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2월 21일 세종문화회관 4층 컨퍼런스 홀에서 한글학자들과 한글단체인사들이 모여 <광화문> 한글현판 유지를 위한 토론회에 발표된 조영환 대표의 글입니다. 더 구체적인 토론회 안내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을 놓고 정치적 해석들이 충돌하고 있다. 밥먹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는 정치학자 마리온 영(Marion Young)의 말이 실감난다. 광화문 현판의 세 글자는 이미 글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이 현판 글자의 다툼은 마치 박정희와 노무현의 충돌 혹은 자주파와 외세파의 충돌 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글자 석자가 국내정치에 있어서 한 세력의 운명, 그리고 국제정치에 있어서 한 민족과 문화의 운명을 가름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미셀 푸코의 글과 지식에 대한 전제처럼, 광화문 현판의 글자는 더 이상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담아내는 컨테이너 같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고 선언하였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본능과 상황에의 노예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서 자신의 세계들을 갖게 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유한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틸리히는 인간의 언어능력을 인간실존의 핵심요소로 보았다. 말과 글을 못 가진 개인과 집단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언어를 통찰하는 것은 틀림없이 정치적 혹은 경제적 역학관계를 통찰하는 것이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충돌을 반전학자로 알려진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가장 치열하게 관찰하여 자신의 의견을 언론에 꾸준히 발표하는 것은 결코 우연 같지 않다. 언어는 인간활동의 마지막 표현인지도 모른다.
한 민족의 언어는 한 민족의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역학관계의 마지막 표현인지도 모른다. 민족주의의 생성을 탐구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민족의식의 형성에 대량 인쇄를 촉진시킨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와 더불어 언어(글자)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평가한다. 같은 언어의 사용을 통하여 한 인간집단은 상상적인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여 민족을 형성한다고 그는 보았다. 지배세력의 권력언어(language-of-power)가 되는 것이 한 언어와 한 민족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앤더슨은 주장했다. 일례로 종교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가능케 만든 라틴어의 약화 후에, 영국에서의 영어와 프랑스에서의 불어는 민족적 혹은 국가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공동체의 권력언어로 등장하였다.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는 곧 어떤 민족과 종교와 국가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뜻했다.
<1780년이래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책을 쓴 홉스봄(E. J. Hobsbawm)은 언어(language)와 동족의식(ethnicity)을 민족국가 형성의 양대 핵심요소로 보았다. 민족 언어는 민족 국가의 형성조건이다. 동구 공산권의 몰락으로 민족단위로 국가들이 형성되고, 독일은 민족단위로 재통일되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재통일에 독일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의 경우처럼 언어의 동질성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의 연대성이 유지되는 경우에, 한 종족, 한 가족, 한 핏줄, 한 언어가 강조된다. 민족언어는 민족통합의 핵이다. 실재로 언어가 실용적 문제일 경우엔 사람들은 더 많은 외국어를 습득하여 더 많은 소통의 도구를 장만해야 하지만, 언어가 한 민족문화나 국가생존의 핵심사안으로 등장하면 언어의 문제는 곧 정치적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인간정신의 가장 고급스러운 활동을 담아내는 언어에 관련된 이슈는 곧 그 언어사용자의 생존권에 관한 이슈가 될 수 있다. 한글 말살정책은 곧 한민족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한글 수호활동은 곧 한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공동체의 언어와 문자의 문제는 그 공동체의 핵심적인 정치 문제이다. 오늘날 광화문 한글현판의 문제도 일상적 언어의 실용성보다는 석자의 글에 얽힌 국내외의 이념적 변수가 깔린 정치논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박정희의 정치이념과 노정권의 정치이념이 광화문 간판을 두고 충돌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글과 말 한 토막이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언어와 글은 민감한 것이다. 만약 식민지 통치국가가 광화문의 한글현판을 철거하라고 했다면, 아마 전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한글은 민족혼과 같은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언어가 민족성을 가름하는 가장 핵심적 지침이라는 한 독일정치인의 말은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언어와 동족의식이 민족형성의 핵이라는 홉스봄의 전제가 가장 독하게 적용되는 경우는 바로 한국일 것이다.
세계화시대에 한글 수호와 사랑의 노력은 자칫 폐쇄적인 민족주의 수구로 오인되어 비난당하는 수가 있다. 이념과 종교와 같은 거대배후이론(grand meta-theory)이 서서히 해체되는 후기현대시대에, 민족주의가 새로운 국가생성의 근거가 되는 현상과 동시에 세계화의 이름으로 민족주의를 매도하는 엉터리 진보주의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좀 배웠다는 먹물들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마치 악의 근원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매도현상은 약소국가의 민족주의가 곧 약소국민들의 인권수호라는 또 다른 세계화시대의 지식을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유태민족주의를 제외한 민족주의는 모두 악의 화신으로 말살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유태주의(semitism)만 용납되고, 그 이외의 민족주의는 사라져야할 악으로 공격당한다.
근세에 형성된 다른 민족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언어는 정치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다. 세계화의 구호로 한민족과 한국을 지탱해온 비정치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민족주의마저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는 것은 맹목적 사대주의자들의 무지한 주장으로 보인다. 한국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그런 통치이념의 망상에 근거한 200년 전에 탄생된 근대 민족주의 국가가 아니다. 한국이라는 민족국가는 이념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근대국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길쭉하게 나온 반도에 정착하여 살면서 형성된 정서(sentiment)와 문화(culture)의 동질성에 기반을 둔 민족국가이다. 한민족은 같은 피와 같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국가이다. 한국어는 한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세계화시대에도 자연스럽게 지켜져야 한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수가 세계화와 통신의 발달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100년 후 지금의 절반 정도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비관적인 전문가들은 100년 내에 전체 언어의 90%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인구가 500만-1000만 명으로 추정되던 1만년 전 세계에서 사용되던 언어는 12,000개였지만, 60억 인구가 살고 있는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절반 수준인 6800개라고 전했다. 이중 400개 언어는 단지 노인 계층에서만 사용돼 소멸 위기에 처해 있으며, 오늘날 2주에 한 개꼴로 언어가 소멸된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언어사용 인구가 사라지면서 언어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형식이었다면, 요즘은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배적 언어를 채택하면서 언어 소멸을 앞당기고 있다. 이에 따라 1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지배적인 11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계인구의 절반을 넘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그럼 한국어의 운명은 어떠한가? 각종 회사의 이름들이 소리만 있고 뜻이 없는 영문약자들로 바뀌었다. 한국의 상가 간판들은 모두 영어 투성이들이다. 영어 간판은 세련되고 한글 간판은 후진 것으로 공공연히 취급된다. 그런데 한국의 기업이나 금융이 외국자본에 의해 약탈당할 때에, 한국기업들은 영어이니셜로 된 이름들로 바뀌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KT&G가 되었고, 통신공사는 KT로 바뀌는 등 영자조합으로 된 회사명들로 바뀌었다. 세계화는 곧 한국에서 국어말살이었다.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시장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히고, 제주도를 영어공용지대로 삼자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선진적으로 대접받는다. 영어는 원어이며, 유치원부터 영어는 국어에 우대되며, 대학시절은 취직을 위한 토플로 마치고, 직장에서 영어를 못하면 추방된다. 심지어 민족사관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자랑거리로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한글은 화장실 글이고, 영어는 사장실의 글로 취급당한다.
이러한 한글무시-영어우대 현상은 세계지배세력의 공작이 한국에서 상당하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달러로써 물질세계를 통치하고 영어로써 정신영역을 통치하려는 영미제국의 세계지배전략은, 달러경제의 부도와 영미제국의 약화로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겠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상당히 성공하였다. 물론 한글을 사랑한다고 영어나 외국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영미 중심의 세계화가 이렇게 심하게 진행된 상황에서 영어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가 지적, 도덕적, 사회적 우등의식의 표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어를 모르는 것이 마치 도덕적 결함인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지적 열등감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통치의 언어로 지정된 영어는 영미 중심의 세계시장에서 분명히 편리한 글이지만, 한글의 편리함과 우수함은 아주 명백한 것이다.
세계화의 진행 속도와 추세를 살펴보면 앞으로 한 개의 언어가 세계통치의 지배언어(dominant language)가 될 확률은 높다. 유엔을 뉴욕에 세우고 영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지배세력의 정확한 전략의 결과이다. 프랑스에서 외국어가 중시되지 않다고 하듯이, 미국의 대학들에서 의외로 외국어 시험이 아주 약하고 영어 중심의 공부를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여러 민족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영어중시정책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전 세계의 금융과 군사를 장악한 영미제국의 통치세력은 영어의 전세계공용화 혹은 세계지배언어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와중에 한국어는 영어의 위력에 압살 당하여 생존하기 힘들 것이다.
동시에 중국의 강대국화와 더불어 한문교육은 강화되고 있다. 한문은 한글의 의미를 채우는 글로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비록 컴퓨터시대에 아주 비능률적인 언어로 취급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한자는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아주 훌륭한 언어이다. 소리를 글로 환산하여 의미를 풀어나가는 소리글자에 비해 한자는 짧은 말로 의미전달을 깊이 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수많은 노인식자들이 한자교육 부활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한자 없이 유교문화권에서 불편을 겪을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가 급증하면서,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심한 불편을 겪을 것이다.
영어와 한문의 이러한 팽창하는 영향력의 틈새에서 한글의 입지는 어떠한가? 한글의 운명은 민주세력과 독재세력의 갈등에 끼일 상황이 아니다. 한글의 운명은 국내정치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국제적 변수들을 한국어의 운명에 잘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 광화문 현판사건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정치인이나 어용학자들의 정책판단은, 영미제국의 세계지배와 중국제국의 부활을 전제로 한 민족생존을 고려하지 못하고, 아직도 군사독재자와 투쟁하는 민주투사의 좁은 대결의식에 포로 되어있다. 경제개발을 견인한 재벌에 대한 적개심에 눈먼 민주화세력이 맹목적 구조조정으로 한국의 금융과 경제를 외국자본에 다 넘겨주었듯이, 민족자주에 나름대로 고민한 박정희에 대한 적개심에 눈먼 민주정권이 한국문화를 모두 외세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한글날이나 개천절이 민주화 세력에 의해서 말살된 것은 괴상한 역설이다.
한국의 모든 정책은 모두 국내정치의 역동적 변수에 국한되면 안 된다. 요즘 목도하는 북한 핵무기 문제에서 보듯이, 외세의 지배를 받고있는 한국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정책이나 사건은 모두 국외적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나 중국은 제국의 심성을 가진 나라이다. 제국의 지배자들이 갖는 도덕적 심성은 식민지 백성들이 갖는 도덕적 심성과 아주 다르다. 제국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제국의 심보를 가졌다. 미국과 중국의 국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침묵 내지는 동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의 지배자들이 국민들의 눈치가 아니라 제국의 지배자의 눈치를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당연하다. 현 참여정권은 한국민족의 인권과 인류문명의 풍요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한글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지 못한 정권은 독재의 이름으로 민족의 글과 말을 지킨 정권보다 궁극적으로 민족의 안녕에 더 큰 피해를 입힌 결과를 낳는다. 어느 식민지 지배국이든 항상 식민지 백성들의 말과 글을 빼앗는다. 능률, 민주, 과거청산, 역사조작 등 어떤 명분으로도 한글의 보편화에 역행하는 정책과 결정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최근 노무현 정권이 영화나 방송 등 대중매체들을 동원하여 박정희 때리기에 광적으로 몰두하는데, 이러한 역사바로세우기는 쉽게 역사조작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직도 죽은 박정희와 대결하는 현정권의 전쟁은 사이비 민주화세력의 저주받은 망상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지우기를 하면 할수록, 박정희 향수는 더 심해지고 그의 단점은 가려질 것이다. 만약 현 정권이 박정희 글씨라서 광화문 한글현판을 철거한다면, 북한에 4만개의 김일성 우상화 글발을 바위에 새긴 전체주의국가 북한에 어떠한 원조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무시하는 만큼,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무시한다. 한글은 한국인의 문화적 능력의 상징이기에, 한글을 존중하는 만큼 한국인들이 존중받는다. 자칫 세계화를 제국화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제국의 문화에 흡수되는 것을 세계화로 착각하는 배운 무식자들이 너무 많다. 세계화는 다양성을 전제로 하여야 인류문명이 더 풍부해진다. 한글을 잘 가다듬어 전파하는 것은 인류공영에 헌신하는 것이다. 세계화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역시 가장 세계적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화는 약소민족의 언어를 말살하는 전체주의적 추세가 아니라, 약소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살리는 풍성한 지구촌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영어와 한문의 압력을 극복하고 한글이 살아남아야 세계화의 파고를 극복한 한민족이 될 것이다.
광화문의 한글 석자 현판에 국내외의 권력과 문화의 충돌이 상징적으로 수렴되어 있다. 박정희가 쓴 이 상징적 현판은 독재와 민주를 넘어선 한글로 된 현판이다. 광화문 현판은 제국의 언어인 한문이나 영어로 바뀌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 여행객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 가장 많이 찍힐지도 모르는 광화문의 현판을 한글로 남겨두는 것도 풍요한 세계를 향한 한 운동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