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사는 곳은’
가을은 다채롭게 삶을 끝내고 여러 가지 흔적은 남겨둔 채 떠나가 버렸다. 그 흔적의 하나인 낙엽이 마당 구석구석에 쌓여져서 새 계절의 상징이기도 한 눈(雪)에 엎드려 있다. 계절에서 계절로 바뀌는 그 사이사이에 나는 날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든가.
오롯한 몃 시간이 가지고 싶어 나는 속으로 무던히 애를 썼으나 하루의 그중 빛나는 시간들은 두루 찢겨져 나가서 없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때로는 실꾸리를 연상하며 인색하게 시간을 조금씩 풀어내서 서둘러 장을 보고 약속 시간에 맞추고 정담을 나누고 우리집 멍멍이의 등을 쓸어주는 등 시간을 쓰다보면 나이테가 희희거리며 나를 맴돌려서 어지럽게 만들어 버린다. 흐르는 시간을 생각하며 전화를 주고 전화를 받고 차를 거푸 마시고 나면 척추가 시위를 시작하는 것이다.‘참아 보시지’ 자신을 타이르며 기왕지사 풀기로 되어 있는 시간의 꾸리라고 녹이 슬어버린 컴퓨터 겪인 스스로의 엄살을 밀어 붙이고 그 사이 퍽 멀리까지 가버린 시침의 오후를 애석하게 보고 있노라면 우리집의 갖가지 사물들이 나에게 움직여 줄 것을 통보하고 더러는 협박도 해온다. 전구는 텅스텐 줄을 끊어버리고 수도꼭지는 멎기를 거부해서 계속 물을 토해낸다.
우리집 일을 도와주는 소녀는 소녀대로 크리스마스가 좋아 눈을 반짝대며 나에게 산타크로스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연탄집이라 쓰레기도 진 것, 마른 것 꼭꼭 두 번 씩이나 쳐가야 하고 우리집 우편물 속에는 책이 끼어 있어서 우체부 아저씨도 팔이 아플거예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 말해주는 그럴 때의 소녀는 자신이 바로 산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가 감화케 한 그녀는 우리의 선량한 이웃이 아닌가.
그렇게 저렇게 풀려나간 시간을 다시 모아 볼 양으로 신문을 펴보고 신간을 뒤적이다보면 시간은 새날 두 세 시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아침의 늦잠을 잘 명분은 충분히 선다.
느릿느릿 순위대로 아침을 생기면서도 나와 나만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또다시 챙겨본다. 어설프게도 그때 쯤이면 무슨 이름모를 새의 지저김같이 신체의 여러 부위에 장해가 온다. 신경통 디스크 증세를 비롯해서 열과 오한과 등이 무당춤을 추어댄다.
새날은 전화로 시작되어서 전화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만한 일들에도 시간은 멋대로 풀려나가서 ’꾸리‘에는 어떠한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 몇 십 분 혹은 한 두 시간의 자잘한 일들로 인해 즐겁고 건강한 나의 하루는 싱겁게 가버림으로써 그러하다.
불편 없는 행복이란 도대체 어느쯤에서 살고 있을까. 회의가 이를 드러내고 물어온다.
단지 나와 내가 만나는 그 시간만이 그중 참되고 그중 불편이 없는, 그래서 진실되고 행복을 누리게 하는 시간이며 그 장소가 될까. 그러나 나와 내가 만나는 시간에는 행복은 없었고, 다만 시간이 지나치게 제멋대로 빨리 가버려서 나를 당황케 하고 피로를 겹치게 할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나와 내가 헤어지고 났을 때 적어도 그 시간 안에서는 잠되고 진실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같이 그렇게 헤아려지곤 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행복이라는 것이을까.
그 당시에는 아직 비닐 봉지가 시장에 나오지 않아서였는지 어느날 어느 지게꾼 아저씨의 손에는 새끼줄이 단단히 묶인 동태 한 마리가 시계추 모양 흔들대고 있었다. 나는 빙허의 ’운수 좋은 날‘을 상기했다. 그러한 나의 눈 앞에는 동태찌개를 중심으로 동그란 식탁을 둘러싼 그의 가족들의 겸허한 모습이 한 폭의 평화로운 그림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그 지게꾼 아저씨의 저녁 식탁 광경이었다.
순간 행복이란 그렇게 겸허하고 가난한 식탁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머물러주는 것이 아닐까. 그 외에도 때때로 그때의 식탁을 나는 시기하곤 했다. 하지만 행복에도 수없이 많은 유형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가족들하고 수저를 부딪쳐 가며 가난은 다음날의 일로 밀쳐두고 있는 듯한, 마음 속에 살고 있는 괴짜 선심인지도 모른다.
그 행복을 나는 올 가을에 낙엽 속에서 찾아냈다. 올해 가을에도 다른 해같이 낙엽이 될 은행잎들로 뜰은 황금색 어우른 바다였다. 어렸을 적 시골집의 즐겁고 신명나던 놀이터였던 보리짚더미를 연상케 하는 그 은행잎들은 평화롧고 온화한 햇빛으로 빛나고 있엇다. 그것은 은총이다. 그러나 올해 같이 그렇도록 황홀한 은총은 일찍이 없엇다.
나이 탓일까. 세월 모양 그 속에 슬프지만은 않은 윤회의 생명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허허롭게 좋았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은 나와 내가 만나는 시긴이 거기 있어서도 아니였다. 어쩌면 사람마다 자기와의 오롯한 해후를 소망으로 큼직한 연을 날려 볼 수 있는 하늘이 높고 시원하게 거기 있어서가 아니였을까.
’우리는 비록 낙엽이기는 하나 두껍고 튼튼하답니다.‘은행잎들은 독립기념관의 벽돌의 두께와 그 강도를 걱정하며 밝아올 서울의 가로등이 보고싶노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아름으로 아름으로 나는 그것들을 껴안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손소희 (1917 – 1987) 소설가이다. 함북 경성 출생이다. 한국외국어대학 졸업
소설집 ’갈마귀 소리‘ 등 다수. 남편은 소설가 김돌리이다.
여러 문학상을 많이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