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연재50]악질 토벌대 미야모토 부대전멸 대사하 · 대장강전투 항일독립주투쟁의 성지 연변조서족자치주를 가다(50)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 (50)
사진 .1 오늘 날의 대사하 풍경
▲ 오늘 날의 대사하 풍경이다. 우리네 시골 작은 읍내정도 되는 고장이다. 건물이 보이는 바로 옆에 재래시장이 있는데 우리의 재래시장풍경과 똑같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악질 토벌대 미야모토 부대전멸 대사하 · 대장강전투
우리는 오후 1 시 반경 소사하를 떠나 대사하로 출발을 하였다 . 사실 외국을 나가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 시간이면 국내에 있을 때는 배가 고플텐데 어찌된 일인지 외국에 나가면 배가 고프다는 걸 거의 못 느낀다 . 필자만 유별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식사 때가 되어도 배가 고프다는 걸 거의 못 느낀다 . 따라서 먹는 양 역시 국내에 있을 때보다 절반도 채 먹지 못한다 .
우리가 탄 차는 오후 3 시가 다 되어서 대사하 ( 현재 지명은 영경 ) 에 도착하였다 . 이송덕 선생과 이창기 기자가 배가 고프다면서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한다 . 사실 필자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둘이서 원하니 함께 근처 식당을 찾았다 .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예전과 다르게 조선족의 비중은 30% 정도 밖에 안 되고 대부분이 한족 ( 漢族 ) 이라고 한다 .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식당을 하는 사람들은 그가 조선족이건 한족이건 대부분 우리음식을 만들어 판매한다 . 특히 중국과 남쪽이 수교 한 후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이 연길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우리가 답사를 한 길을 따라 백두산을 찾다보니 우리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대폭 증가를 하였다고 한다 .
이송덕 선생은 대사하에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 없다고 한다 . 하지만 한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도 우리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으니 식사를 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 우리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 식당에 들어서니 식당 풍경 역시 전혀 낯설지가 않다 . 우리가 국내에서 흔히 시골에 내려가 대하는 식당 풍경과 같다 . 대사하는 우리네 작은 읍 정도 규모의 고장이다 . 따라서 식당 역시 커다란 규모는 없다 . 우리가 들어선 식당 한쪽에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에 식탁이 세 개가 놓여있고 또 다른 쪽에는 의자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세 개가 놓여있다 . 우리 일행은 의자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
식당에는 아주머니 세 사람이 있었다 . 우리에게 와서 주문을 한다 . 이송덕 선생과 이창기 기자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주문을 했고 필자는 육 ( 肉 ) 고기를 먹지 못하는 관계로 달걀로 덮은 김치 비빔밥을 시켰다 .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한 숱 갈 떠서 입에 넣으니 얼마나 짜던지 나도 모르게 온 얼굴이 찌뿌려 질 정도였다 . 물론 이송덕 선생이나 이창기 기자는 필자와 주문한 음식이 달라서 그런지 짜다는 말이나 맛이 없다는 말도 없이 아주 잘 먹는다 .
필자는 솔직히 당일 무주촌에서 아침만 한 상태였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 하지만 주문한 음식이니 먹을 수밖에 없기에 물 한통을 주문하였다 . 참고로 중국에서는 모든 걸 돈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 돈을 내야만 물이건 반찬이건 내온다 .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조선족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식당에서 벌어지는 이런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다 .
물을 밥과 동시에 먹지 않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짰다 . 필자는 밥 한 숱 갈 떠 넣고 물 한 입 마시면서 주문한 음식을 간신히 다 먹을 수 있었다 . 밥 한 숟갈에 물 한 입씩 먹었어도 음식이 얼마나 짜던지 식사 후 내내 목이 말라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 한 30 여 분 식사를 한 다음 우리는 대사하치기 전투와 로진창 ( 로금창 ) 전투를 벌였던 사적지를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 택시를 타기 전에 이송덕 선생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바로 1939 년 8 월 대사하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
이송덕 선생의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1939 년 8 월 제 3 방면군이 재편성된 후 제 3 방면군은 대사하 집단부락을 공격하였다 . 집단부락을 점령한 후 송강 ( 소사하 ) 과 명월구로부터 오는 적의 증원병을 습격하는 전투를 이 곳 ( 대사하 ) 에서 벌였다 . 대사하 전투에서 제 14 퇀 ( 단 . 團 ) 퇀 장 ( 단장 ) 하지장과 정위 양형우가 희생되었으며 , 제 3 방면군 부총지휘 후국충도 희생되었다 .”( 대사하전투에 대한 이송덕 선생 해설 중에서 )
“1939 년 8 월 24 일 제 3 방면군 제 13 퇀과 15 퇀은 위증민의 지휘하에 이 곳에서 매복전을 펼쳐 대사하전투를 지원하고 돌아오는 일본군 미하모토 ( 궁본 宮本 ) 중대를 섬멸하였다 . 전투전날 통양툰 ( 동양촌 ) 에서 허성숙동지가 희생되었다 .”( 대장강전투에 대한 이송덕 선생 해설 중에서 )
대사하 전투에 대한 자세한 정황은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아래에서 다룬다 .
참고로 앞으로 연재될 항일전투에 대해서는 전투별 시간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필자가 전적지 답사를 한 노정 ( 路程 ) 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니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 답사노정에 따라 해당하는 전투상황을 연재하게 되니 연재회수가 먼저일지라도 전투를 진행한 년도는 훨씬 뒤 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 이 점 잊지 말고 본 항일전투상황을 대하기 바란다 .
또 하나 사적지 답사를 하면서 이송덕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받은 자료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여러 자료들을 나름 정리를 해서 올릴 수 있지만 본 연재에서는 될 수 있으면 필자가 정리하여 올리는 것보다는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전재하도록 한다 . 특히 북측 자료들은 대부분이 해당전투에 직접 참전했던 항일투사들이 당시 전투상황을 회상하여 쓴 것이기에 전투를 할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 독자들도 필자가 정리를 한 자료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현장감을 느낄 것이다 . 또 동일전투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자료를 동시에 인용을 하여 같은 전투에 대해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북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사진 2. 소사하전투가 벌어졌던 오늘 날의 소사하 고개
▲ 소사하전투가 벌어졌던 오늘 날의 소사하고개. 지금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차량이 다니기에 편리하게 되어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그럼 대사하전투에 대한 자료를 보도록 한다 . 참고로 대사하전투에 대한 남측 자료는 없다 .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 “ 워성타원 ” 전술로 적을 꾀여들인후 악질적인 미야모또 “ 토벌대 " 를 섬멸 대사하에서의 격전
대사하는 한요구동북쪽 안도현 소재지의 서북쪽의 위치해있는 규모가 큰 집단부락이였다 . 부락은 토성으로 둘러쌓여있고 부락안에 있는 경찰서울안에는 높은 포대가 있었는데 적들은 거기에다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방을 감시하고있었다 . 부락에는 경찰 30 여명과 무장자위단 수십명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안도 ( 송강 ) 와 명월구의 적들이 인차 도착할수 있어 서뿔리 공격하기엔 쉽잖은 곳이였다 . 이에 아군은 “ 위성타원 ( 圍城打援 ) 전술 ”, 다시말하면 성을 포위하고 그 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 즉 안도와 명월구의 적을 대사하에 끌어들여 소멸한다는것이였다 .
8 월 23 일 , 위증민은 13 퇀 , 15 퇀과 2 방면군 9 퇀의 일부 부대 300 여명 병력을 인솔하여 사가점 큰길옆 서쪽 도랑홈에 약 2.5 킬로메터의 폭을 두고 매복해있다가 명월구방면으로 오는 적의 증원병을 치기로 하고 진한장이 인솔하는 14 퇀과 경위련 200 여명을 대사하집단부락을 친 다음 대사하 남쪽에 매복하여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오는 증원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
날이 어두워지자 대사하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부대는 대사하부락 토성밖에 매복해있었다 . 아군의 계획에 의하면 0 시에 보초가 교대하는 틈을 타 성안에 있는 지하일군 리홍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 그런데 날이 훤히 밝고있는데도 리홍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후에 안 일이지만 리홍산은 뜻밖에도 전날밤에 양초구에 일이 있어 불리워갔던 것이다 .
아군은 하는수없이 날이 밝아 사람들이 물 길러 나오는 기회에 공격하기로 했다 . 성안에 우물이 없기에 날이 밝으면 적들은 보초를 철수하고 물 길러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
드디어 날이 환히 밝았다 . 아군은 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물 길러 나오기를 도정신해 기다리고있었다 .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또 벌어지고말았다 .
그번 전투에 직접 참가한적 있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 준엄한 시련속에서 》 에서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난데없는 일본경찰 한놈이 대문밖으로 나왔다 . 그는 우리가 채소밭에 매복해있는 것을 보고 픽 돌아서더니 부락안으로 달려들어갔다 .
“ 섯 ”
토성에 붙어섰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 그때 나도 토성에 붙어서있었다 . 뛰던 놈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또 경찰서쪽으로 곧추 달려가며 “ 공산당이 왔다 !” 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 성문북쪽에 숨었던 전사가 그놈을 당장에서 쏴죽였다 . 이 바람에 마을안에선 호각소리가 “ 호르륵 , 호르륵 ” 하며 련이어 나더니 집안에 있던 놈들이 북달질하며 포대안에 들어가 총질하였다 . 진한장은 전투명령을 내리고 각 련의 주공방향을 제시하였다 . 토성밖에 매복해있던 전사들은 마을안으로 물밑듯 들어가는데 경찰서뜨락의 포대에서 기관총이 미친 듯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 탄알은 눈앞에 와 우박처럼 떨어져다 . 우리는 담벽에 다가붙어 경찰서쪽으로 돌진해들어가다가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사격선을 피하여 부근의 민가에 흩어져들어갔다 . 이곳 집들은 기차굴처럼 길게 지은 줄집인데 아래웃집사이에는 간벽이 있었다 . 적든 계속 총질하였다 . 우리는 민가의 벽을 뚫고 나가 포대에 대고 사격하였다 . 그런데 탄알은 포대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
적아의 교전은 치렬하였다 . 적진을 노리고 있던 김수학패장이 한손에 수류탄을 쥐고 배밀이해 나갔다 . 한 전사가 또 김패장의 뒤를 어어갔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
포대높이는 5 메터가량 되었다 . 두 용사는 포대벽에 가붙어서 수류탄을 올리뿌렸다 . 헌데 수류탄은 화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총질했다 . 두 용사는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쥐여 다시 올리뿌리려다가 그만 장렬히 희생되였다 .
적의 기관총수가 요란한 폭파소리에 놀라 대가리를 움츠리고 앉았다가 다시 쳐드는 순간 이여다 . 1 선에 매복해있던 동무들이 포대화구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 누구의 탄알이 명중했는지 적의 기관총수가 맞아서 화력이 멎었다 . 이 순간 우리는 경찰서의 토담을 넘어들어가 포대안에 수류탄을 밀어넣고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 뒤미처 대부대가 들어와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사하를 점령하였다 ...
전반전투는 원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 제 3 방면군 지휘 진한장은 부지휘 후국충에게 14 퇀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송강방면으로 달려가 적의 증원부대를 저격할 것을 명령했다 . 저격부대는 전속력으로 소사하남쪽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 아군이 소사하 고개길에 거의 닿고있을 때 대사하로부터 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본군은 9 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아군이 매복하려던 고개를 넘어오고있었던 것이다 . 이리하여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여였다 .
적탄이 비발치듯 날아왔으나 전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언덕진 고개우로 돌진해 나가다가 후국충부지휘와 14 퇀 허자장 , 정위 양형우 ( 조선족 ) 가 희생되였다 . 지휘관을 잃은 전사들은 눈에 달이 올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일격에 돌진해들어갔다 . 아군은 드디여 소사하언덕을 점령하였으며 왜놈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대사하를 치면 명월구에서 인차 오리라고 예견했던 적증원부대는 이날 낮에 오지 않아 류수촌 남구에 매복한 부대들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말았다 . 해가 진 다음 각 부대들은 류수촌집단부락을 중심으로 린근의 집단부락들을 분공하여 진공한후 하루밤을 류숙키로 하였다 . 안길 , 전동규부대들이 류수촌부락을 들이칠 때 적들의 저항은 드셌다 . 50 여명 경찰과 자위단은 맞불질 하면서 완강히 버티였으나 불과 5 분도 채 안되여 아군은 적들을 무찌르고 부락을 점령했다 .
최현부대는 동량툰을 점령했다 . 최현퇀장은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기로 했다 . 하여 안도현소재지 ,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전화를 쳐 “ 우리 항일련군은 이미 대사하와 대장강 , 동양툰을 점령하였다 . 용기가 있으면 싸우러 오라 !” 고 위협조로 통고했다 .
자정이 되자 과연 증원병을 태운 적 트럭 6 대가 동양툰에 들어섰다 . 보초선에 있던 전사들이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했다 . 녀기관총사수 허성숙은 한 대원에게 빨리 지휘부에 가 알리라고 말하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둘렀다 . 이 전투에서 부대의 녀장군으로 불리우면서 사랑받던 허성숙은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
적증원부대는 아군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는지라 부랴부랴 송강쪽으로 내뺐다 . 이튿날 아군은 또다시 전날에 포치하였던 매복지점에와 매복하였다 . 송강에서 명월구로 가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에 되돌아가는 적들은 반드시 이 길로 지날것이였다 .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본군과 조선인 “ 특설부대 ”, 그리고 일본군가족 수명을 태운 대형 군용트럭 7 대가 안도현성족으로부터 아군의 포치선으로 질주해왔다 . 그중 한 대의 트럭에 앉은 적들은 대사하전투에서 요행 살아남은 적들이였다 . 트럭은 아군 매복선남쪽 하단을 거쳐 2.5 킬로메터쯤 질주하여 오다가 선두의 트럭이 정지하자 그 뒤로부터 따라오던 트럭이 전부 한곳에 집결되였다 .
아군의 기관총 , 보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 어떤 놈은 자동차우에서 죽고 어떤 놈은 뛰여내리다 맞아죽었다 . 불과 몇십분 사이에 적주력은 소멸되였으며 살아남은 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 남은 적도 도로서쪽 홈에 매복한 아군의 집중사격에 의하여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었다 . 뒤이어 아군의 돌격신호가 울리였다 .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 여구나 되었다 . 미야모도는 운전실에서 나오지도 못한채 죽었다 .
이틀동안의 전투에서 제 3 방면군은 적 250 여명을 살상포로하고 7 정의 경기관총과 700 여자루의 보총 , 권총 및 여러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 ❞
<( 김철수 《 연변항일사적지연구 》 )>
인용문에서 대사하전투와 “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 항목에서 다룬 상황은 별개의 전투가 아닌 연속된 전투상황이다 . 인용된 전투 상황에 대한 특별히 분석할 필요는 없다 . 다만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투사들의 용맹성과 용감성이다 . 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목숨 아깝다고 생각지 않고 서슴없이 바치는 정신은 현대 남쪽에 살고 있는 민족구성원들은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 현재 남쪽에 살고 있는 민족구성원들은 민족성 , 겨레 얼 , 겨레의 넋 같은 것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아니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지 남과 북은 이제 나라만 다르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천륜마저 저버리는 천벌 맞을 소리까지 당연한 듯 공공연하게 뇌까리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다 .
위에서 대사하전투에서 보듯 전투에서 지휘관이 목숨을 잃었어도 조금도 주저함이나 동요도 없이 목적했던 고지를 점령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하는 것을 보아라 . 과연 목숨을 바쳐가며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우리의 조상들인 항일투사들이 과연 오늘의 분단된 조국을 위해서 였는가 . 더구나 조선반도 남쪽에 삶의 터전을 삼고 있는 후손들에게 썩어빠진 얼과 넋을 심어주기 위해 굶어죽고 , 얼어죽고 , 잡혀서 맞아죽고 , 전투장에서 총에 맞고 대포에 맞고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는가 . 필자는 솔직히 항일무장투쟁사를 다루면서 동시에 남쪽의 현실을 생각하면 억이 막히고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썩어빠져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썩어빠졌다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해대면서 짐승만도 못한 사고 속에 살고 있는 현실이 하루라도 이른 시기에 끝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후손들을 위해 한 목숨 서슴없이 바쳤던 항일투사들이 조선반도 남쪽 오늘의 현실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떨 것인가 ? 아마 보는 순간 숨이 도로 막혀 다시 돌아가실 것이다 .
참고로 인용문에 나오는 《 집단부락 》 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유격대와 인민들 사의의 연계를 끈고 자신들이 용이하게 지배를 하기 위해 조선인들과 소수의 일반 중국인들을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면서 생긴 마을을 말한다 .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이와 같은 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이 다 목적의 포석이 깔려있다 .
첫째 . 유격대와 인민들 사이의 연계를 끊음으로서 인민들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한다 .
둘째 . 이러한 제도를 통해 유격대를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서 고사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이다 .
셋째 . 유격대에 대한 고사작전에는 식량부족을 가져옴으로서 대원들을 굶어죽게 하자는 것이다 .
넷째 . 유격대가 고립된다는 것은 결국 유격대를 지원하는 새로운 유격대원들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
다섯째 . 정보의 차단이다 . 즉 조선인민들이 유격대와 함께 어울려 살게 되면 일본군국주의 군대의 정보가 유격대에게 흘러들어감으로서 자신들이 유격대토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은 자명하다 . 따라서 유격대와 인민들을 철저히 분리하려는 목적에서 집단부락제도를 내왔다 . 항일무장투쟁시기 유격대에 협조를 한 사람들은 조선인민들이 99.999% 였다 . 물론 간혹 중국인들이 협조하기는 하였지만 그 확률은 대단히 낮았다 . 또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 중국인들이 동북만이나 남만에 거주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낮았다 . 따라서 집단부락정책의 대상은 주로 조선인들이었다 .
이와 같은 같은 어느 한 나라나 민족 혹은 공동체를 파괴하여 지배하는 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제국주의자들의 변함없는 행태이다 . 즉 어떤 한 집단 , 사회 , 민족 , 나라가 극단적으로 분열을 하면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가 없다 . 현재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예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 제국주의자들의 교활하기 짝이 없는 《 분열하여 통치하라 》 는 정책에 의해서 실시된 것이 일제강점기 동북만과 남만에서 실시된 《 집단부락 》 정책이다 .
참고로 제국주의자들의 《 분열하여 통치하라 》 는 정책이 가장 성공한 곳은 다름 아닌 온 누리 존재하는 민족가운데 유일하게 한 핏줄을 이어왔으며 가장 단결이 잘 된다고 하던 우리민족이 살고 있는 조선반도이다 . 우선 해방 후 1945 년 9 월 8 일 미군이 38 도선 이남을 점령함으로서 가장 먼저 남과 북으로 분열이 되었다 . 또 전쟁 후 남쪽에서는 박정희 유신통치시기부터 극렬하게 조장된 호남과 영남간의 지역감정 조장이다 . 결국 조선반도 남쪽에서 호남과 영남을 가장 먼저 분열시켰다 . 거기에 더해 충청도를 교활하게 전라도와 분열시켰다 . 언제는 역사적으로 경기도 수도권과 충청도 전라도가 백제강역이었다고 강변했으면서 또 그 백제의 고토에서 함께 살아왔다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철저히 분열 조장시켰다 . 그러면서 충청도가 영남과 완전히 하나가 될 정도로 하였느냐 하면 그것 역시 절대 아니다 . 적당히 자신들의 통치에 이용해먹을 만큼만 교묘하게 충청도 지역정서를 자극하였다 . 마지막에는 수도권을 분열 조장시켰다 . 즉 인구는 수도권이 가장 많은데 영남이 다 해먹는다 , 전라도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식으로 분열책동을 벌이면서 수도권을 또 분열시켰다 . 강원도야 원래부터 감자바위네 뭐네 하면서 철저히 따돌림 했었다 . 그러면서 교묘하게 분열된 남쪽의 한 형제들을 자신들의 반민족통치에 이용을 해먹었다 . 심지어 좁디좁은 조선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인 듯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인양 내돌리면서 분열 조장시켰다 . 즉 경상도는 《 흉노족 》 의 후예라는 식으로 마치나 우리와 같은 민족이 아닌 듯 철저하게 분열 조장하였다 . 필자는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단언하건데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민족이 아니다 . 또 좁디좁은 조선반도 내에서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라 ( 가야 ) 로 갈라져서 살지 않았다 . 고대시기인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라의 역사 강역은 현 중국대륙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들이었다 . 현 조선반도의 남과 북 우리겨레는 이 땅에서 적어도 1 백만 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한 핏줄을 이은 모두가 다 한 형제들이다 .
헌데 더욱 통탄할 일이 현재 남쪽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 신성한 우리겨레의 역사를 가르쳐야 할 역사학계에서 천추에 용납 못 할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다 . 역사학자라는 탈을 쓴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제국주의 돌격대들은 현재 남과 북을 가로지르고 있는 휴전선을 경계로 그 이북지역은 《 단군조선 ( 檀君朝鮮 ) 》 이었으며 그 이남은 단군조선의 강역이 아니었다고 한다 . 따라서 현재 휴전선 이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단군조선의 후예가 아닌데 왜 단군조선에 대해서 배워야 하느냐는 불만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린 학생들 사이에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
위의 말은 결국 역사 왜곡을 넘어 숨겨진 진정한 목적은 남과 북은 한 나라가 아닌 정도를 넘어 한 민족도 아니라는 논리를 성립시킨다 . 따라서 갈라져 산지 벌써 70 년이 넘었으니 당연히 다른 나라이다 . 또 역사적으로 한 민족이 아니기에 남과 북 통일을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된다 . 남과 북 한민족이요 , 한 나라요 할 필요도 없고 통일에 대해 운운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묘하게 학술적인 듯 역사적으로 고증되었다는 등 하면서 세뇌시키면서 남과 북 영구분단을 넘어 영원히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만들려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천추에 용납 못 할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다 .
유대일루미나티 경전인 시온의정서에 나와 있는 철저하게 《 분열하여 통치하라 》 는 교리가 통탄스럽게도 온 누리 모든 나라 , 민족들 가운데에서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서 가장 철저하게 적용이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 온 누리 존재하는 현생인류 가운데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기능이 뛰어나다고 하는 우리겨레가 온 누리 존재하는 인류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족속으로 전락을 하고 말았다 . 참으로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가 없다 . 특히 현 조선반도 남쪽에 사는 구성원들은 완전히 머저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 사고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족속으로 전락을 하였다 .
이야기가 다소 다른 곳으로 흐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 바로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선강점기 무려 20 여년에 걸쳐서 자행한 우리겨레의 상고대사 왜곡책동 역시 우리겨레를 갈갈이 찢어발김으로서 좁디좁은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며 따라서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철저하게 세뇌시키고자 하는 목적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 즉 현재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대시기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라 등으로 각기 700 여 년 혹은 천여 년 동안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으니 현재 당신들의 뿌리는 하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씨와 뿌리이기에 결코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논리를 학문이라는 외피를 씌워 교묘하게 민족분열책동을 꾀했던 것이다 .
이와 같은 민족분열이간책동의 부정적인 영향은 역사왜곡 책동을 시작하여 100 여 년이 흐른 지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극단적인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 . 즉 남과 북은 어차피 고대시기 같은 나라가 아니었으니 같은 민족이라고 우기지 말라는 것이다 . 또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는 신라 ,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는 백제였으니 같은 민족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 특히 신라 땅이었던 “ 현 경상도는 흉노족이니 같은 민족이 아니다 .” 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 결국 우리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
실재 이러한 현상은 현 남쪽에서 점점 더 고착화되고 극성을 부리고 있는 형편이다 . 그 극단적 행태가 위에서 예로 든 휴전선 이북은 고조선의 강역이고 그 남쪽은 아니라는 논리이다 . 아무튼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행태들은 흐리거나 비 오는 날 정신병자들이 벌이는 날궂이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 남쪽 사회 전체가 정신병동에 갖혀있는 정신병환자들이다 . 올바른 민족성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민족구성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 물론 당사자들은 절대 아니라고 여기고 있으며 이렇게 말 하는 필자가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
일제 강점기 동북만과 남만에서 벌인 《 집단부락 》 정책은 사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분열이간책동을 눈에 드러나게 직접적으로 실행을 한 사건이지 민족사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낳을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 바로 위에서 예로 든 《 분열하여 통치하라 》 의 전형적인 한 작은 모범사례이다 . 우리는 이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
대사하전투에 대한 북측 자료
사진 .3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
▲ 1939년 8월 세계정세는 급변하였다. 대사하 · 대장강전투가 벌어지던 몇 일 후인 1939년 9월 1일 파쇼도이칠란드가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치밀하게 분석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소련을 옹호하기 위해 소련의 동쪽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발목을 붙잡아 둠으로서 일제의 소련침략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전투를 조직하였는데 그게 바로 대사하 · 대장강전투이다.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는 일본군. © 이용섭 역사연구가
안도현 대사하 , 대장강전투
최 현
❝ 김일성 동지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첫 시기부터 세계혁명력량과의 단결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항상 항일유격대원들을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정신으로 교양하시였다 .
특히 김일성 동지께서는 《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 ! 》 라는 구호밑에 일제의 《 토벌 》 이 혹심하던 어려운 시기에도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해 적배후교란작전을 진행할데 대한 작전적방침을 내놓으시고 그 관철에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을 불러일으키시였다 .
적배후교란작전을 벌릴데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령서를 받아안은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수많은 전투들을 벌려 일제의 쏘련침공을 저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그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1939 년 8 월에 있은 안도현 대사하 , 대장강전투였다 .
1939 년 5 월부터 일제침략자들은 쏘련 , 몽골 , 《 만주국 》 국경지대에서 몽골에 대한 대규모적인 도발사건을 일으켰다 .
몽골에 대한 일제의 침공은 몽골을 강점하고 나아가서는 쏘련령토에 침입하여 씨비리간선철도를 절단함으로써 쏘련으로부터 원동을 떼여내려는 흉악한 책동에서 출발한것이였다 .
그러므로 이 책동은 1938 년 7~8 월에 일제가 쏘련 연해주남단 하싼호를 침공한 사건의 연장이기도 하였다 .
쏘련군대와 몽골군은 일제침략자들의 이와 같은 강도적인 침공에 대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 그러나 일제는 참패를 당하면서도 계속 《 정예 》 부대들을 동원하여 몽골국경에로 내몰았다 .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에 대한 일제의 이와 같은 침공을 결코 무관심할수 없었다 .
김일성 동지께서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한 적배후교란작전을 벌리도록 하심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이 당시 일제의 후방이였던 조선과 중국동북지방에서 유격전쟁을 더욱 확대하여 적의 후방을 대대적으로 들이쳐 놈들의 력량을 대량 섬멸할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
그리고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군사지휘관들이 적정을 정확히 분석하고 조성된 정황을 구체적으로 판단한 기초우에서 매복전 , 야간습격전 , 유인전 , 공격전 등 여러가지 유격전술을 능란하게 배합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
조선인민혁명군 제 3 방면군은 김일성 동지의 전략적방침에 따라 안도현성과 명월구의 적들을 유인섬멸할데 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 ❞
〈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편 중에서 대사하 대장강 전투 〉
대사하 · 대장강전투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면 해당 전투를 조직하게 된 목적이 분명하면서도 정확하게 나와 있다 . 즉 대사하 · 대장강전투를 벌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대동아공연권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몽고와 소련 땅인 시베리아 점령을 위한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의 배후를 침으로서 그 야욕을 좌절시키기 위함이었다 .
1931 년 9 월 18 일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대동아공연권 실현의 마지막 단계인 몽고와 소련의 영토인 시베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동 지역에 대한 침략전쟁을 광란적으로 벌였다는 것을 인용문은 전해주고 있다 . 따라서 그 배후인 동북만과 남만 지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침으로서 역량을 분산시켜 몽고와 시베리아에 대한 침략책동을 분쇄하는 것이다 . 이는 당시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축인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고 세계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을 인용문은 밝히고 있다 .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종합 편에서 다루었다 . 1930 년 이후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벌인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세계 공산주의혁명수행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에 대한 일제의 이와 같은 침공을 결코 무관심할수 없었다 .
김일성 동지께서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한 적배후교란작전을 벌리도록 하심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이 당시 일제의 후방이였던 조선과 중국동북지방에서 유격전쟁을 더욱 확대하여 적의 후방을 대대적으로 들이쳐 놈들의 력량을 대량 섬멸할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
인용문을 보면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인 항일무장투쟁은 크게 두 가지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첫째 . 가장 기본이자 근본적 목적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해방하는 것이다 .
둘째 . 당시 세계 진보적 인류가 지향하던 공산주의혁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그 중심축 역할을 하는 소련을 옹호하는 것이다 . 이에 대해 인용문은 “ 적배후교란작전을 벌릴데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령서를 받아안은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수많은 전투들을 벌려 일제의 쏘련침공을 저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라고 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소련침략 계획을 좌절시키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인용문에서 보이는 대사하 · 대장강전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격전술을 능수눙란하게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 유격전술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들에서 상세히 분석하였다 . 여기서는 인용문의 관련 내용만을 보도록 한다 .
인용문을 보면
“ 그리고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군사지휘관들이 적정을 정확히 분석하고 조성된 정황을 구체적으로 판단한 기초우에서 매복전 , 야간습격전 , 유인전 , 공격전 등 여러가지 유격전술을 능란하게 배합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
라고 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약 7 년여가 흐른 1939 년 8 월에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맞선 조선인민혁명군이 항일전투에서 유격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적용하였음을 말 해주고 있다 . 이러한 토대아래 대사하 · 대장강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인용문은 “ 조선인민혁명군 제 3 방면군은 김일성 동지의 전략적방침에 따라 안도현성과 명월구의 적들을 유인섬멸할데 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 라고 전해주고 있다 .
대사하 · 대장강 전투에 대해 북측 자료를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
대사하전투
❝ 안도현성은 안도현의 소재지로서 현안의 정치 , 경제 , 군사적중심지였다 . 그리고 명월구 역시 놈들의 군사적요충지대의 하나였다 .
일제는 이 성시들에 수백명의 일만군대를 항상 주둔시키고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 대토벌 》 을 감행하군 하였다 .
아군은 이 두개 성시에 배치된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일제의 중요한 군사적후방에 심대한 혼란을 조성시키며 놈들의 쏘련침공작전을 견제할 계획이였다 .
그리하여 아군부대들은 1939 년 8 월에 돈화현으로부터 안도현 대사하와 대장강 ( 현재는 류수촌 ) 일대에로 진출하였다 .
이때 아군지휘부에서는 조성된 정황에 비추어 위성타원전술을 쓰기로 하였다 . 위성타원전술이란 성을 포위하고 그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오는 증원군을 치는 전술이다 . 즉 우리의 한 부대가 적의 작은 성을 포위하면 포위속에 든 놈들은 《 큰 집 》 에 증원을 청하게 된다 . 이때 우리의 주력은 사전에 적증원대가 올 유리한 지점에 매복하였다가 그놈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린다 .
이 전술에 근거하여 아군지휘부는 우선 대사하의 집단부락을 포위공격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안도현성에서 달려올 적증원대를 대사하 남쪽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사하고개에서 소탕할 계획이였다 .
그리고 대사하를 포위공격하면 비단 안도현성의 적들만이 아니라 연길현 명월구에 주둔하고있는 적들도 증원대를 파견할것이며 이때 그 적은 대장강 남쪽에 있는 남구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하였다 .
안길 , 전동규 그리고 내가 지휘하는 13 련대 , 15 련대 , 경위려단 제 3 련대의 일부 력량 300 여명의 아군부대들은 23 일 새벽 남구에 이르렀다 . 전부대는 대장강으로 통하는 큰길 남쪽 강냉이밭과 북쪽고지에 매복하였다 .
한편 량형우 , 리룡운동지들이 지휘하는 제 14 련대와 경위려단 제 3 련대 일부와 제 13 련대의 일부 력량 300 여명은 같은 날 새벽에 대사하부락근처에 도착하였다 . ❞
〈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편 중에서 대사하 대장강 전투 〉
인용문에서 중요한 내용은 전장에서 적용되는 전술적 차원의 개념이다 . 인용문에서 《 위성타원전술 》 을 적용하여 대사하전투를 진행하였다고 하였다 . 위성타원전술에 대해 인용문에서 아주 잘 설명을 했기에 군사전략가도 아닌 필자가 굳이 아는 체 따로 분석할 필요가 없다 . 필자의 판단으로는 적들에게 아군의 전투행위를 일부러 노출시키고 이를 소멸하기 위해 달려드는 적을 매복기습하여 소멸하는 전술이 아닌가 한다 . 결국 이 전술이 제대로 먹히면 “ 꿩 먹고 , 알 먹고 , 둥지 털어 불 땐다 .” 는 우리네 속담이 그대로 딱 맞아떨어지는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
인용문의 내용을 보면 비록 유격대원들이 유격전술을 사용하지만 정통군사학의 전투교리나 전술 · 전략도 자유자재로 사용했음을 잘 알 수 있다 . 결국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나 그 괴뢰군들이 위만군 , 악질 조선인 친일분자들로 구성된 특설대는 유격대의 전술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 정규군이 전투 시 적용하는 전술 · 전략도 전투상황에 맞게 모두 사용하면서 반면 정규군들은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유격전술을 사용하였으니 전술적 측면에서 유격대원들이 사용하는 수가 훨씬 더 많고 정교하다고 볼 수가 있다 .
물론 아무리 전술 · 전략의 수가 많다고 해도 이를 전투상황과 시류 또는 국제정치적 변동을 제대로 알고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 1932 년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유격대원들은 김일성 주석의 뛰어난 지략에 충실히 따랐기에 당시 세게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들과 맞선 전투에서 연전연승할 수가 있었다 .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
❝ 일제는 대사하부락주위에 토성을 높이 쌓고 사방에는 포대를 구축하였다 . 부락에는 경찰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2 개의 포대가 있었고 경기관총 2 자루와 보병총 등으로 무장한 30 여명의 경찰놈들이 있었다 . 그리고 위만군 한개 중대력량이 이 부락을 드나들었고 수십명의 무장자위단이 욱실거리고있었다 .
우리는 전투행동에 앞서 이전부터 우리와 련계가 있는 대사하부락콩기름공장의 한 로동자를 통하여 부락안의 정형을 알아냈다 .
그의 말에 의하면 놈들은 해가 뜰 때 성문을 열며 보초를 철수한다는것과 그때에는 많은 부락민들이 물을 길으려고 밖으로 나온다는것이였다 . 성안에는 우물이 없었던것이다 .
지휘부에서는 우선 날이 밝기 전에 토성을 포위하기로 하였다 . 그리고 편의대를 조직하여 물을 길러 나온 인민들의 물지게를 바꾸어 메고 성안으로 들어가 적경찰서의 포대를 감쪽같이 점령하고 나머지 적을 소멸한 다음 소사하고개에로 달려가 적증원부대를 섬멸할 계획이였다 .
그리하여 아군지휘부는 일부 병력을 안도와 무송방향에 방차대로 파견하고 전체 부대는 북문과 서문으로 진입할 작정으로 토성밖의 남새밭주변에 매복하여 날밝기를 기다리고있었다 .
그런데 해가 뜨기 얼마전이였다 .
한놈이 북문으로 하여 남새밭으로 나왔다가 아군을 발견하자 급히 성안으로 뛰여들어가려고 하였다 .
우리의 전투계획은 틀어지게 되였다 . 그러자 지휘부에서는 불의에 대병력을 성안에 돌입시켜 경찰서를 점령할것을 결심하였다 .
돌격명령이 내렸다 . 우리는 성안으로 뛰여들어가는 그놈을 쏘아눕히고 북문으로 성안에 돌입하였다 .
총소리를 들은 적경찰과 자위단놈들은 포대에 의지하여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
아군은 집들에 의지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
그러나 적의 저항은 예상외로 강했다 . 그리고 2 개의 포대는 매우 견고하므로 저격무기로써는 파괴할수 없었다 .
이때 우리는 경찰서근방에서 지주의 집을 발견하였다 . 민감한 우리 대원들은 적들이 그 집에 대해서는 주의를 덜 돌릴것임을 포착하고 그 집에 접근하였다 .
지주집을 리용하여 우리는 《 관통전술 》 을 썼다 . 즉 지주집에 뛰여들어 벽을 뚫고 포대에로 접근했던것이다 . 포대에 접근한 우리 동무들은 수류탄을 던졌다 . 그러나 포대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그 화구들에서는 여전히 적기관총이 불을 뿜어댔다 .
그리고 경찰서안에서는 급해맞은 경찰 한놈이 안도현성에다 빨리 증원부대를 보내달라고 전화통이 터지게 소리를 치고있었다 .
우리의 타산은 맞아떨어졌다 . 그런데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였다 . 한시바삐 부락의 적을 소멸하고 부대주력은 소사하고개에로 출동하여야 하였다 .
그래서 우리는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 결사대는 우박치듯 퍼붓는 탄우속을 뚫고 수류탄묶음을 적포대의 화구에 집어넣었다 . 저주로운 적화구는 아가리를 다물었다 . 그러자 아군은 만세소리 높이 경찰서를 점령하였다 .
전투는 예정한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 더 지체할 사이가 없었다 . 부대는 대사하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급히 소사하고개에로 달렸다 .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 대사하로부터 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제놈들은 9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타고 아군이 매복하려던 소사하고개를 넘어오고있지 않는가 .
적들은 아군방차대의 사격을 받으면서도 발악적으로 전진하였다 . 적들은 드디여 고개우의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였다 .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적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
적들은 경기관총 , 중기관총 , 박격포 , 적탄통 등으로 발악적인 사격을 가해왔다 . 전투가 계속될수록 정황은 우리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
이때 14 련대의 정치위원인 량형우동지가 소리높이 이렇게 웨쳤다 .
《 일제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다 . 놈들은 지금 쏘련을 침공하고있다 . 저 원쑤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시자 . 쏘련을 피로써 옹호하자 . 》
그의 구호는 우리 용사들을 영웅적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 우리 용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언덕진 고개우로 돌진하였다 .
적탄은 비발치듯 날아왔다 . 그러나 적개심에 불타오른 우리 동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고개우로 톺아올라가는데 성공하였다 . 그리하여 아군은 마침내 소사하고개를 점령하였으며 적련대장이하 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
그런데 우리는 이 전투에서 우수한 지휘관이며 공산당원인 량형우동지를 잃게 되였다 . 그는 동지들의 품에 안겨 마지막숨을 거두면서 북쪽하늘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이렇게 유언하였다 .
《 김일성 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것입니다 .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쏘련을 옹호하여 끝까지 싸웁시다 . 조선혁명승리 만세 ! 》 ❞
〈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편 중에서 대사하 대장강 전투 〉
사진 .4 대사하전투에서 희생된 항일투사 양형우
▲ 소사하고개에서 위기에 빠진 항일유격대의 전투의지를 불러 세우기 위해 “무장으로 소련을 옹호하자”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던 양형우 항일혁명투사. 양형우 항일투사의 힘찬 외침에 힘을 얻은 유격대원들은 용기백배 목숨을 사리지 않는 진격전을 전개하여 소사하고개를 점령하고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양형우 항일혁명투사는 그 전투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인용문은 전투상황을 묘사한 것이기에 상세하게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 다만 인용문에서 전투상황에 대한 것 이외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다 . 인용문에 소사하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한 몸 내 던진 양형우 항일투사가 고지점령전투시 외친 구호이다 . 안도현 대사하 · 대장강전투를 조직하게 된 주된 이유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소련침공을 좌절시키기 위해 배후교란전술에 의한 것이었다고 앞에서 살펴보았다 .
이를 증명하는 구화가 바로 인용문에 나와 있다 . 소사하 고지점령을 필히 달성해야 하는 이유가 양형우 항일투사가 외친 아래 구호에 잘 나와 있다 .
“ 이때 14 련대의 정치위원인 량형우동지가 소리높이 이렇게 웨쳤다 .
《 일제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다 . 놈들은 지금 쏘련을 침공하고있다 . 저 원쑤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시자 . 쏘련을 피로써 옹호하자 . 》 ”
결국 이 외침소리는 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절대불변의 법칙과 같은 신앙과 같은 것이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이 외침이 결국 아주 불리한 정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 인용문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당시 불리했던 상황을 승리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
“ 전투가 계속될수록 정황은 우리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 …… 그의 구호는 우리 용사들을 영웅적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 우리 용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언덕진 고개우로 돌진하였다 .
적탄은 비발치듯 날아왔다 . 그러나 적개심에 불타오른 우리 동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고개우로 톺아올라가는데 성공하였다 . 그리하여 아군은 마침내 소사하고개를 점령하였다 .”
결국 양형우 항일투사의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정신과 당시 공산주의 혁명의 성지와 같은 소련을 옹호하자라는 외침소리가 유격대원들을 그 어떤 불리한 정황도 뚫고 나가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
필자가 하고자 하는 결론은 역사의 모순이다 . 1939 년 8 월 온갖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조상들인 항일투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옹호했던 소련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 소련은 1953 년 스탈린 사망 후 서서히 개량화 되기 시작했으며 1955 년 후루 시초프가 전면에 등장한 이후부터 급격히 수정주의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 결국 1950 년대 중반이후 불어 닥친 수정주의는 1991 년 12 월 25 일 소련의 해체라는 비극적 사태를 가져오며 세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연쇄적으로 붕괴하였다 .
역사의 모순도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 우리 조상들이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을 바쳐가며 옹호했던 소련이 그로부터 정확히 52 년 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성지이자 주춧돌인 무너져 내리고 말았으니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단적으로 증거 해준다 .
물론 항일투사들이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었으며 대를 이어가며 사상을 옹호고수했던 북은 세계사회주의가 모두 몰락했어도 끄덕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 오히려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주의사상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고 공고한 사상체계를 수립 완성하여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 결론적으로 오늘 날에 와서 인용문을 보니 목숨 바쳐 옹호 고수하고자 했던 소련은 사상의 변질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물 먹은 흙 담 벽처럼 무너지고 마는 역사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인용문의 내용이다 .
결국 대사하전투는 귀중한 항일혁명투사들 몇을 잃었지만 승리를 하고 대사하지역을 일시적이나마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했다 .
대장강전투
❝ 한편 남구에 매복하였던 아군부대들은 명월구의 적증원대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놈들을 다시금 유인할 목적으로 그 일대의 집단부락들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
날이 어두워지자 부대는 명월구에서 대사하쪽으로 이동하는 적증원대를 감시하기 위하여 4 명의 대원들을 남겨두고 대장강집단부락과 그 주변부락들을 습격하기 위하여 남구를 떠났다 .
경위중대와 안길 , 전동규동지들이 지휘한 15 련대는 대장강집단부락을 습격하여 마을을 해방시켰다 .
이날밤 나는 한개 중대병력을 데리고 대장강부락에서 동쪽으로 10 리가량 떨어진 안도와 명월구사이의 자동차도로주변에 위치한 동양툰부락으로 갔다 .
나는 여기서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안도현성 ,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 대사하를 해방시킨 인민혁명군부대가 지금 대장강 , 동양툰 기타 수많은 부락들을 점령하고있으니 한바탕 싸워보려면 오라 . 》 하고 위협조로 통고하였다 . 내가 이렇게 한것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적에게 우리의 위력을 시위하며 놈들속에 미리부터 혼란과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명월구로부터 6 대의 자동차에 탄 적증원대가 나타났다 . 우리 매복조원들은 때를 기다려 불의사격을 개시하였다 .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돌아치다가 자동차에서 뛰여내려 허겁지겁 대항하였다 .
우리는 그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는 일단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적들은 우리가 자취를 감추어버린 후에도 오래동안 눈먼사격을 하다가 나중에는 대사하 , 안도현성방향으로 도망쳐버렸다 .
대사하쪽으로 간 적들이 다음날에는 틀림없이 돌아올것이라고 짐작한 우리는 그놈들을 매복전으로 섬멸할 계획밑에 그 이튿날 새벽에 다시 남구에 가서 매복하기로 하였다 .
지휘부의 명령으로 전체 부대는 마치 먼길을 떠나는것처럼 행군준비를 갖추고 부락을 출발하였다 .
그것은 이 근방에 아군이 없다는 인상을 적들에게 줌으로써 놈들의 전투태세를 늦추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
남구는 대장강에서 약 5 리쯤 떨어진 남쪽에 있는 골짜기였는데 안도현성과 명월구간의 자동차도로가 바로 이 골짜기를 통과하고있었다 .
부대들은 골짜기와 개울의 지형지물을 잘 리용하여 유리한 지대에 매복하였다 . 아군의 매복지점으로부터 도로까지는 60m 가량 되였다 .
그런데 웬일인지 이날 12 시가 되도록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
날씨는 매우 무더워 매복하고있기가 힘들었으나 12 시경부터는 잠시 소낙비가 내려 더위를 좀 덜어주었다 .
우리들은 초조해하지 않고 적들을 본때있게 쏴눕힐 통쾌한 전투를 생각하면서 무기에 이상이 없는가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
이윽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안도현성쪽으로부터 적들을 만재한 군용자동차 6 대가 약 50m 간격을 두고 달려오고있었다 .
선두차에는 중기관총 , 경기관총 등이 걸려있었다 . 그런데 언덕으로 올라오던 선두차가 진창에 멈춰섰다 .
운전수가 황급히 뛰여내려 자동차기관부뚜껑을 열어제꼈다 . 뒤따르던 자동차들이 한줄로 멈춰섰다 .
예상치 않게 놈들은 우리의 매복권내에 모두 들어선것이였다 .
우리 동무들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마음을 조이면서 사격신호를 기다리였다 .
자동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선두차가 방금 다리를 건너서려고 하였다 . 바로 이때 사격개시를 알리는 총소리가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
아군의 기관총들과 보병총들은 적자동차들을 향하여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 놈들은 저항할 사이도 없이 자동차우에 앉은채로 혹은 자동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무리로 쓰러졌다 .
행렬가운데 끼워있던 자동차 1 대는 앞차들때문에 갈길이 막혔으므로 당황한 나머지 길옆에 있는 강냉이밭으로 냅다 달리더니 개울홈에다 육중한 차체를 처박았다 .
아군의 집중사격을 받으면서도 적들은 자동차우와 밑에서 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
이때 나는 《 수류탄을 던져라 . 》 하고 웨치면서 나자신도 여러개의 수류탄을 던졌다 . 수류탄과 기관총의 불벼락을 얻어맞은 적들은 견디여내지 못하고 무리로 쓰러졌다 .
그 러나 워낙 적들은 수량상 많았으므로 살아남은 놈들은 자동차밑과 도로주변의 기복들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 적아간에 가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
이때 대장강쪽으로 통하는 길 우측고지에 집결하였던 경위 3 련대 2 중대는 남구쪽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따라 적에게 접근하여 13 련대와 15 련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2 중대는 즉시에 박원규동지의 지휘하에 고지에서 내려 개울물둔덕에 의지하면서 적에게 접근하였다 . 적의 화력은 세찼었다 . 우리 동무들은 머리를 들수 없어 포복전진을 하였다 .
적들은 여러정의 경기관총과 중기관총으로 발악적으로 저항하고있었다 .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는 동무들도 있었다 .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 용사들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였고 가슴은 복수심으로 끓어번지였다 .
사방에서 구호를 불렀다 . 안길동지는 《 조선인민과 쏘련인민의 철천지원쑤인 일제놈들을 소탕하라 . 》 하고 웨쳤다 .
2 중대의 증원화력이 주력부대의 화력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 용사들이 틀어잡은 15 정이상의 경기관총과 수백정의 보병총들은 적진을 향해 련속 멸적의 불벼락을 퍼부었다 .
그러나 우리의 화력이 세찰수록 놈들의 발악도 집요하였다 .
선두차에 탔던 놈들은 물웅뎅이와 새밭에 숨어서 경기관총으로 완강히 저항하는것이였다 . 그런데 그놈의 경기관총위치를 정확히 포착할수 없어 적지 않게 애를 먹었다 . 적기관총수놈은 우거진 새밭속에 숨어있었으므로 쉽게 발견되지 않았던것이다 .
마침내 김자린동무가 새밭에서 풀대가 흔들리는것을 발견하였다 . 나는 보병총사격으로 단방에 새밭에 숨은 적기관총수놈을 쏴눕혔다 .
적들의 화력은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 그러자 아군의 돌격나팔소리가 울렸다 .
우리 용사들은 함성을 울리며 적진에 달려들어 원쑤놈들을 족치였다 .
이 전투가 끝날무렵에 안도현성방향에서 적증원부대가 자동차로 달려왔다 . 그러나 놈들은 아군방차대에 의하여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고말았다 . 전투는 약 2 시간 계속되였다 .
전투가 끝나고 전장수색을 하였는데 15 련대 전연에서 수상한 놈을 발견하였다 . 그놈은 부상당한데도 없이 죽은체 하고 쓰러져있었다 .
그래 우리 대원이 그놈의 몸뚱이를 다치자 후닥닥 일어나 뛰기 시작하였다 . 우리 동무들은 《 네놈이 얼마나 뛰나 보자 . 》 하고 그놈을 내버려두었다 .
그놈은 자동차길을 따라 대사하쪽 고개를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올리뛰다가 흠칫 놀래며 못에 박힌듯이 서버렸다 .
고개우에 있던 우리 방차대동무들이 그놈을 맞받아 내려오고있었던것이다 .
그놈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두손을 머리우에 쳐들고 싹싹 비비며 《 오 , 신이여 도와주오 . 》 하고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 그리고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면서 량손에 돌을 쥐고 자기 대가리를 짓쫏는것이였다 .
악귀의 최후발악이였다 . 잠시후 그놈은 죽어버렸다 .
이날 전멸된 적의 부대는 우리가 늘 벼르고있던 가장 악질적인 미야모도 《 토벌대 》 였다 . 그속에는 일제놈 150 여놈과 조선인특무 , 악질지주 , 자본가의 자식들로 조직된 특설부대성원이 20 여놈이나 있었다 .
이 미야모도부대는 유격대를 《 전멸 》 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리의 뒤만 따라다니던 악질적인 《 토벌 》 부대였다 . 이놈들은 자기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 통비분자 》 라고 하며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극악한 놈들이였다 .
이처럼 악독한 일제놈들의 부대는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수천수만번의 전투에서 단련된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하여 완전히 섬멸되였다 . 특설부대에서 한놈 , 자동차운전수 한놈만 남고 두목 미야모도를 비롯한 적들은 전멸되였던것이다 .
우리들은 이날 전투에서 경기관총 5 정과 보병총 150 여정 , 적탄통 2 문을 로획하였다 .
2 일간의 전투에서 적군살상포로 ( 자위단까지 포함하여 ) 는 500 여놈에 달하였으며 경기관총 7 정과 근 300 정의 보병총 , 여러문의 적탄통 그리고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
그러나 우리는 애석하게도 량형우동지 등 5 명의 전사자와 9 명의 부상자를 내였다 . ❞
〈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편 중에서 대사하 대장강 전투 〉
위 인용문 역시 전투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라 특별하게 분석할 필요는 없다 . 다만 위 전투상황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교훈적인 내용이 몇 가지가 있다 . 이에 대해 간략히 보기로 하자 .
첫째 . 당시 항일유격대원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조국의 혁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한 몸 아끼지 않고 투쟁을 했다 .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적들이 쏜 탄알들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속에 옆의 동지들이 적탄에 맞아 희생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치의 물러섬 없이 납작 엎드려 진창을 해쳐나가 적을 소멸하는 정신 현대 남쪽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필자의 생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본다 . 그러니 당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조상들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 바로 이러한 백절불굴의 정신이 있었기에 항일투쟁을 승리로 결속할 수가 있었다 .
둘째 . 용감성과 용맹성이다 . 당초 전술상 목표로 했던 적들이 아군이 파 놓은 함정으로 들어오지 않자 대담하게 집단부락을 공격하고 더 나아가서 적들에게 전화를 하여 자신들이 집단부락을 공격하고 일본군과 괴뢰군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통보를 하였다는 점이다 . 얼마나 대담하고 용감한 항일투사들인가 . 결국 적들은 최현 항일투사의 대담성에 말려들어 아군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
셋째 . 어떤 경우에도 세워놓은 목적을 달성하는 정신이다 . 대사하전투에서도 소사하고개를 미리 점하지 못해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결국 육탄으로 돌격하여 소사하 고개를 점령하고 대사하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 위 인용문의 대장강전투 상황 역시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적들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지게 하려는 작전이 잘 먹혀들지 않자 직접 전화를 하여 함정으로 불러들이는 대담성과 용감성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1930 년대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이 정신 , 신념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넷째 . 악질 토벌대장 미야모토를 죽이고 그가 이끌던 부대를 전멸시키는 대 승리를 안아왔다 . 미야모토가 얼마나 악질적이었는지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이 미야모도부대는 유격대를 《 전멸 》 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리의 뒤만 따라다니던 악질적인 《 토벌 》 부대였다 . 이놈들은 자기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 통비분자 》 라고 하며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극악한 놈들이였다 .”
항일무장투쟁시기 악질 토벌대장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 그 중에 하나가 바로 1939 년 8 월 안도현 대장강전투에서 죽어나자빠진 미야모토이다 .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들 속에서는 유격대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면서도 자신들을 《 창해 ( 滄海 )- 넓은 바다 》 로 유격대를 《 일속 ( 一粟 )- 한 알의 낱알 》 로 묘사를 하면서 우쭐댔다 . 유격대를 《 창해일속 ( 滄海一粟 ) 》 , 넓은 바다 속에 떠다니는 한 알의 낱알로 무시하였다 . 하지만 유격대와 맞선 전투 특히 조선인민혁명군들과의 전투에서는 크건 작건 거의 승리하지 못하였다 . 이런 자들이 자신들의 군사기술적 , 수적 우세만을 두고 유격대를 창해일속이라고 하였으니 오늘 날에 와서 보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
다섯째 .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부역한 조선인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다 .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
“ 이날 전멸된 적의 부대는 우리가 늘 벼르고있던 가장 악질적인 미야모도 《 토벌대 》 였다 . 그속에는 일제놈 150 여놈과 조선인특무 , 악질지주 , 자본가의 자식들로 조직된 특설부대성원이 20 여놈이나 있었다 .”
대장강전투에서 죽은 적들 중에 조선인특무 , 악질지주 ( 중국인일 가능성이 큼 ), 자본가의 자식들로 조직된 특설부대성원이 20 여 명이나 되었다니 그 수가 결코 적다고 볼 수 없다 . 당시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 150 여 명의 약 1/7 이나 되었다니 놀라운 숫자이다 . 특히 조선인 특무라는 작자들은 결국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범죄자들과 어울려 그 범죄자들을 내 집에서 쫓아내고자 나선 형제들을 죽이기 위해 나섰다니 천추에 용납 못할 민족반역자들이다 .
민족반역의 세월을 사는 것은 어쩌면 일제강점기보다 오늘 날이 더욱더 심하다고 본다 . 오늘 날은 자신들이 민족반역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위들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으니 양심이 있는 민족주의자들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 그게 오늘 날 남쪽의 현실이다 .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바쳐가며 일본제국주의 참략자들과 맞서 싸웠던 조상들이 현재를 안다면 “ 오늘의 민족분단을 위해서 , 또 한 쪽에서 민족반역자들이 애국애족인양 행세하라고 목숨 바쳐 싸웠겠는가 ?” 하고 지하에서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
여섯째 .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장강전투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 . 대장강전투의 승리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
“ 이처럼 악독한 일제놈들의 부대는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수천수만번의 전투에서 단련된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하여 완전히 섬멸되였다 . 특설부대에서 한놈 , 자동차운전수 한놈만 남고 두목 미야모도를 비롯한 적들은 전멸되였던것이다 .
우리들은 이날 전투에서 경기관총 5 정과 보병총 150 여정 , 적탄통 2 문을 로획하였다 .
2 일간의 전투에서 적군살상포로 ( 자위단까지 포함하여 ) 는 500 여놈에 달하였으며 경기관총 7 정과 근 300 정의 보병총 , 여러문의 적탄통 그리고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
그러나 우리는 애석하게도 량형우동지 등 5 명의 전사자와 9 명의 부상자를 내였다 .”
1939 년 8 월에 있었던 대장강전투는 인용문을 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악질 토벌대장 미야모토를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그가 이끌던 일본인 부대와 조선인 특설대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 자식들로 조직된 특설대 등 모두 전멸시켰다 . 또 수많은 무기와 탄약 군수품을 전리품으로 노획하는 전과를 이루었다 . 적군 살상포로가 무려 500 여 명이라니 당시 대장강전투의 전과가 얼마나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말이 500 여 명이지 현실 속에 500 여 명을 세워놓으면 얼마나 그 수가 많은지 감이 올 것이다 .
지금까지 대사하전투와 대장강전투에 대해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보았다 . 우리는 해당전투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하면서 두 자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또 각각 한 자료만 참고를 했을 때 알 수 없었던 사실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이에 대해 이미 위에서 상세를 했기에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
첫째 . 대사하전투와 대장강전투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를 보면 해당 전투는 중국인 항일부대들이 치른 것으로만 묘사가 되어있다 . 물론 조선인들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국인부대에 조선인이 몇이 소속되어 전투에 참가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 하지만 필자가 그동안 분석해왔지만 당시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조직된 항일연군 구성원들 중 일반병사들 80~85%, 간부진 90% 이상이 조선인들이었다 . 물론 김일성 주석이 이끌던 조선인들로만 조직된 독립사단을 제외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
사정이 이러함에도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를 보면 마치나 중국인들로만 조직된 반일 · 항일부대에 의해 대사하 · 대장강전투가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를 한 것은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밖에 해석이 안된다 . 물론 전투지휘를 한 부대 간부들 중에 상급에 중국인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간부진 상급 몇 명이 전투를 지휘했다고 하여 그 전투가 중국인들에 의해 전개된 것처럼 묘사를 한 것은 누가 봐도 수긍하기 어렵다 .
반면 북측자료를 보면 중국인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는 조선인 이름이라도 나오지만 북측자료에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이것 역시 당 전투에 대한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 해당 전투를 지휘한 상급 몇 명을 제외하고는 중국인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아예 없었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 대사하전투와 대장강전투에서 희생을 당한 중국인 지휘관들인 하지장 , 후국충이 있다 .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이송덕 선생이 증언한 자료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 반면 북측자료에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
둘째 . 첫째항의 모순은 이런 관점에서 해소할 수가 있다 . 즉 당시 대사하 · 대장강전투는 《 반일통일전선전략 》 에 의해 조 - 중 양 민족의 항일연군에 의해 조직되어 진행되었으며 대 승리를 가져온 전투였다 . 물론 해당 전투에 참가한 인원의 대부분은 조선인들이었다 . 해당 전투를 지휘한 지휘부에 중국인들 몇 몇이 포진하고 있었다 . 중국인 지휘부는 전체적인 전투상황을 지휘하였으며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적으로 적과 맞붙어 싸운 대원들은 조선인들이었다 . 물론 각개 부대의 지휘부에 조선인들이 있었으며 실제 현장전투에서는 조선인들이 이끌어나갔다 . 여기서 해당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 중 굳이 공과를 따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 중요한 것은 조 - 중 양 민족이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군과 그 괴뢰군 그리고 부역자들을 전멸시키고 전투를 대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셋째 . 대사하 · 대장강전투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만 보면 해당 전투를 왜 조직했으며 그 목적이 어디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그저 일본제국주의 침략군과 맞서 싸워 이겼다는 정도 밖에는 알 수가 없다 . 하지만 북측 자료에는 해당 전투가 왜 조직되었으며 , 그 전투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하면서도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
대사하 · 대장강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세계정세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 즉 제 2 차 세계대전의 불꽃이 당겨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 소련은 동유럽쪽으로 확장해 나오는 독일 파시스트들의 전쟁야망을 저지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 서쪽의 상황이 위급하기 그지없는 때에 동쪽에서는 대동아공영권 실현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몽고와 시베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 결국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소련은 서쪽과 동쪽에서 공격을 받는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만다 . 이러한 소련의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직된 전투가 바로 대사하 · 대장강전투인 것이다 .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대사하전투에서 전투상황이 대단히 불리해지자 대원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치위원인 양형우 항일투사가 외친 구호가 바로 “ 이때 14 련대의 정치위원인 량형우동지가 소리높이 이렇게 웨쳤다 . 《 일제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다 . 놈들은 지금 쏘련을 침공하고있다 . 저 원쑤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시자 . 쏘련을 피로써 옹호하자 . 》 ” 이다 . 즉 당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주축국인 소련을 결사 옹호하여 혁명의 성지를 지켜내는 것이 바로 조선혁명의 진로를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이를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배후인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전투를 벌임으로서 일제의 발목을 잡아당겨 소련침공야욕을 분쇄하자는 궁극적 목적에서 조직된 전투가 바로 대사하 · 대장강전투인 것이다 . 당연히 조국해방투쟁인 것은 근본중에 근본이니 굳이 논할 필요는 없다 .
넷째 . 대사하 · 대장강전투에서 희생된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다 . 한쪽 자료만 보면 당시 희생된 투사들의 정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 하지만 두 자료를 동시에 분석해보니 당시 희생된 투사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와 북측자료를 종합하여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의 희생자들은 중국인 지휘관들인 후국충 , 하지장과 조선인 정치위원 양형우 , 허성숙을 포함한 5 명의 전사자와 그리고 부상을 당한 9 명의 대원들이다 .
반면 전과에 대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기에 분석하지 않고 양 자료만 올려주는 선에서 그친다 .
대사하 · 대장강전투 전과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 여구나 되었다 . 미야모도는 운전실에서 나오지도 못한채 죽었다 .
이틀동안의 전투에서 제 3 방면군은 적 250 여명을 살상포로하고 7 정의 경기관총과 700 여자루의 보총 , 권총 및 여러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
대사하 · 대장강전투 전과에 대한 북측자료
우리들은 이날 전투에서 경기관총 5 정과 보병총 150 여정 , 적탄통 2 문을 로획하였다 .
2 일간의 전투에서 적군살상포로 ( 자위단까지 포함하여 ) 는 500 여놈에 달하였으며 경기관총 7 정과 근 300 정의 보병총 , 여러문의 적탄통 그리고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
☞☞☞ 다음 회 차에는 대사하 · 대장강전투에서 희생된 허성숙 항일의 여투사와 최현 항일투사에 대해 세기와 더불어에 언급된 내용을 먼저 올려주고 악질 친일주구 이도선 부대가 전멸한 로진창 ( 로금창 ) 전투를 다루도록 한다 . ☜☜☜
자료제공 :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 이 창기 기자
2016 년 9 월 13 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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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합의서와 북미 합의서
Re:[항일연재50]악질 토벌대 미야모토 부대전멸 대사하 · 대장강전투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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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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