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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경 140칸 용주사의 전경 글 사진 네이버에서 펌
용주사는 신라 고찰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된 것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능을 지으면서 원찰로 삼았다.
그 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주사는 고승 보경스님이 정조를 만나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陵地)가 있다고 진언했던 것이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
8만냥만이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시주만 보더라도 당시 경제성과 호응이 대단히 뜨겁게 느껴진다
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더니 이 절도 하나의 예술작이라 할 수준의 김홍도의 탱화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이것은 아들인 정조가 슳프게 구천을 떠도는 아버지를 용으로 승천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작업으로 이루진 것이리라
해찬솔님 사진 감사합니다.
삼문 옆으로는 궁궐의 구조와 같이 방들이 7개가 있는 것이 일반 사찰과 다르고 궁궐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절 문이 사대부집 대문 같다. 사진 진골님 작 감사합니다.
삼문은 평사시 가운데 문은 닫아놓았다가 제사를 지낼 때 열어놓고 양쪽 출입문만 이용한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이런돌이 쭉 늘어 서있다
절 어귀에 이르면 연풍교(連豊橋)가 있는데, 그 주변의 자연석에는 '到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말
제목이 승무이긴 하지만 절앞에 웬 시가????
오랫만에 시 한편 읽어보시는 것도 삶의 여백을 즐기시는 것은 아닌지.
우린 모두 고등학교 시절 이시를 외느라고 애쓴 적이 있지 않은가 추억을 생각하면서 이시를 올린다.
시인이 이 절에 와 승무를 보고 이글을 썼다고 했으며 그런 인연으로 이곳에 시비가 세워짐
명성황후가 즐겨 보셨다는 승무 우리 모두 사는 것은 번뇌라 !!!!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용주사라는 흰글씨가 단아하고 예쁜 건물과 잘 어울린다.
여인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대문을 삐긋이 열고 내다보는 것 같았다.}
사진 네이버
천보루 사진 네이버 펌
이 천보루 돌 다리도 절에서는 보기 힘든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기둥이라 한다.
호성전과 '부모은중경'
사도세자의 장조와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정조대왕과 효의왕후 김씨의 위폐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
호성전 앞에는 불교의 '부모은중경'이 탑에 세겨져 있어 정조의 효심을 또 한 번 알 수 있게 하는 설치물이었습니다.
부모은중경탑 부모은혜 열 가지
첫째, 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보호해주신 은혜
둘째,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 쓴 건 삼키고 단것은 밷어 먹여준 은혜
다섯째,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신 은혜
여섯째, 젖 먹이고 사랑으로 길러 주신 은혜
일곱째, 목욕세탁 더러움을 씻어 주신 은혜
여덟째, 멀리 떠나가면 근심 걱정하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는 모진 일 하신 은혜
열번째, 임종 때도 자식을 위해 근신하신 은혜
사진 글 인터넷펌
(어머니 미안해요 살아계실 때 잘 못해드려서...낭만 흑! 흑! 흑! )
5층 석탑 진골님 작 감사합니다.
이탑은 절 뒤쪽 좀 올라가서 진골님 감사합니다.
어느스님? 의 사리탑인데 근래 작이긴 하나 조각도 섬세하고 화려하거니와 무늬 진 담장 역시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를 뿅가게 했다. 한번 가시거든 꼭 들리시기를...
사진 네이버
대웅보전
영조의 명으로 지어진 절인 만큼 입구에서는 의젓하게 들어앉은 이자리는 제일 명당자리라고 해설사는 말한다.
안, 천장에는 오방색인 단청으로 경건하기 보다는 오밀 조밀 섬세하게 꽉 찬 단청으로 눈이 부시고
천장에 가로로 길게 늘어진 조각품인 살아 꿈틍거리듯 약동하는 용은 사도세자가 간간이 찾아와 흐느끼는 아들인
정조를 굽어보며 오히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지키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사진 그리고 해설 해찬솔님 감사!
석가모니 부처 양 옆으로 오른쪽에 보처 약사불(병을 치료 관장), 왼쪽에 아미타불(극락정토를 관장)의 세 분 부처님
네이버 펌
안에는 또다른 탱화로 눈이 부셨으니 네이버에서 펌한 것을 올려본다
(모든 중생을 위하여 빛을 전해주시는 웅아하고 웅장하고 거룩하신 부처님 네이버펌
그리고 천장에는 용 두마리가 가로로 길게 조각되어 있는데 용머리는 생동감 있어 꿈틀거리는 듯 .
네이버 펌
(가둥 벽에도 온갖 설화와 전설로 그득찼으니 정조 임금님의 아버지 사랑을 알만도 하고
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더니 정말 중세 유럽의 조각이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낭만)
우리 조상님들은 이러한 설화속에서 잠 드셨으리라 진골님 작 감사합니다.
네이버사진 펌
담으로 둘러쌓인 장독대가 예쁘다고 인터넷에서 올라 있어 사진이라도 보시라고 올렸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중요 문화재가 있으니 그 목록과 사진을 올려본다.
목록은
주요문화재 : 1) 용주사 범종(국보 제120호)
2) 회양나무(천연기념물 제264호)
3)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4) 청동향로( " 제12호)
5) 상량문( " 제13호)
6) 전적수사본( " 제14호)
7) 병풍( " 제15호)
8) 대웅전후불탱화( " 제16호)
9) 불설부모은중경판( " 제17호)
대웅전후불탱화( " 제16호)
(서린 한은 서리서리 똬리 틀고 잇는 용 못된 이무기를 하나의 용으로 승천시키기위해 정조는 근대화가의 신필이라
하는 김홍도를 찾았고 신하는 왕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 같은 예술품을 남겼으리라.)
▲ 후불탱화 (김홍도) 해찬솔님 사진 펌
용주사 대웅보전에 있는 김홍도의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용주사1790년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서양화법을 적용하여 그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불화입니다.
주요문화재 : 1) 용주사 범종(국보 제120호)
국보인 범종을 보호하는 각 사진 진골님작
우리나라의 유명한 종 3개가 있는데 그 중 한개라고 한다.
국보니 만큼 잘 보시라고 세부적으로 올렸다.
용이 힘차게 종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데 ... 다음에서 펌함 한국학중앙연구원)
울림통 역할을 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며
이 종은 신라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초기작이라고 한다.
종의 상부에는 신라시대 종에서 보이는 용뉴(龍鈕 )와 음통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용머리는 종 꼭대기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 발로 천판을 딛고 전체를 들어올리는 형태를 하고 있다 (얼마나 힘차고 역동적인가 신비가 느껴진다.
다음 에서 펌
용의 힘찬 발과 빈틈없이 새겨진 무늬는 얼마나 섬세한가돌출된 유두에도 일일이 조각이...사진 다음에서 펌함
범종 위에는 용뉴(龍鈕)와 용통(甬筒)을 갖추었고,
특히 용통은 세밀한 연주문(聯珠文)으로 돌려서 6단으로 구분하고 당초문(唐草文)과 연판(蓮瓣)으로 장식하였는데,
연판은 원형·반원형·타원형 등 여러 형태이다. 종정(鐘頂)의 천판(天板)에는 문양이 없으며 상대(上臺)와 하대(下臺)의
문양은 서로 다른 형태의 문양대로 장식하였다.
날렵하게 허공을 날고 있는 비천상
범종의 종신에는 허공에서 천의를 날리는 두 비천(飛天)을 새기고,
동일한 것은 상대·하대 연뢰,·당좌 등의 내외 둘레만 세잔한 연주문대로 하였고 그 내부에 화려한 문양대로
장식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상대의 문양은 반원권(半圓圈) 문양을 상하 엇갈려서 장식하고 그 사이사이에 당초문으로 장식하였으며,
하대의 문양은 상대와 달리 연속되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것이 다르다.
옷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물결위에 앉은 듯 구름위에 앉은 듯 유유자작한 모습이다 다음에서 펌
범종에는 악기를 불고 있는 비천상은 있으나 이렇게 삼존상을 조각한 것은 드물다고 한다.
주조 당시 새겨진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새겼다고 함
글씨 내용은
성황산 길양사
범종 일만 구석반
야주성 이만오천근
금상 십육년구월
사문염거
하대(下帶)에는 상대와는 달리 연속된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1000년이 넘는 문화가 대단하지 않은 가 쇠를 이렇게 마음대로 주물를 수 있다니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금동향로 인터넷에서 펌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향로이다.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쳤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 장식을 하였다.
뚜껑 꼭지 부분의 순금 장식물은 없어지고, 붙였던 흔적만 남아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용모양이 조각되 있다.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명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
청동향로( " 제12호)
청동향로 다음에서 펌
안정감을 주는 육중한듯 몸통이나 발의 흐르는 선이 참으로 곱다.
사진 다음에서 펌
청동형로
섬세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상량문( " 제13호)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르로 채체공이 지은 것임 다음 펌
빨간 공단인데 지금도 색이 화려하고 내용은 용주사의 건립내력과 공사 날짜가 있음
전적수사본( " 제14호)
조선 정조 19년(1795)에 왕이 내린 불교식 가사(歌辭)로, 손으로 옮겨 적은 본이다.
원래의 명칭은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인데, 화산의 용주사에 부처를 모시고 복을 기원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짓고
용주사를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 책은 바로 이때 용주사에 내린 것이다.
2폭. 가로 65.6㎝, 세로 222.5㎝.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팔폭병(八幅屛)과 사폭병(四幅屛) 둘이 있는데 모두 초목 그림을 담고 있다.
이것은 정조가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원침(園寢)을 양주 땅 배봉산(拜峰山)에서 이곳 화산(華山)으로 이장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1796년(정조 20)에 용주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창건한 뒤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각 폭에는 오동·단풍·매화·모란 등 각기 다른 초목이 그려져 있다.
오동나무를 제외하고는 괴석(怪石)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데, 괴석의 채색은 농묵을 사용하였으며,
어떤 폭에는 푸른색의 바위와 붉은 꽃이 대비되고 있다.
그림의 화법이 매우 정교하여 우리나라 화단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는,
민속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림의 솜씨로 보아서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 회화나무
이 회양나무의 나이는 약 200년으로 추정된다. 인터넷펌
용주사 경내에서 독립수로 자라고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조(正祖)가 사도세자의 능을 만들고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중창할 때 심은 기념수라고 한다.
사람이나 나무나 늙으면 별 수 없는지 이렇게 흰붕대를 감고 있네요
불설 (부모은 중경판)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제17호)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초판 1996, 15쇄 2012, 돌베개)
부모은중경은 자식에게 효를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까지 음미해 볼 수 있는 효에 관한 대승적인 경전이다.
위의 글과 사진은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모두 네이버 다음에서
펌했으며 간간이 제 글 삻짝
역사에 대한 갈증을 어느정도 풀수있게 해 주는 사진과 해설 다음, 네이버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5년 1월 19일 낭만 씀
이것으로 용주사에 대해서 대충 올린 것 같은 데 졸필 이해하시기를 역사탐방회원님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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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낭만님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낭만님 수고 덕분에 편히 공부하고 갑니다
놀래라~어떻게 칭찬을 해야할지요.
참참히 읽어보며 공부했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