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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 관점에서 대안교육 보기
하늘소
내가 그리고 있는 기린은 네가 그리고 있는 기린과는 다들 수밖에 없다 엉터리 기린 그림이라고 너는 말하지만 그래 나는 기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렸다 너의 기린이 점점 형체를 갖추면서 나무의 잎사귀와 열매를 따먹으며 너의 붓끝에 사로잡히는 동안에도 나의 기린은 점점 자라 화폭을 뚫고 이젤을 넘어뜨리곤 시멘트 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구광본의 - 기린 - |
평생교육과 대안교육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학교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곳이다. 어린이집에도 교육소위가 있다. 그렇다면 어린이집도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뿐이랴. 군대에서도 교육시간이 있고 심지어 조폭의 세계에도 교육은 있다. 선배가 버릇 나쁜 후배를 겁주면서 하는 말, 예를 들어 “너 교육 좀 받아야 겠다”라는 말 속에도 교육이 있다. 형식이야 어찌 하였든 간에 무언가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이점에서 교육은 우리 삶 속에 다양한 형식으로 편재해 있는 보편적인 무엇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진짜”교육과 “가짜”교육을 구분하고자 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흔히 쓰는 “교육적”이란 말이 그런 우리의 관심을 투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모종의 규범성 전제하고 있는 가치 지향적인 말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활동이라고 모두 교육적 활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반적 행위로서의 ‘교육’은 가치 지향적인 개념인 ‘교육적 활동’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우리에게 교육이라는 화두가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육은 인간 본연의 행위로서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가치(또는 관심)를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다.
평생교육은 특정한 가치가 교육일반을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대개의 평생교육론자들의 공격대상은 근대주의적 학교이다. 학교는 특정 가치를 지향한다. 학교의 교육은 특정 대상(아동 및 청소년)을 상대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현실 속에서 교육의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 국가의 교육 예산의 대부분이 학교에 집중되어 있고 모든 정책이 학교의 울타리 안에 집중되어 있다. 학교는 교육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평생교육론자들은 이러한 학교의 독선과 독주를 깨기 위한 새로운 교육 원리를 내세우고자 한다. 이점에서 평생교육은 태생적으로 학교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이념적이고 가치지향적인 개념이다.
대안교육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평생교육의 출발과 유사하다.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이 있지만 이때의 대안이란 결국 학교체제, 그리고 이 체제가 내포하는 교육 가치들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평생교육의 공격은 학교 외곽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사회교육(또는 성인교육)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안교육의 공격은 학령기 아동․청소년들에 대한 다양한 교육 실험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요컨대 평생교육과 대안교육은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은 유사하되 역사적 뿌리는 다르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평생교육과 대안교육은 무슨 관계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문일 수 있다. 사실 서로 다른 뿌리를 두고 있는 두 개념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평생교육 영역에서 대안교육을 의미 있는 학습의 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대안교육에서 평생교육의 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양 개념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암중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개념의 관계를 이 자리에서 따져보는 일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평생교육 연구자로서 대안교육에 대한 작은 소견을 밝히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대안교육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 자체가 매우 두려운 일이다. 단지, 이 짧은 소견이 대안교육을 실천하고자하는 여러분들의 상상력에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평생교육 : 역사와 쟁점
평생교육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60년대 후반 유네스코의 좌파적 성인교육학자들을 중심으로 평생교육 이념이 제창된 것이 그 역사의 시작이다. 이들의 관심은 주로 제 3세계 성인 학습자들에게 맞춰져 있었다. 당시 (오늘날도 그렇지만) 제 3세계 대다수 민중들은 빈곤 상태에 있었고 제대로 된 기초교육(3Rs)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학교를 갈 수 없거나 학교 갈 나이가 지났기에 제대로 된 교육적 지원을 받지 못한 터였다. 저학력과 빈곤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던 이들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침묵의 문화 속에서 이들을 깨울 수 있는 힘을 ‘교육’이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유네스코 초기 평생교육론자들이 ‘교육=학교교육’이라는 근대교육 패러다임을 넘어설 수 있는 개념으로 ‘평생교육’라는 말을 창안해 낸 것이다.
학교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초기 평생교육론자들의 주장은 근대국가의 교육이념에 비추어봤을 때 굉장히 과격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쥐고 있는 학습의 주도권을 학습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학습자들의 삶보다는 자본주의적 국가의 필요에 가깝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격을 넓혀 놓는 곳이라면 특정 나이,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이 교육의 전부라는 근대주의적 편견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학교의 빈자리를 무엇이 대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분분하다(사실 논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권력투쟁이다). 1970년대 이후 ‘순환교육’이라는 말을 꺼냈다가, 평생교육의 집을 침범하여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OECD의 평생학습론은 그 중심에 ‘자본’을 놓자고 한다. 끊임없는 학습에 대한 강조를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따른 고용 불안정을 보완하려고 한다. 한편, 영국식 평생교육을 꿈꾸는 우리나라의 국가체제론자들은 평생교육을 전 생애에 걸친 ‘학교화(schooling)’로 이해함으로써 그 중심에 ‘국가’를 놓고 국민들의 학습을 통째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초기 유네스코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그러나 소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은 학습자를 그 중심에 놓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학습사회를 꿈꾸기도 한다. 평생교육 담론 영역도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쟁송지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점에서 평생교육 또한 절대선일 수 없다.
평생교육의 기본 원리 : 학습자의 삶에 주목하라
현실 속에 평생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우려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평생교육의 본래적 관심, 즉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교육 자원을 특정 연령대와 특정 공간에 집중시키는 폐쇄적 학교교육시스템을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고자 했던 초기 평생교육론자들의 시도가 자본주의 성장으로 좌절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교육의 기본 원리를 되짚어 보는 일은 중요하다. 평생교육은 우리가 교육, 특히 학교교육에 던졌던 많은 의문들에 대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해답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교육론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교육의 원칙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교수(teaching)보다 학습(learning)이 보다 본래적이다. 따라서 교육의 중심에는 학습과 학습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아동중심 교육관의 극복).
□ 인간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학습에 대한 지원은 전 생애에 걸쳐 그리고 생애 전반에 걸쳐 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연속적이어야 한다.
□ 학습은 천부적 인권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지역사회는 국민의 학습을 지원할 거역할 수 없는 의무를 갖는다.
□ 학습은 자발적 활동이다. 학습을 강제하고 통제한다고 해서 그대로 학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 학습은 삶과 통합적이다. 삶과 괴리된 학습, 노동과 괴리된 학습, 즉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은 지양되어야 한다.
□ 교사와 학교의 역할은 학습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학습자로 재규정하는 일이다.
□ 교실, 학교, 지역사회, 국가는 학습자의 학습을 지원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 되어야 한다. 학습조직, 학습공동체, 학습사회의 모델이 여기로부터 도출된다.
이와 같은 원칙들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것은 국가나 자본의 관심이 아니라 학습자의 삶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습자의 눈으로 교육을 재구성할 때 그 풍경은 현재의 학교와는 다르게 펼쳐질 것이다.
대안교육, 평생교육적으로 상상해 보기
평생교육은 제도적인 의미에서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조직적인 교육활동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대안교육은 평생교육의 한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안교육에서의 교육과정이 넓은 의미에서의 학교교육과정에 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교육은 평생교육 범주보다는 학교교육 범주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당장 우리나라 대안교육 정책을 교육부의 평생학습정책과가 아니라 학교교육을 주로 챙기는 교육복지과에서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이 점에서 제도적인 의미의 교육 영역으로서 평생교육과 대안교육의 관계를 따져본다면 “전혀 관계없다”라는 말이 옳다. 하지만 평생교육의 주된 이론적 원칙들은 대안교육의 이념과 실천에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뿌리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에 있어서는 공유할 수 있는 점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평생교육의 주된 이론적 원칙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안교육의 형상들을 상상해 보도록 할 것이다.
□ 어떤 상상을 해볼까? 학습의 해방구 - 학습꼬뮌?
평생교육은 생애전반, 전 생애의 학습을 포괄한다. 이는 한 인간의 학습생활이 단절적이거나 분절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터한다. 따라서 배움의 일상 자체가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통합성을 지향해야 한다.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생애단계와 삶의 장면을 구획하고 획일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진정한 학교에 대한 ‘대안’은 이러한 성장의 연속성과 통합성을 고려하기 힘든 학교의 벽을 넘어서는 일이자 생애 전반과 생애 전반을 포괄할 수 있는 모델을 고민해 보는 일이다.
학습자를 중심에 놓고 학습자의 생애전반과 전생을 포괄하는 교육모델을 상상해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민해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년구분의 방식, 학습 내용, 교사의 자격, 공간, 운영 방식 등등 모든 면에서 이러한 원칙 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안교육의 장을 일종의 학습꼬뮌(learning commune)으로 상상해 본다. 현실의 벽 속에서 좌절을 겪었거나 또는 왜곡되었던 배움의 열정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공간, 그 열정으로 교육적 관계를 끊임없이 맺어가고 확장시키는 공간, 그래서 더불어 성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안교육의 모든 구성원들이 철저히 공동체적 학습자일 필요가 있다.
□ 무엇을 배울까?
평생교육이 학교교육과 다른 점은 학습목표가 아니라 학습자 요구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먼저 그 요구(need)를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학습자가 인지한 요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요구도 있다. 국가적 요구, 사회적 요구, 지역적 요구도 있다. 부모의 요구도 있고 교사의 요구도 있다. 아이들의 요구가 물론 최우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단 각각의 요구를 펼쳐 놓아보자. 그리고 그 요구의 우선순위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실현가능성을 고려하여 대안교육을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들을 간추려보자.
이 때 가르칠 내용을 기존 교과서가 의존하고 있는 학문체계에서 빌려올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일 수 있기에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경험세계들을 과감히 학습의 장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의 세계일 수도 있고 예술의 세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여가(놀이)의 세계일 수도 있고 학문의 세계일 수도 있다. 어떠한 삶을 학습의 장으로 끌어오는가는 구성원들이 결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말처럼 단순한 문제도 아니다.
□ 누가 가르칠까?
평생교육적 상황을 상상하는 일은 가르치는 행위 보다 배우는 행위를 가르치는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을 중심에 놓는 일이다. 그리고 학습생활을 삶의 중심에 놓고 일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 때 배우는 행위자로서의 학습자는 굳이 아이들로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행위자를 굳이 교사로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 실상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인간 본연의 활동이며 학교를 넘어선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본연의 활동이 살아나도록 하는 교육일 것이다.
의미 있는 학습에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 보다도 그 사람이 ‘교사로서의 자질’과 ‘내용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즉, 교사의 자격을 국가가 인증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인정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 또는 직업으로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구분될 필요는 없다. 가장 좋은 풍경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모습이다. 교수자와 학습자가 서로를 넘나드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볼 수 있다. 학부모가 교사가 될 수도 있고 동료 학생이 교사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나 풀빵 장사 아줌마도 교사가 될 수도 있다. 교수자가 없는 풍경도 상상해 볼 수 있다. 학습에 꼭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 어디서 배울까?
가르치는 행위를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그 장은 가르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꺼내 보자. 아이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교실을 만들고, 밖에서도 감독 할 수 있도록 문에 작은 창을 내고, 교사가 잘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교단을 만들고, 한 눈 파는 거 감시 잘 할 수 있도록 책상을 일렬로 세워 앉히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교문과 담장을 쌓고 등등.
이러한 학습 공간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벗어나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학습 공간을 구성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학습공간을 교실이나 학교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유명한 탈학교론자인 일리치는 일종의 네트워크형 학교를 꿈꿨다. 한 지역 내의 다양한 학습의 장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내 학습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을 전체가 하나의 학교가 될 수 있다. 마을에 있는 각 교육자원을 연계하고 수업내용에 맞게 묶어 낸다면 마을 하나의 교실이자 학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을의 역량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단지 교육자원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가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교육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지 않는 한 삶의 터전과 살가운 거리에서 학습을 하기란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까?
학습조직이라는 말이 있다. 학습을 위해 모인 모임을 말하기도 하지만 조직이 학습의 원리에 따라 작동할 때 그것을 학습조직이라고 한다. 학습공동체, 학습사회, 학습생태계라는 말도 학습의 원리를 핵심 엔진으로 갖는 공동체, 사회, 또는 생태계를 그렇게 부른다. 대개의 조직과 사회는 힘의 원리, 경제의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직 또는 사회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가 있다.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조직 또는 사회에는 부자와 빈자가 있다. 학습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직 또는 사회에서는 배우고 성장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만약 개인은 성장하는 데 조직은 죽는다면 학습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조직이 아니다. 반대로 조직만 살고 개인의 죽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교육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대안교육은 학습조직이자 학습공동체가 될 필요가 있다. 아이들만 잘 자란다고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부모들의 만족도만 높아진다고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도 교사로서의 자기 성장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소진 한다’고 느낀다면 그것 또한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만 번성하고 지역사회가 죽어간다면 그것도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성장 - 공동체의 성장 - 지역의 성장에 대한 고민은 대안교육이 해야 할 숙명 같은 것이다.
□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작은 모임이 만들어서 학습하고 조직을 만들고 대안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 과정 자체가 일종의 집단 성장의 과정이자 공동체학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과정을 교육적인 상황으로 만들어가는 일 또한 중요하다.
공동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의 형성이다. 공감은 이론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부딪혀 얻어지는 것이다. 조직적 집단행동과 집단학습은 머리가 열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딪혀 서로의 감성과 사상이 공명하기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허준, 2006).
대안교육의 장을 만들어 가는 일은 ‘이론-실천-관계’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론에 대한 학습은 열린 마음을 정당화하고 실천을 강화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하는 지적 토대가 된다. 실천은 이론들을 실험해 보고 새로운 학습의 필요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관계는 이론에 대한 학습과 실천을 통한 학습이 분화되지 않고 ‘우리’의 성과로 남을 수 있는 구심력을 제공한다. 이론이 없는 학습은 실천과 관계를 공허하게 하고 실천이 없는 학습은 그 조직을 학습친목모임으로 전락시킨다. 관계가 없는 학습은 애써 쌓아온 학습의 결과를 흩뿌려 버린다. 개인의 지적 수준과 실천 능력은 높아졌겠지만.
다시 현실로 : 야생마와 경주마
상상과 실험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드리야르가 말한것처럼 체제(system)는 체제를 존속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욕구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체제가 거부하는 것이거나 또는 체제에 낯선 것일 때에는 체제가 그 문제에 대해 유연해질 때까지 어려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은 늘 현실 속에서 좌절하기 마련이다. 상상 속에 그려진 대안교육은 어떠한 좌절을 맛보아야 할까. 여기에서는 그 중 하나를 다뤄보도록 한다. 여기에 하나의 우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평생교육의 제도화가 갖는 양면성을 음울하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대안교육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어느 목장에 두 마리의 말이 살고 있었다. 두 마리는 모두 처음에는 너른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어 다녔다. 어느 날 이곳에 사람이 나타나 들판에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그 곳에 ‘OK목장’이라는 푯말을 붙였다. 울타리 안에 갇혀 버린 두 말은 변한 환경에 당황스러워 했다. 목장 주인이 말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누가 나의 경주마가 되어 줄래?’ 한 말이 물었다. ‘경주마가 되면 내가 너희에게 잘 곳과 먹을 것과 쉴 곳을 마련해 주마’라고 목장 주인은 대답했다. 그러자 또 다른 말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목장 주인은 대답했다. ‘경주마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게 될 거야. 너희는 야생마니까 훈련을 받아야해. 그것도 아주 체계적인... 먼저 나는 너희 입에 재갈을 물리고, 등위에 안장을 얹고, 발에 굽을 달게 될 거야. 그래야 경주마로서 트랙을 잘 달리리 수 있고 폼이 나거든. 그리고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하게 될 거야’ 그러자 한 말이 물었다. ‘저희는 늘 달려왔고 잘 달릴 수 있어요’. 그러나 목장주인은 말했다. ‘이제는 너희가 달리는 것은 달리는 것이 아니야. 달리는 것에는 정해진 룰이 있단다. 그리고 그 것을 따랐을 때 이 목장에서 달리는 것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어. 모두가 다 달린다고 이야기하면 정말 달리는 게 무언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래서 트랙을 만들어 놓고 경주를 시켜 보는 거야. 경주마는 정해진 트랙을 달려야 해. 아무리 들판에서 너희들이 잘 달렸더라도 기수의 명령에 따라 트랙을 잘 달리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 경주마답게 되는 거란다’. 두 말은 한참을 고민했다. 한 말이 말했다. ‘저는 경주마가 되겠어요. 저를 훈련시켜주세요. 그 대신 저에게 먹을 것과 쉴 곳과 잘 곳을 마련해 주세요’. 다른 말은 말했다. ‘저는 비록 우리의 들판이 울타리로 갇혀버렸지만 이 안에서라도 자유롭게 달리겠습니다. 트랙을 달리는 것은 달리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두 마리의 말은 각자 갈 길을 갔다. 경주마의 생을 선택한 말은 바로 재갈이 물리고 굽을 달았다. 등에는 무거운 안장을 얹었다. 그리고 기수를 태우고 트랙을 뛰는 삶을 시작했다. 대신 이 말은 몸을 가려주는 마구간에서 잘 수 있었고 양질의 건초를 먹을 수 있었다. 반면,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말은 예전에도 그랬듯 자유로이 들판을 달릴 수 있었다. 자신 나름대로의 멋진 폼을 만들어도 보고 뛰다가 두 다리를 높이 들며 포효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몸을 가릴 마구간도 먹기 좋은 건초도 없었다.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자야했고 들판의 풀을 뜯으며 겨우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때때로 목장 주인은 자신의 경주마들이 한눈을 팔까 두려워 야생마가 달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더욱 이 말은 자신이 달리는 것이 진정한 달리는 것이라 믿으며 꿋꿋하게 달리기를 했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트랙이 아닌 들판에서 달리는 것도 달리기답다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목장 주인은 경주마만 돌보지 말고 야생마에게 달릴 권리를 보장해 주고 잘 달릴 수 있도록 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줘야한다는 요구가 일어났다. 한 쪽에서는 들판에서 달리는 것도 달리는 것이니 들판에서 잘 달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범을 목장 주인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려왔다. 야생마에게도 기수를 태우는 것이 어떨까라는 소리도 들렸다. 사실 야생마도 자신이 달리는 것이 진정 달리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더군다나 더 이상 추운 들판에서 사는 것도 허기진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목장 주인에게 ‘내가 달리는 것을 달리는 것으로 인정해 달라’. ‘나에게도 마구간을 지어주고 최소한 먹을 것을 제공하라’라고 강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목장 주인도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다른 마을 목장들은 이미 ‘평생 달리기’라는 모토를 내걸고 야생마들의 달리기야말로 목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핵심이라고 수근대고 있었다. 경주마뿐만 아니라 망아지부터 늙은 말까지의 달리기를 잘 관리 해야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목장 주인은 생각을 고쳐먹고 야생마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는 야생마에게 물었다. ‘내가 건초 한더미를 줄게. 그 동안 너무 무심했어. 너에게 관심을 가지마. 들판에서도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줘’. 그러나 야생마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건초의 유혹은 굶주린 야생마에게 큰 것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들일 때 무엇을 요구하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장 주인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죠?’ 목장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바라는 것이 크지 않아. 네가 잘 달릴 수 있는 몇 가지 조건만 갖춰주면 되. 말발굽하고, 재갈을 물고 안장을 얹으면 좋겠어. 그리고 우리 목장협회에서 인증한 기수를 태우면 더욱 좋겠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경주마가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야. 내 입장에서도 네가 달린다는 것을 인정해 주려면 최소한 몇 가지 조건은 갖춰줘야 해’. 야생마는 다시 물었다. ‘그렇게 된다면 저는 이미 야생마가 아닌 게 되는 걸요. 야생마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어야 달리는 것이 아닌가요?’. 목장 주인이 대답했다. ‘너의 달리기가 내 입장에서도 이로워야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건초더미를 줄 이유가 없잖아. 다른 건 몰라도 재갈은 꼭 물었으면 좋겠어’. ‘제가 달리다가 두발을 들고 히히힝 거려도 되나요?’ 야생마가 물었다. ‘그건 네 자유지만 그건 내가 달리기라고 인정 해 줄 수가 없어. 달리기는 무릇 빠른 속도로 짧은 시간에 멀리 갈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네가 중간에 갑자기 히히힝 거리면 그 시간은 내가 보기에 달린게 아니야’. 야생마는 낙담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두 발을 들고 히히힝 거리며 포효하는 것은 달리기의 마지막에 발산하는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는 인정받을 수 없다니... 야생마에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건초를 얻어먹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 내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목장주인이 바라는 바대로만 달리게 되지는 않을까. 시간이 흘러 히히힝 거리는 포효를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야생마의 생명은 들판을 달릴 수 있는 ‘자유’에 있었다. 그런데 그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목장주인의 보호를 얻는다면 그 때의 나도 야생마인 나일까... 야생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목장 주인은 다그쳤다. ‘어쩔 꺼야. 빨리 결정해야 해’ 몹시 괴로워하며 야생마는 너른 들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언덕 끝, 석양이 머무는 곳에 이르러 마지막이라도 되듯이 두발을 높이 치켜들고 ‘히히힝’ 크게 포효하기 시작하였다. 열심히 트랙을 돌고 있던 경주마는 그 풍경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체제 보호를 벗어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없다. 대안교육은 태생적으로 거대 시스템과의 긴장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 메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대안교육을 꿈꾸는 우리는 진짜 교육을 찾아 나서기 위해 학교라는 프로그래밍된 메트릭스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온(진짜 교육?)을 구해내겠다고 결단했다면 끊임없이 복제되는 스미스(학교체제 또는 거대 시스템?)와 싸울 운명이다. 두려운가? 후회해도 할 수 없다. 아는 게 병인걸...
<부록>
여기에서 잠깐 한 국가의 교육체제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교육체제를 단순히 4개로 유형화 하고 있지만 교육체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간섭 강함 |
국가통제형 |
사회주의형 |
약함 |
시장형 |
복지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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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담 |
공부담 |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체제는 국가통제 및 교육비 부담의 두 요소를 고려하여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한 사회의 민주화 정도,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 확보 정도에 따른 구분이다.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기의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력은 막강했다. 교과를 통한 학교의 통제뿐만 아니라 금서 목록을 통한 사상의 통제까지 이루어졌다. 1980년을 전후해서 이루어졌었던 야학에 대한 대대적 탄압은 교육을 통제하고자하는 국가의 욕구가 학교 밖 일상으로까지 뻗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여전히 냉전적 사고 때문에 국가의 통제력이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가의 통제력은 약화되고 있다. 공교육의 붕괴는 어쩌면 과거 권위주의적 국가 체제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일 수 있다.
교육은 사적인 것인가 공적인 것인가? 국가의 통제력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사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골탑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땅을 팔고 논을 팔고 소 팔아야 대학을 갈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땅값과 소 값도 바닥인데다가 아무리 팔아도 가랑이만 찢어질뿐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도 있었다”라는 추억담으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학교교육만 그럴까? 중학교까지의 학력을 의무교육기간으로 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학력에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저학력층들은 그냥 방치되어 있거나 개인 돈을 들여 공부를 하고 있다(물론 미비한 수준에서의 지원은 이루어진다). 지식기반사회라 하여 지식이 돈이 된다고 하면서도 예비 취업자들이나 우리 직장인들은 개인 돈을 들여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물론 기업마다 편차는 있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학습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교육은 철저히 사적인 것이지 공적일 수 없다. 이점에서 국가의 권위(?)로 겨우 버텨오던 공교육이 권위주의적 권력의 붕괴로 위기를 겪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 않을까? 언제 교육의 공공성이 실현이나 된 적이 있었던가?
우리나라의 교육체제는 통제형에서 시장형으로 가고 있다. 국가의 통제가 적어지는 대신 교육에 대한 사적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다양한 대안교육이 등장한 것은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의 약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시장의 팽창(구매력만 가지면 살 수 있는 교육 상품이 늘어나는 현상)으로부터 대안학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첫댓글 이 글을 쓰신 '하늘소'란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