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풍' 교사의 사례를 보며
'오장풍' 교사란 학교 폭력을 한 교사의 별명을 말한다. 손바닥으로 한 번 맞으면 장풍처럼 학생들이 쓰러진다는 것이다. 동영상과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이슈화된 사건이다. 학교 폭력의 대명사로 그 교사는 결국 징계를 받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또 다른 폭력 교사가 있다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학부모의 문제 제기에 학교는 속수무책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실에서 교사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아니 교실을 떠난 후의 그 학생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대단한다. “교사의 영향력은 영원하다. 그 영향력이 어디서 멈추는 가는 아무도 모른다”고 헨리 아담스는 말하였다. 교사의 말 한마디에 학생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대부분이 모른다. 교장·교감도 순시를 하지만 잘 알지 못한다. 동료 교사도 마찬가지다. 학부모들은 더 더욱 모른다. 오직 그 교실의 담임교사와 학생들만이 알 수 있다. 학생들은 아직 어리다. 판단력이 아직 부족하다. 이러한 학생들은 대부분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 판단한다.
교실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교사의 힘은 막강하다. 교실의 학생은 가장 무서운 사람이 대통령도, 부모도 아닌 그 교실의 교사가 될 수도 있다. 교사의 말 한마디에 학생들은 설사 불합리한 경우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곳은 모든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어떤 담임 교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1년의 학교 생활을 보장해 준다. 학생의 학교 생활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7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만일 담임 교사가 싫다면 그 학생은 학교에 가기 싫어할 것이다. 그 학생은 학교가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학교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행복해야 한다. 불행한 교사는 학생들을 불행하게 한다. 학생들은 교사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배우며 따라한다. 가르치는 내용보다 모델로서 보여지는 교사가 더 큰 영향력을 준다.
한편, 교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오장풍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매일 거짓말을 하는 학생이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교사가 하는 말은 무시한다. 전혀 반성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교사로서 화가 나고 그래서 해서는 안되지만 체벌을 할 수도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정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지도할 방법이 없다. 체벌을 못하게 하지만 대안은 없다. 그냥 교사가 참으라는 것이다.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학부모 상담이다. 그러나 그것도 학부모가 비협조적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냥 참을 수 밖에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담임 교사 세 번의 경고에 학교장 면담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출석 정지 및 학부모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이러한 규율이 없다. 그냥 참아라. 체벌은 하지 마라. 지도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 교사로서는 학생을 지도할 수도 없고 지도할 의욕을 가질 수 없다.
문제아가 많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방치한다. 그냥 시간만 흘러가기만 바랄 뿐이다. 그 학생을 변화시키고 지도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의 현실이다. 왜냐하면 심하게 지도를 할 경우 학부모의 항의가 들어오고 그래서 학교와 교사는 피해를 보게 때문이다. 이래서야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학생에게 담임 교사가 중요하듯이 교사에게 학생들은 중요하다. 어떤 학생들을 만나느냐가 1년을 결정한다. 소위 말하는 문제아를 만나면 1년이 힘들어진다. 실제로 교사는 그 학생으로 인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없고 좌절하기도 한다. 학교에 가기가 싫어진다. 심한 경우에는 교직을 포기하고 싶기도 한다. 병가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막무가내식의 학부모의 요구와 폭력, 욕설을 교사는 견뎌내야 한다.
사회의 분위기는 교사보다는 학부모의 요구가 강한 시대다. 교사의 문제 제기는 죽어가고 학부모의 요구는 이슈화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교육을 포기한 교사들이 더 늘어가고 있다. 그냥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도 교사는 고민을 한다. 학생들을 지도할 것인가, 그냥 포기할 것인가? 만감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