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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기 (110볼트 선풍기)
올 여름 선풍기 하나로 버텼다고 하면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찌는 더위에 화가 난 시민들이 에어콘은 겁에 질려 틀지 못하면서 애꿎게도 기상대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허나 기상대가 무슨 죄인가. 그들이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기상이변은 이미 예견된 것이지만 아무리 그러해도 이번은 너무 심했다. 다들 날씨에 귀가 쫑긋 선다. 29일째 푹푹 찌는 폭염, 오늘까지만 견디면 된다는 뉴스다. 밤사이 중부 곳곳에 비가 내리며 내일은 전국적으로 폭염이 꺾인다는 것이다. 기상대의 오늘이 벌써 여섯 번째이다. 저러다 틀리면 기상캐스터 또 어쩌려고 저러나 싶다. 그래도 믿어는 보자 했다. 정말 너무 더우니.....
그 시절은 선풍기 하나 가지고도 온 식구가 시원타하며 잘 넘겼는데 그 시절에 비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사실이고 이를 잘 참지 못하는 것도 맞는 것도 같다. 세상이 많이 또 변했다. 선풍기 하루 종일 틀어봐야 몇 푼 되지도 않는데 그 시절은 아버지가 주도권을 가지고 단속을 했다. 선풍기는 간단한 원리로 구동 되는 회전체이다. 선풍기가 등뼈가 구부러져 못 쓰면 못 썼지 기능이 망가져서 못 쓴 경우는 거의 없다. 고장이 났다고 해도 고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
전원을 넣어 보고 두 번째로는 퓨즈를 점검한다. 열선퓨즈를 점검하고, 돌아가는가, 빡빡한가, 회전은 잘되는가를 살핀다. 퓨즈를 교체하고, 기름을 칠하며, 콘덴서를 바꾸고, 열선퓨즈를 교환하면 수리는 끝난다. 장가들어 산 선풍기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쌩쌩한 것은 잘 썼다기보다는 망가질게 별로 없어서다. 노병은 사라질 뿐 죽는 것이 아닌 존재가 바로 선풍기다.
그런데 그 시절은 좀 달랐다. 어느 날부터 우리 집 선풍기(금성사)는 사용을 할 수 없었다. 110V/220V 겸용이 나오던 때 이후 110V출신인 선풍기는 제 명을 다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무렵부터 무려 쌀 25가마에 해당하는 집안의 보물인 TV 옆에는 작은 전기상자가 별도로 하나 더 놓였다. 사람들은 도란스라 불렀다. 트랜스(도란스)는 왜 필요하였던 것일까.
생산된 전기는 송전(送電)과 배전(配電)시설을 통해서 먼 거리를 가야 한다.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은 내 분야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송전이라는 것은 최종 변전소까지 전기를 수송하는 과정이고 배전이란 최종 변전소에서 각 수요가에게 전기를 나누어주는 과정을 말한다. 전기라는 것은 먼 거리를 가다 보면 손실이 생기기 마련인데 1961년 당시에는 송전 및 배전 손실(이하 송배전 손실)이 엄청 났다. 생산된 전기의 약 30%가 도중에서 없어진다고 했다.
전기 손실을 줄이려면 전선을 굵게 하든가 전압을 올려서 송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나 전선을 무작정 굵게 할 수가 없으니 고압전기를 송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154KV(15만 4천 V :특고압전기)라는 전압으로 장거리 송전하고 있었다. (당시는 345KV 초고압 송전시설이 없을 때였다).
154KV의 전기는 변전소에서 66KV(6만 6천 V)로 강하되어 수요지 근처에 송전된 다음 다시 22KV(2만 2천 V)로 강하되고 22KV의 전기는 또 다시 작은 변전소로 가서 3.3KV(3,300V)로 내려간다. 여기까지가 송전(送電)에 해당된다. 다음은 배전(配電)이 되는데 3.3KV의 전기는 전봇대에 매달린 변압기에 의해 100V가 되어 각 가정에 연결된다.
도합 4단계의 변압기를 거쳐 각 가정에 송전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합리적인 송전방식은 먼 거리는 154KV의 전압으로 송전하고 수요지 근처에 있는 변전소에서 22.9KV로 강하한 다음, 이 전기를 전봇대 위의 변압기에서 220V의 전기로 만들어 각 가정에 보내는 방법이다. 단 두 번의 변압기만을 거쳐 최종 수요처인 각 가정까지 간다면 얼마나 효율적인가.
100V 송전하는 쪽과 220V 송전하는 방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송전은 154KV가 전담을 하여 초고압 송전방식으로 하고 배전은 3.3KV에서 22.9KV로 바뀌고 각 가정에서는 100V대신 220V를 사용하는 식으로 모두 기존보다 고압전기를 쓰게 되니 송배전 손실률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정부나 한전에서는 당시 이러한 송배전 구조로 개선키로 결정하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썽없이 100V의 전기 대신 220V의 전기를 각 가정에 보급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220V전기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관념이 농후할 때였다. 일본은 아직도 100V의 전기를 쓰고 있다.
전 세계 176개 나라 중 165개 국가가 220V의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100V나 110V를 쓰고 있다. 어떤 일이든 일단 일이 시작돼서 정착이 되면 이것을 다시 뜯어고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뜯어고치는 쪽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이 뻔히 나오는데도 이것을 시정할 때는 말썽도 생기고 장구한 시간도 필요하게 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미 전국의 전기가설을 100V로 해놓았으니 이것을 단번에 220V로 승압(昇壓)하자면 송전 및 배전시설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고 각 가정에서 쓰고 있는 전기기구를 몽땅 갈아 치워야 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기시설을 100V로 가설한 후에 220V의 전기로 뜯어고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사업이다.
하지만 전기가 없는 지역에 새로 전기를 가설할 때에는 처음부터 220V의 전기를 공급하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농어촌 전화사업을 하려는 1965년 당시 농어촌에는 거의 전기가설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220V의 전기공급사업을 위해서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늦은 개발이 역으로 득이 된 셈이다.
당시 농어촌 전기의 사용 목적은 주로 조명이기 때문에 우선 220V용 전구부터 긴급 제작토록 했다. 그리고 수요가의 불편이 나올까 봐서 220V를 100V로 내리는 트랜스를 무료로 공급키로 했다. 전구는 220V를 쓰고 라디오나 선풍기는 100V짜리를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불평이 나올 소지가 컸다.
도회지 사람은 100V를 쓰는데 시골 사람은 멸시 당하기 때문에 220V를 쓰게 됐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파동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홍보책자도 만들어 보급했고, 지방 공무원에 대한 교육도 시켰지만 이런 조치만으로는 걱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朴 대통령의 생가부터 220V로 전기 가설을 하자」는 계획이었다.
朴 대통령 생가도 220V로 했으니 모두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산(善山)에 있는 朴 대통령 생가에는 朴 대통령의 백형(佰兄)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220V 전기가 가설된 집은 선산에 있는 朴 대통령의 생가가 되었다.
그 후 아무 탈 없이 몇 년이 지나갔는데 어느 날 'TV가 펑크났다', '가전기기가 못쓰게 되었다', '국가적 손실이다', 심지어 '나라망치는 정책이다'라고까지 하는 220V 승압정책에 대한 심한 공격적 기사가 대문짝만큼 크게 나왔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는 화곡동으로 이사를 간 사람인데 당시 화곡동은 새로 건설되고 있는 주택지구였다.
그래서 한전은 처음부터 220V로 가설해 버렸던 것이다. 기자는 지금까지 쓰던 100V짜리 가전기기를 갖고 이사를 한 것인데 한전에서 공짜로 준 트랜스도 전 입주자가 이사 갈 때 몽땅 갖고 가버려 화가 난 기자가 대서특필을 내 사단이 난 것이다. 당시 농어촌에서는 전기만 끌어주면 고마워했고, 동네 전체가 220V를 사용하니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생활수준이 올라가서 농어촌에서도 전기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220V용 전기기구의 생산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220V 전용 전기기구 수요량은 생산업체로서는 경제적 생산단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100V와 220V 겸용 전기기구 제조를 강력히 권장했다.
1973년 12월, 한전에서는 TV외 3개 품목에 대한 110/220V 겸용 및 220V 전용기기에 대한 개발비를 보상키로 하는 조건으로 생산토록 했으며 동시에 전기다리미 외 24종의 110/220V 겸용 기구에 대한 KS규격을 제정했으며 그 후 품종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110/220V 겸용기기 개발에는 기술적 문제점이 있다.
100V를 쓰는 것보다 220V를 사용할 때는 전선은 가늘어도 되나 인체에 대한 안전상 전선피복은 두껍게 해야 한다. 그러니 100/220V 겸용일 때에도 전선이 굵어야 하고 전선 피복도 두껍게 해야 한다. 구조도 좀 복잡해지고 부품도 더 들게 된다. 그래서 겸용형은 값이 2∼3% 비쌌다.
당시는 나무로 된 전주를 사용했었다. 그런데 나무전주는 전부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서 콘크리트 전주를 국산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콘크리트 전주가 상식화되어 있는데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콘크리트 전주는 잘 부러진다고 생각했고 만일 중간에서 부러지면 큰 사고가 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전선은 154KV(15만 4천 V)로 단일화 해서 썼는데 60년대에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발전량은 급격히 늘어갔다. 154KV 송전방식보다 더 효율이 좋은 345KV방식이 채택되었다. 송전선은 대전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서울, 동쪽으로 울산, 서쪽으로 여수로 Y자형이 된다. 꼭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345KV 송전선을 「전기 고속도로」라고 불렀다.
당시 한전에서는 1970년 2월 현대와 가계약을 했는데 철탑은 완제품을 수입해 조립만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한전은 투자비가 몹시 부족해서 거의 모든 것을 차관으로 수입해 발전소를 지을 때인데 박통이 발전소 건설현장 시찰 때 "한전도 앞장서서 국산품을 쓰도록 해!” 라는 박통의 기합이 떨어졌다. 졸지에 한전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345KV 사업도 철탑제조용 소재만 수입하는 것으로 사업내용을 바꾸었다. 드디어 1976년 10월에 (新)여주∼(新)옥천 간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345KV 초고압 송전선이 개통되었다.
옥천에 엄청난 송전탑이 존재하는 것은 그런 연유다. 이 때쯤에는 송전탑 제조용 각종 철강재도 국산화되고 기술도 향상되었다. 그 덕분으로 1973년도에 석유파동이 나자 중동 및 동남아에 진출해서 송전탑 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원기계공업기지에서 154KV 및 354KV 대형 변압기가 국산화됨에 따라 그 후의 공사는 순전히 우리 힘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됐다. 1985년에는 전국적인 환상망(環狀網)이 구성되었다.
환상망이라는 것은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전기공급계통이 두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한쪽 송전선이 고장 나도 다른 송전선을 통해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송전방식은 345KV 초특고압과 154KV 특고압으로 단순화됐으며 전압강하가 거의 없는 국제수준으로 개선되었다. 송배전시스템을 현대화함으로써 투자비를 대폭 감축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전기 없이는 가정생활도 원활히 할 수 없고 공장도 못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3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다. 이러한 일이 얼마나 큰 역사(役事)였는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110V 선풍기에 220V로 승압하는 트랜스를 달면 고장 난 것이 아니니 지금도 잘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몸이 달라져 버렸다. 발로 꼼지락거려 선풍기를 켜다가 이제는 타이머도 부치고 바람도 종류를 다양하게 늘여 놓고 리모트 콘트롤을 하는 불편을 용서하지 않는 처지로 변신을 했다.
문명의 편리함은 나태함을 연출하고 또 있다. 산업용 전기는 싸고 가정용은 비싼 것이 요즘의 화두다. 생산원가를 어쩌든 낮추어 상품 경쟁력을 높이자는 정부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제는 바꿔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요즘은 전봇대에 꼬여 있어 안전에 위협을 주고 미관도 해치는 케이블선이나 통신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정부는 정비에 향후 5년 동안 2.5조 원이 투입한다고 발표를 했다. 격세지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자니 전기의 소중함이 다시금 새롭게 느껴진다. 미국이나 일본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220V를 결국 우리는 해낸 셈이다. 전기의 우여곡절, 세상사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젊을 적과는 달리 요즘 박통을 나는 여러 면에서 다시 느끼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