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없던 루터에서 관심 가는 루터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밖에서도 루터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페북이나 SNS에는 온통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광고들로 도배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종교개혁500주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혁을 말하면서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해결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닫힌 것은 아닐까. 아무튼 별로 관심 없었다. 루터도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최주훈 목사가 쓴 『루터의 재발견』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루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 했다. 기존에 알던 루터는 그저 이름뿐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의 제목처럼 『루터의 재발견』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조금씩 루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광대한 루터를 직접 알아가는 것은 한눈에 우주를 보고 우주를 이해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주훈이라는 루터교 목사의 관점으로 먼저 루터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이 책은 나에게 관심 없던 루터에서 관심 가는 루터가 되도록 도와 주었다.
*루터라는 변곡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위클리프나, 얀 후스와 ....같은 역사속에 묻혀버린 종교개혁자들의 희생이 차곡히 쌓여 변혁의 임계점에 이룰 수 있었던 이유와 같다. 저들이 이단으로 몰려 사형에 이르기까지 개혁의 사과나무를 심지 않았다면 과연 루터가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결과 500년전 루터 자신이 종교개혁의 변곡점이었다. 500년 후 지금 종교개혁의 변곡점은 누가 만들 것인가! 사실 누군가가 아닌 나로 부터 시작 돼야 하지만 자신없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는 종교개혁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고 우리를 위해 나를 희생해야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에 대한 권위
"개신교 정신은 권위(종교적 기득권자들에 대한)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바꾸는 것이 종교개혁 정신이다." 51쪽
이 한 문장에 종교개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에 대한 권위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루터교 목사인 저자는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그런 것일까? 한국사회는 권위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권위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의 방향을 잃게 하는 권위주위는 사라져야 한다.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특권을 누리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때 종교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개혁은 기존체계와 사상과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개혁은 시작된다. 종교개혁이 그랬다. 카톨릭 사제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오염된 권위주위를 무너뜨리고 다시 말씀위에서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믿음에 대한 권위를 수호한다고 하지만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어느 순간 내가 권위에 대한 믿음을 숭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은 단박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나가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말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대한 권위’를 위해 끝없이 각성해야 하는 이유다.
*고통이 고통인줄 알았던 루터를 발견하다
예레미야시대에 가장 큰 고통은 백성들이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못한 것이다. 아픔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가장 긴박한 일은 “너희가 아프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아는 단 한사람 예레미야를 보내신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 시대에 문제를 제기하고 모두가 죄악 흐름에 순응해 몸을 맡길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한사람 예레미야를 불러 무너진 정의와 무너진 성전에서 새로운 약속, 새로운 성전을 선포하게 하셨다. 500년전 루터가 그랬다. 그는 고통을 고통으로 알았던 개혁자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붙들고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루터를 들어 개혁의 역사의 초석을 다지게 하신 것이다. 나는 『루터의 재발견』에서 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린 이시대의 교회를 향해 “너희가 아프다”고 외치는 최주훈 목사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루터는 아는데 너는 누구냐
종교개혁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가 붙들었던 성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루터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루터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독자를 각성한다. 다만 우리는 말씀 앞에 울줄 알고 말씀 앞에서 아파할 줄 아는 백성이 되도록 루터가 붙들었던 성경을 우리 손과 눈에서 해방시키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루터는 기억하지만 루터가 그처럼 갈망하던 예수그리스도는 망각하고 있는 우리 세대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것이 종교개혁의 형식이 아닌 그 정신이라는 것, 더 정확하게 그 정신이 가리키는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임을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정신이 실종된채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에게 어쩌면 주님이 말하시지 않을까? “루터는 아는데 너는 누구냐!”
*기념식이 많다고 그 정신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500주년 기념식이 우후죽순 많아진다고 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돌을 던지며 개혁을 외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교회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는 어떠한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내 안에 낡은 구습과 오랫동안 숙성되어온 욕망의 힘에 어떻게 저항 할 것인지,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불통을 어떻게 소통으로 개혁할 것인지, 내가 속한 공동체와 함께 지금 세상을 향한 비난의 손가락을 안으로 돌려 개혁을 위한 기도의 손이 되게 할 것인지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이 유명한말은 초등학생도 다 알 정도다. 이 유명한 말에서 개혁의 정신을 본다. 진정한 개혁은 지금이 아닌 미래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지금 나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루터가 한말인지 그가 누구에게 들었던 말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내가 맛볼 수 없는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은 나무를 뽑고 다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희생과 용기에서 개혁의 정신을 본다.
나는 『루터의 재발견』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책을 읽는 동안 조금 더 관심 가는 루터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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