생심 연정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누나 같은 존재였지 동년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거든요.
그녀는 저에게 말을 놓았지만 저는 깍듯이 말을 높였습니다.
같은 돼지띠 동갑이었지만 동갑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저를 동생(?)처럼 대했습니다. 성격도 활달했습니다.
수돗가에서 빨래를 할 때면 우리 방 방문을 열고 빨래거리를 내 달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워 우물쭈물하면 방에 들어와 모아둔 빨래거리를 들고 나갔습니다. 오래 입은 팬티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빨래와 저의 팬티가 같은 빨래 줄에 걸려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촌뜨기 시골 소년에게는 사춘기도 늦게 찾아왔습니다.
중3 가을로 접어들면서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에 아카데미 극장 주변을 맴돌게 됩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갔던 것은 아니고, 조금 야한 영화 포스터와 극장 앞에 걸린 야한 영화 스틸 사진을 보기 위해서죠.
그러나 방황은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이틴 영화 '여고 졸업반'이란 영화를 보면서 고교생활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그 영화의 주연은 임예진과 이정길 그리고 몇몇 남학생이 나오는데 임예진이 선생님인 이정길을 사랑하는 역으로 나옵니다.
마침 네이버 영화 정보를 검색하니 그 영화 스틸사진이 있네요. 임예진의 모습이 참 청순해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임예진은 눈 코 입 이마 어느 곳 하나 잘 생긴 데가 없지만 적재적소에 잘 배치된 절묘한 포지션으로 미인대열에 낀 경우입니다.
어느 한 부분을 고친다고 미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임예진의 얼굴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못생기면 못생긴 대로 조화를 잘 이뤄야 전체 얼굴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것을 성형을 꿈꾸는 여성들은 알아야겠습니다.
영화 내용 중에는 남녀 고등학생들이 팔당호수인지 어느 호수에서 보트놀이 하는 장면 나오는데 그 장면이 참 부러웠습니다.
예쁜 여고생과 저런 데이트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에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해 초겨울 저는 대구에 가서 연합고사를 치게 되고, 별로 기대는 안했지만 합격이 되었습니다.
남문시장 부근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배정 받아 입학을 하게 되면서 대구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후 학생과장님의 따님의 소식은 스물두 살 때인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습니다.
대구에서 한 공무원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사랑한 적도 없었고, 저는 이미 그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녀가 사춘기 소년이었던 저의 가슴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선생님은 나중에 실명을 하셔서 교직을 떠나 대구로 이사를 하셨다고 들었고 90년도인가 한번 사시는 곳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유복한 생활을 하시다가 궁핍하게 지내시는 것을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사모님께 "미애는 잘 살고 있나요?" 했더니 잘 산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께 조그만 걸 도와 드린 게 있는데
미애가 그걸 알고 언제 한번 밥을 사겠노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지만 그 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도 벌써 세월이 20년이 다 되어 가네요.
격하게 세월을 살다보니 둘러보아야 할 것을 잊고 산 게 많습니다.
선생님의 가족을 찾는 일도 그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언제 선생님의 큰 따님 미애도 한번 만나 그때 얻어먹지 못했던 밥을 얻어먹어야겠습니다.
만나면 분명히 절 보고 말을 놓을텐데 그땐 저도 당연히 말을 놓아야겠지요?
그러나 그게 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누나는 영원한 누나' 라고 우길텐데. 이런 젠장!^^
첫댓글 사랑하지 않았다지만 그게 사랑인가 봅니다.....먼 시간이 흘렀지만 선생님을 찾는 마음이 깊으시네요..토요일 퇴임하신 대학시절 선생님이 생각나네요....교수님으로 부르면 꾸지람을 하시고 선생님칭호를 고집하던 은사님....
선배님! 저도 저 건물이 익숙합니다.. 어쩌면 몸만 왔다갔다 했을지도 모르지만요..글속에 푹 빠졌다가 갑니다 찡한 그 무엇도 가져가봅니다...
아련한 추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 가시는 모습들이 부럽습니다. 이제 "이 한장의 사진(15)"를 기다리고 있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