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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신뢰
신뢰도
에고의 팽창
에고의 소멸
신에 내맡김
깨달음에 이르는 길
현대인의 의식지도 11. 신념, 신뢰 그리고 신뢰도
사회적 기반 : 정보/ 허위정보
미디어와 인터넷이 지속적인 편견과
극심한 왜곡이 지배하는
극장이 되어버린 오늘날,
신념과 믿음 그리고 신뢰는
많은 문제를 노출한다.
세계 지도자들은 "홀로코스트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거나 "미국이 9/11 재앙을 획책했다" 등 지독하게 허위 일색인 발언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며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공적 인물들도 일부러 거짓발언을 일삼는다.
의식연구에 따르면
유엔 회원국과 외국 정치인 대다수를 비롯해
많은 정치인들이
일상적으로 진실을 왜곡한다.
또한 상습 흉악범죄자와 아동 학대 범인들에게 끊임없이 호의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도 각광을 받는다. 미국 시민자유연합은 아동을 대상으로 삼는 남성 성범죄자와 아동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한다. 뉴욕타임스는 확실하고 공공연하게 편향되어 있으며 이 점을 스스로 시인한다. 뉴욕타임스 사설은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된다. 할리우드는 불온한 모순을 지지한다. 그리고 미디어 자본가들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준 조국에 반하는 반미 증오광고를 후원한다. (증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증오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모두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모르긴 해도 반전을 내세우는 거물들도 전시에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안겨주는 기업주식을 수억달러씩 사들일 것이다.
아동 포르노 그래피는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보란 듯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표현의 자유"는 트로이 목마가 되어
정신병 수준의 거짓에 표준을 제공하는
얼빠진 변명거리로 전락했다.
탄탄하게 재정후원을 받은 거짓이
거리마다 선전을 퍼뜨리고
날마다 넘쳐나고 있으며
혼란에 지쳐 무감각해진 대중들은
체념한 상태로 순순히 그것에 동의한다.
선전 선동된 거짓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기술은
점차 정교하게 전문화되었다.
그중 한가지 전략은
'먼저 극단적 발언을 하여
의도적으로 충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이 발생하고 나면
대중이 거짓된 프로그램에 저항할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전 선동된 수사다.
이런 수사는
신중하게 준비한 다음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팔려나간다.
대중은
바로 그 통제권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또 하나 선호하는 계략은,
나중에 인용될 거짓된 발언으로
"가짜 증거를 미리 심어놓고
속임수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허수아비 공격은
너무 흔해 빠진 방법이다.
예상한대로
오늘날 미디어의 의식수준은
불과 160 정도로 측정된다.
의식수준 160은 거짓을 나타내며,
이는 모든 진실이
그저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편견이라고 주장하는
현행 철학체계의 산물이다.
그들은
객관적 진실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
왜곡되고 편향된 주관적 가치 판단이
객관적 진실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순전히 반복전략에 의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그런 진술을 믿게 만드는 일종의 밈(슬로건)이 된다.
가령 '이쪽의 배반자가 저쪽에서는 자유의 투사가 된다"는 유혹의 언사는 의식수준 180으로 측정되며, 이는 교묘하게 호도하는 상대주의의 특성을 나타낸다(최근의 유명한 스파이들은 의식수준 80으로 측정된다. 최근에 체포된 배반자도 80으로 측정된다. 반면 자유의 투사는 200으로 측정되고 테러리스트는 30으로 측정된다).
위에 언급한
프로그래밍의 최종결과는
인간의 전반적 역량과
현실검증에 필요한 능력이
하락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가장 기초적 수준에서조차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능력이
실제로 파괴되었다.
여러 사회비평가와 논객들은 이미 이 점을 언급하고 기록하였다.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대한
합리화를 가리켜
윤리적 상대주의(155)라고 부른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선과 악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교묘한 인식론적 속임수를 통한
이런 선과 악의 역전현상 자체는
선으로 간주되고,
전통적 윤리는 악으로 변해버린다.
오늘날
거짓이 하나의 트렌드처럼 유행하는데,
기실 그런 거짓의 의식수준이
155라는 사실은
지적 오류를 저지르는 철학적 상대주의(190)가
진실을 위반하는 양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임을 뜻한다.
믿음과 신뢰의 생존
거짓된 정보를 믿고
신뢰하려는 대중의 성향은
역설적으로
순진한 순수성, 믿음, 신념,
그리고 신뢰가
여전히 생생하게 작동하며
실제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는 반증이다.
사실
순진한 인간 본성의
그 기반때문에
거짓이
그만큼 큰 탄력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살되는 어린 양처럼 수백만명의 순진한 순수성은 무참히도 도륙되고, 타락한 행위의 가장 혐오스러운 극단성에 이용되는 열렬한 신입 구성원들을 언제든 부족함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 이런 현실속에서 이를테면 죄없는 여성의 목을 일부러 천천히 베어 죽이는 패륜적 행위(10)가 박수를 받으며 전세계 텔레비전에 버젓이 공개된다. 하지만 이로써 자기권력 확대를 꾀한 타락한 가해자들은 교묘히 얼굴을 숨긴다. 그 와중에 옹호자들은 그 난동을 자유의 투사나 평화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선전 선동한다. 이렇게 되면 집단 최면에 걸려 "미국을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기독교를 죽음으로", "유대인을 죽음으로'라고 시위하고 소리치게 된다(그리고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역설적 순간이 찾아온다).
한편
시민들은
사회적/문화적 파괴와
그것을 조장하려는 조짐을
"제대로 받아들이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현실검증의 상실
정신은
갈등과 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부하거나 회피하고
역설적으로
아예 모든 경고를
과감하게 날려 버리고
그 갈등을 넘어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미친듯이 도피하기도 한다.
가령 할리우드 유명 연예인들은 여성을 고문하고 자국민 수만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 지도자를 열렬히 받아들이는 등 과장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도피성 거부형태를 보인다.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양식과 기술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세뇌를 위해 활용하는 기술 및 시스템과 동일하다.
이런 기술은
자신감, 개인이 정신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믿음,
그리고
현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정신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은
시간과 공간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권위적 인물에게 항복하게 된다.
미국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대학생들에게 특정한 목적으로 주입교육을 시키는 현상, 전 세계에 퍼진 이슬람 테러리스트 구성원 혹은 세뇌 당한 죄수들의 모습이 그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미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현실검증 능력이 손상되는
일종의 증후군을 겪고 있다.
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자율성을 저당잡힌 채,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슬로건과
대중적 태도라는 밈에 굴복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 지껄이는 보다 손쉬운 길을 택한다.
통계상
이미 미국인구의 45%에게서
이 증후군이 발생했는데,
2006년 미국 전체의 의식수준이 426에서
2007년 421로 하락한 것을 보면
그 심각함이 잘 드러난다.
미국에서 거짓은
종종
미디어의 주목, 대중적 홍보,
금전적 혜택 등으로 보상받는다.
자기도취적 에고의 허영심이
마치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표현되고 제시된다.
터무니없고 괴기한 극단주의가
이익을 위해
청렴성과 윤리와
도덕을 팔아넘긴다는 뜻이라 할지라도,
이제 그것은
명성과 부를 얻기 쉽고
빠른 하나의 길이 되었다.
순수한 인간의 무지와
순진함을 착취하는 행위는
이제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나쁜 것이 찬사를 받고,
나쁜 여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심지어 지독한 사악함마저 장려되고
교활하게 홍보된다.
거짓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진실의 부재일 뿐이다.
실제로 진실은 반대쌍이 없다.
이는
추위가 열기의 반대가 아니며
빛이 어둠의 반대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어둠은 빛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다.
추위가 열기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병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일반 대중들이 가진 맹점 중 하나는
엄청난 망상을 수반하는 정신병이나 심각한 정신장애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망상증상이
정치화된 수사적 논쟁과
가짜 증거로 교묘하게 합리화되고 옹호되는 경우에는
그 자체를 확인하는 일이 더욱 더 어려워진다.
망상에 빠진 믿음은
밈을 통해 퍼진다.
진실이
오로지 반복을 통해서만
믿음의 대상이 되듯이
밈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잘못된 소문도
그 사악함이
합리화된 왜곡과 추론이라는
위장 가면을 쓰고 나오기 때문에
널리 퍼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정신병적이고 지독한 망상에 빠진 교수들이 (상대주의 등) 학계의 대중적 망상에 쉽게 빠져드는 소위 명망있는 대학교에 강연자로 초청을 받는다.
위와같이
정신병적 교수들이 대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라는 핑계거리를 내세우며
계속 강연하는 동안에도
아직 합리성이 살아 움직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망상적 편집증 환자들이 용인되지 않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미국이
9/11 사태를 꾸몄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금융권에 채용되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취업시장은
"거실에 있는 코끼리"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의 온전한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실 검증능력을
상당히 상실하면서
무정부주의에 찬동하는 것이
유행이 될 순 있겠지만,
정신병적 망상이 기업의 온전한 분별력을 피할 순 없다.
따라서 정신치료 훈련을 받지 않고도 상식 등을 발휘하여 정신병적 망상장애를 인식할 가능성이 꽤 높아진다(모든 망상 장애는 의식수준 200 이하로 측정된다).
구세주를 자청하는 망상장애(악성 구세주 나르시시즘)는 최근 역사와 동시대를 통틀어 모든 독재자들에게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독재자들은 공히 의식수준 90으로 측정된다). 이런 장애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이런 장애를 보이는 동시대 세계 지도자들은 핵전쟁을 위협수단으로 삼는다(의식주준 90은 아동 범죄자와 상습범죄자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극단주의
특히나
지나치게 사나운 잔인함과
공공연히 집단의 강한 충동을 과시하는 극단주의는
가장 인간 본연의 본능을 표출한다.
이 본능은
정상적으로 거부되어
무의식의 영역안에 억압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이드",
카를 융은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 강한 충동은
동물집단 살상으로 드러난다.
그 예로 유명 운동선수들의 투견 스포츠, 한바탕 저지른 교내 동료 살인, 린치같은 광란의 집단 야만성, 일본의 만주학살, 조직폭력, KKK 집단의 효수와 고문, 반란군의 죄없는 민간인 진압, 미쳐 날뛰는 전사들, 아이티의 흉포한 폭동, 칼과 방패로 무장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전, 탈레반의 참수, 게슈타포의 살상,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스탈린 압제하의 강제 노동수용소 등이 있다.
프랑스 혁명은
단두대에서
1만 4천명을
형장의 이슬로 보냄으로써
찬사를 받았다.
광신적 종교집단은 서로를 살상했으며 거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간 본연의 본능적 경향은 현재 이슬람 테러리즘과 종말론적 승리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폭력으로 미화된다. 묵시론적 승리주의는 12번째 이맘 '마흐디"의 등장을 앞당기기 위해서 핵을 통해 전 인류의 2/3를 없애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흐디는 이 세상을 묵시론의 종말론과 유사한 천국으로 바꿀 것이다(이는 2007년 컬럼비아 대학교 초청강연을 했던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직접 밝힌 입장이자 신념체계다). 모든 종말론은 의식수준 최저 70으로 측정되며, 이는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거짓이라는 뜻이다.
마흐디(아랍어)는 이슬람교, 특히 시아파에서 말하는 미래에 올 구세주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문자적으로는 '신에 의해서 올바르게 인도된 자'라는 의미이며, 심판의 날 직전 거짓 선지자가 지상에 도래할 때 그와 싸우는 사람으로 예언된다. 유대교의 메시아와 비슷한 느낌이다. 시아파 12이맘파 전승 기준으로 12번째 이맘인 무함마드 알 마흐디는 서기 874년(이슬람력 260~261년)에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12이맘파는 그가 죽지 않았으며 심판의 날에 재림한다고 믿는다. 마흐디를 자처한 이슬람 지도자들도 있었는데, 중세에는 파티마 조의 창건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가 유명하다.
위에서 말한 모든 행위는 고전적으로 "사탄의" 행위로 불렸다. 이는 "파리대왕"에서 보듯, 겉으로 순수해보이는 아이들에 의해서도 언제든 풀려나올 수 있는 인간 무의식속 어둠의 저수지를 암시한다. 최근 살인과 강간을 부추기면서 인기를 끄는 비디오 게임의 의식수준은 최저 90으로 측정된다. 이런 어둠의 성향은 영화 "블랙 크리스마스"에 나오듯 심리적 실험을 통해서 연구되고 기록되었다. 이런 실험에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조차 권위있는 인물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면서 무의식에 잠재된 잔인함을 드러냈다. 과학적으로 잘 통제된 죄수/간수 실험에서 돈을 받고 실험에 참여한 지원자들마저 본연의 잔인성을 표출하였다.
역사상 징기스칸, 바이킹, 훈족, 고트족의 사례에서 보듯, 광포한 집단학살은 수천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야만집단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이런 잔인한 흐름은 수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말론적 종교경전 속에 통합되었다.
진실의 역전
권위, 선전, 세뇌기술,
집단 합의의 영향을 받으면,
현실검증에 필요한 인간정신의 능력이 무너지면서
거짓이 종교적 숭배의 지점(종교재판)까지 올라가 진실처럼 군림하게 된다.
그것은 세일럼 마녀재판과 같은 사건에 대한 변명이자 면죄부가 되었다. 종교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은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쇠퇴하면서 드러난다. 이는 곧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와합(20), 사이드 쿠트브(75)의 광신도적 교리가 낳은 결과다. 이들을 통해 하마스(40), 알카에다(30), 빈라덴의 지하드(200)가 등장했다.
전세계 모든 국가와 문화와 종교가
수십년, 아니 수백년 동안
특정한 조건하에서
그들의 교리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기제는 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가장 야만스럽고 사악한 발생초기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합리화하고 부추기면서 심지어 박수갈채를 보낸다. 자발적 자살테러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다. 그들은 극히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 외친다.
또한 이 현상은 존스타운, 천국의 문, 헤일-봄 등 집단자살로 끝나버린 광신적 종교집단에서도 나타난다.이 모든 재앙을 보면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는 권위적 인물을 추종하는 경향이 인간의식의 단면임을 알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이런 지도자들은 사악한 구세주 나르시시즘 증후군을 보인다. 이점에 대해서는 "진실 대 거짓" 14장에서 자세히 규명했다. 역사는 수세기를 거치며 되풀이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구세주를 자처하는 지도자들은 여전히 신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자국민과 가족의 집단학살을 합리화한다.
빈라덴의 "우리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숭배한다"처럼 증오와 악을 신격화하는 행위는 의식수준 10으로 측정된다. 오늘날 세상에서 그런 신격화는 수세기 동안 신학에서 사탄의 역전이라고 규정해왔던 바로 그 현상이다. 증오와 악의 신격화가 이슬람에 끼친 영향은 '이븐 와라크'의 권위있는 연구 "나는 왜 무슬림이 아닌가(1995)"에 학술적으로 자세히 나와있다. 이 책은 의식수준 410으로 측정된다. 이외에도 살만 루시디 등 저명한 작가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권위있는 분석과 설명을 제시한다.
루시디는 1981년 악마의 시때문에 이란의 야야톨라 호메이니로부터 이슬람을 모독했다고 지목받은 후, 이슬람 율법해석 "파트와"로 처형명령을 받으면서 오래도록 시련을 겪었다. 이 일은 전세계가 다 아는 유명한 사건이다.
진실의 '루시퍼적 역전"은 개념적 전제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진실과 거짓은 무의식적으로 신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는 나르시시즘적 에고의 오만한 탐욕을 통해 역전된다. 이 과장된 당당함은 신격화로 부를만한 유혹에 굴복했다는 뜻이다. 이 유혹에 빠진 전세계 유명한 지도자들 다수는 탐욕스럽게 돈을 쫓으면서 성적 착취를 자행하고, 사회와 개인을 통제하며, 사적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추종자를 조종한다.(이는 권력은 필히 부패한다. 즉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액턴 경의 금언을 잘 나타낸다).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존 달버그 액턴, 제1대 액턴 남작(John Dalberg-Acton, 1st Baron Acton, 1834년 1월 10일 – 19 June 1902년 6월 19일)은 영국의 정치인, 역사가이다. 액턴 경(Lord Acton)으로 자주 불린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언이 자주 인용된다.
위에 나온 모든 내용을 통해 보자면 인간의 에고/정신/자아는 자신의 한계와 약점과 취약성을 모르기 때문에 속임을 당하거나 실수하기 쉽다. 이런 한계는 기존에 알려진 대로 거부라는 심리학적 기제때문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나 카르마의 속성상으로나 의식자체의 진화에 한계가 있다는 증거다. (전세계 인구 85%는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된다).
에고/정신의 타고난 내재적 한계를
받아들이려면
겸손함이 필요하다.
겸손함에서 타고난 한계를 존중하고
그것을 보완하려는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겸손이 없는 진실추구는
나침반없이 또는
그 경로를 다른 사람을 위해 지도를 남겨준
유능하고 노련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지 않은 상태로
위험천만하게 출항하는 것과 같다.
영적수행 활동에서도
실수를 저지를 위험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산악등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떠올려 보라.
(수많은 사람들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면서 지금까지 160여명의 생명이 희생되었으며, 앞으로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영적수행 경로, 스승,
영적/종교 단체의 입증가능한 진실은
두려움이 아니라 통합성과 존중이라는 기제를 통해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
영적 진실은
비결이나 비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들은
고대의 불가사의나 은밀한 가르침 등
어떤 특별한 교리를 혼자 받은 듯한 착각을 하면서
자기도취적 에고가 유혹되는 것을
일절 거부한다.
진실한 것은
설득하고 개종하고
미화하거나
통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뢰성, 진실, 정직은
곧바로 드러나며
간단한 의식측정으로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본질은 확실하고 투명해진다.
영적 진실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자격을 갖춘, 확증된, 진실한 스승과 교리와 기관을 담은 종합목록을 "진실대 거짓"에 나왔던 도표와 더불어 이미 밝혀두었다.
진실과 거짓을 추구하는 일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어서
거짓 옹호자들에게 공격받기 쉽다.
그들은 오히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본위적 이기주의와
나르시시즘적 오만을 얻을 것이라고 위협한다.
거짓의 수익은
겉으로는 매우 거창하다.
그래서
사실상 신을 부인하고
신성을 언급하는 것조차 반대하거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극단적 행동에 대해
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등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 성향때문에 발생하는 영적실수의 심각함이 가장 잘 드러난 고전 작품의 캐릭터가 바로 세상이 주는 이익때문에 점차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 박사다. 특히 오페라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극의 결말에 닥쳐오는 재앙과 파우스트 영혼의 숙명이 드러날때 정말로 몸서리를 치곤한다.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us, 1947년)는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작곡가인 아드리안이 인간을 사랑치 않을 것을 조건으로 예술창조의 감격을 위해 악마에게 자신을 팔아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이야기로 악마는 매독으로써 주인공의 뇌(腦)를 해친다. 니체의 발광(發狂)을 모델로 삼고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묵시록(默示錄)의 음악화(音樂化)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론을 쇤베르크의 음악에 의해 전개하고 있다.
로마 바티칸은
극단적인 영적 실수가 불러오는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저작물을 인정하거나
불신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신자들에게 영적안전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공식 허가는
그 저작이 안전하고
영혼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어떤 저작을 금서목록에 넣으면
그것이 악으로 유혹하는
미끼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늘날 자유의지론자들은 바티칸의 행위를 억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그 의도는 의식수준 370에서 나타나듯 진실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다만 태생적으로 욕정의 미끼와 불경한 믿음체계의 유혹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순진무구하고 순수한 사람들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한 기준을 제정하고 지침을 제공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권위
참다운 권위는
온전한 신뢰성, 책임감있는 리더십,
그리고 확실히 입증된 정보관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 권위야 말로
역사상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자,
지적/도덕적 안내자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에,
진실 수준도 합당하며
당연히 존중받을 만하다.
참다운 권위는
일종의 추상적 원칙으로
세부사항에 그 원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사례들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개인이
참다운 권위라는 이상을 구현하는
좋은 사례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원칙의 진정성을 불신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원칙을 상황에 참되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곧
시민사회가
그 권위를 때때로 남용하거나
권위있는 인물들이
간혹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서,
세상에 진실한 권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특정 직함이 지닌
암묵적 권위가
자동적으로 참다운 권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권위는
사회 정치학적 위치성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다.
그런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들이
자신이 맡은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누구나 다 아는 현상이다.
최근 수십년간
심지어 미국 연방정부조차
연방법률을 존중하고 시행하는데
매우 중대한 갈등과 딜레마를 초래하면서
본질적 통치권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참다운 권위의 정치적 의미를 규정하기에 앞서, 실제로 참다운 권위의 근본적 성질은 어떤 것인가 알아보자.
참다운 권위는
지식, 숙련, 경험, (비행기 조종상 등의) 능력처럼
스스로 내재적 진정성을
자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각이
본질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이
일반적인 사례에서도
실제 그렇게 나타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의식연구 기법을
적용하는 것뿐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참다운 권위는
대부분 창설자, 역사상 위대한 과학자와
진실한 철학체계의 창시자들처럼
수련법이나 규율, 또는
지식의 몸체를 최초로 창안한 사람들이 대표했다.
그 외에
음악, 미술, 종교,
영적 발견을 했던
위대한 예술가와 인물들이
참다운 권위를 보여준다.
참된 권위는
실제 사례를 입증하거나
의식측정으로 대표되는
객관적 수단을 통해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증거를 제시하여 확증된다.
의식측정은
이후 드러날 진실수준에 대해서
어떤 기득권도 갖고 있지 않은
객관성을 자랑한다.
따라서
참다운 권위는
그 진정성을 인정받은 탁월한 특성이다.
존경은 참다운 권위덕분에 존재한다.
인간은
생존과 지도가 필요할때
참다운 권위에 의지하기 때문에,
참다운 권위가 존경과 존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거짓 권위에
잘못 의존하면
대개 죽음, 황폐, 그리고
수백만명의 고통이 만연하는
중대한 사회적 결과를 맞이한다.
(마오쩌둥 185, 마르크스 130, 스탈린주의자와 나치이론들이 그 좋은 사례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군사적 역할과 정치적 권력을 부당하게 강탈하여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레닌의 테러리스트 신조(80)는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진다. 오늘날 세계는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브파(30)의 교리가 몰고온 9/11 사태같은 치명적 결과를 목도했다.
아마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거짓의 신격화와
부패한 지도자를 향한 숭배일 것이다.
순진한 대중들은
이기적 허영심과
위대함을 혼동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악한 나르시시즘이 수반되고,
그 나르시시즘은
계급, 국적, 종교, 인종, 복수 등
증오를 통하여
권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미국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거나 미국을 거대한 사탄으로 묘사하는 것은 의식수준 20으로 측정된다. 이는 사악한 사탄과 같은 수준이다.
사악한 거짓을 옹호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카르마적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된다는 사실은
진실을 추구하는 연구자들과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이다.
참다운 권위라는 자산의 상실
최근의 상황에서는
참다운 권위를 파악하거나
그 가치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더 나아가 참다운 권위와
정치 이슈화된 대중 이미지를
구별하기도 어렵다.
거대한 사회적 위력은
궁극적으로
지진과 붕괴를 일으키는
지질구조판에 견줄만하다.
이런 재앙이 일어나면
권위있는 인물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그런 재앙이
극단을 오가며
사회적으로 표출되면
전쟁의 형태로 터지기도 한다
(기록된 역사시대중 93%는 전쟁중이었다).
그러므로
실패는
참다운 권위때문에 일어나는게 아니라,
그런 권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다.
오늘날
철학적 상대주의의 표적이
바로 진실한 권위 그 자체다.
상대주의는
온갖 수사를 갖다 붙이면서
참다운 권위(진실)가 존재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잠재적 타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즉
상대주의는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절대주의를 비난한다.
한편
상대주의는
권위를 파괴하지 않으며
나르시시즘적이고
포스트 모던한 교리와 이론을 동원하여
오히려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한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따라서
본질상 상대주의적 주장, 이론, 철학, 교리는
그들이 겉으로 따지며 논쟁하려 드는
도덕적 권위를 더 주장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포스트 모던 교리는 만약에 진실이 그저 자의적인 것이라면 그들 자체의 교리도 허위에 불과하다는 뻔한 역설을 애써 감춘다. (가령 상대주의는 도덕성이 잘못된 것이므로 그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말이 되는가?) 그러면서 자동차 범퍼에 "권위를 의심하라"는 스티커(180)를 번지르르하게 붙이고 다닌다.
타당하고 참다운 권위는
외관, 직함, 속성, 혹은
지각에서 나오지 않고
본질(실재)에서 나온다.
미디어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실하지 않고
권위를 불신하고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는 것은
참다운 권위를 불신하고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부추긴다(청소년기 반항).
본질에 기초한 권위있는 진실(절대주의)은
잘못된 지각을 지지하거나
부추기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지각은
바로 나르시시즘적인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공연하게 거친
반미 반체제 태도(할리우디즘 170-190)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 태도는
미디어의 주목이라는
이익을 취하고
현재 대학교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1960년대 세대의 나르시시즘에 호소한다.
순진한 에고는
자신의 타고난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풀리기 때문에
철학을 내세우는 가식적 태도로
수사에 취약한
순진한 에고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주의의 주장처럼
절대주의가 거짓이라면
바로 그 명제 자체도
상대주의가 내세우는 거
짓이라는 규정에 의해 거짓이 된다.
한계
인간 조건의 본질과 진화상태는
원래 변동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위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면
언제든 실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도덕적 한계의 산물로 인식되는
이런저런 오류들이 발생한다.
이런 오류나 실수는
허위정보, 계산착오, 잘못된 데이터,
우세한 조건의 변동,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숨어있는 요인과 영향력에 의해 발생한다.
속임수와 허위정보는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있고
유엔(190)이 직면한
끊임없는 혼란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어떤 국가에서든지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일시적이고 과도기적 현상인 것처럼
나타난다.
경제와 인구요인이 계속 변하고,
자연재해가 발생할 뿐아니라
국가와 정치 지도자, 구성원 대다수의
지배적 의식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참다운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내재된 실수나 결함이 있지만,
테오도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벤자민 프랭클린, 윈스턴 처칠, 로널드 레이건, 제럴드 포드, 마하트마 간디, 파크스리스, 우주 비행사들, 수전 B, 앤서니,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그외 여러 인물들의 사례로 알 수 있듯
전세계적으로
강인함, 성격의 특성, 미덕의 구성요소로 인식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진정성과 용기(460-700)를 겸비한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역사적으로,
특히 전쟁시기에 재임한
에이브러험 링컨을 비롯한 모든 대통령은
비판적 공격, 극단적 비방,
또는 심할 경우 암살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2차대전을 끝내기 위해 과연 원자 폭탄에 손을 대야 하는지, 그 뼈아픈 결정을 내려야 했던 트루먼 대통령처럼 고통이 따르는 도덕적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다. 이 사건은 수십년 뒤 당시 일본이 미국에 핵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짜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드러나면서 고통스럽지만 우연과 행운이 겹친 일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전쟁의 도덕성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수십년 아니 수세기 동안
논쟁과 토론의 주제가 된다.
그 세월동안
사람들은
점차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율성
모든 부모들이 발견하듯이,
흔히 미운 두살이라고 하여
아이가 두돌을 지나고
아니오라고 답을 할줄 알게 되면
반항을 시작하고
발달 단계상 부정적인 면이 드러난다.
여기서
주된 이슈는
바로 통제권이다.
가족간 상호작용안에서
일종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운 두살이 보이는 여러 자질들은 곧 반항적인 불복종 성격(프로이트가 말했던 공격성 중의 배변 훈련단계인 항문기 반항)의 특성이 된다. 이런 갈등은 나르시시즘적 에고가 표출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나르시시즘적 에고의 특성이 바로
고집부리기, 이타심, 타자에 대한 존중결여,
그리고 신처럼 사랑받으려는
도적적 쾌락성향이다.
부모의 능수능란한 양육은
이런 특성을
굴복시킬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에
에고의 특성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자율성과 통제와 마약, 랩, 펑크 록, 힙합패션, 여성을 창녀로 비하하는 등의 특성을 보인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권위와 사회적으로 권위를 드러낸 것이 자기 본능의 만족을 제한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여 또 다시 미운 두살때처럼 반항하게 된다.
참다운 권위에 대한 반항을 해결하지 못한 대가는 고등학교 중퇴비율이 30%에서 50%로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로 인해 사회경제적 결과도 뒤따른다.
청소년기의 반항은
도덕, 윤리, 사회적 행동의 합법적 기준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폄하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 결과,
쾌락주의적 방종이 넘치는
하위문화가 생겨나고
이와 관련된
중대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결국 교도소에
수감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결과는
"반항성 성격장애"다.
이런 장애를 겪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저항운동, 얼빠진 교수들, 음모론,
집단폭력의 구성원이다.
이런 외고집 반항이
처음 싹틀때는 유치하지만,
점차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멋진 놀이가 되어버렸다.
베트남전쟁 당시의
반체제 지도자들 중 다수는
훗날 그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실제로 그런 심경을 담은 기사를 내거나
글을 실었다.
자신들의 행동이
전쟁을 연장시켜
고통을 늘리고 사망률을 높였을 뿐이고,
더구나 적에게
도움과 안락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뒤늦게 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적 에고는
청소년기의 반항을
고상하고, 이상적이며,
엘리트적 행위라고 이름붙여놓고,
그런 식으로 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용어자체가
나르시시즘, 이기주의, 허영심(170) 같은
태도에 호소하려는
에고의 성질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흔히
반항은
억압적 권위와
숙련된 경험과 지식에서 나오는
참다운 권위를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반체제 의식이나
반 권위적 태도는
규칙준수를 엄격하게 요구하며
오히려 폭력적, 권위적,
강압적으로 변하고 만다.
표현의 자유가 가진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수많은 퍼레이드는
사실상 외고집 반항, 모순(190)이라는
신경증적 성격장애를
밖으로 과시하는 행위일 뿐이다.
역사는
여러 배경과
사회적 환경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배경과 환경은
결국 위대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위대한 혁명은
곧 고대문명과
현대문명을 형성했다.
어떤 혁명은
훌륭한 혜택을 가져왔지만
또 다른 혁명은
죽음과 기아를 만연하게 하고,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반란에는
저마다 표면상의 영웅과 악한이 있었고,
그에 따른 혜택과
비극적 대가도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수세기 동안
연구와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언제나
그 혁명의 혜택이
생명의 상실과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똑같이
담론이
현재 전세계 대화를
거의 지배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처럼
과연 분노한 운명의 투석기와
화살의 고통을 참아내느냐,
아니면
그 고통에 대항하여
도끼를 집어들 것이냐의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각 세대는
저마다 그들만의 결정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무엇일까?
반항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유치한 불평불만 분자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적대적인 비판자들이다.
그들은
선동적 형태의 비방만 알고 있을뿐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의견을 내는
성숙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현재
미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언하듯이
미국은 자국문화의 이상을
외국문화에 강압적으로 강요하려는 국가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선택한다"는 요청은 강압이 아니라 전세계 갈등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슬람을 선택하라에 대항한 것이다.
현재는 민주주의와 이슬람 문제가 갈등의 주요 이슈지만 과거의 주된 대립은 '신성한 권리 혹은 세습 군주 대 평등, 자유, 우애, 사이의 갈등이 주를 이루었다. 공산주의(160)는 집단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해서 노예제도라는 쇠고리를 던져버리자고 호소했다. 그런 식으로 문명의 기저에 깔린 위대한 사회적 구조판은 계속해서 전쟁과 충돌을 양산하고 일으킨다.
진실수준의 차이와
그에 따른 도덕적 권위의 간극에서
기본적 갈등이 반복된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의식수준은
갈등의 요인이자 동시에
그 갈등해결의 필요한
결정적 인자다.
윈스턴 처칠의 "신세계 : 영어권 시민의 역사"에서는 인간조건 자체에 적절한 해답이 있다고 하면서 겸손함을 그 대답으로 내놓는다.
종교에 대한 반박
종교는
절대적 교리와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 끊임없이
적대적 극단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그 결과
종교의 진실은
이런 공격에 취약해지고 말았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에고가
종교를 잘못 이용한 탓이다.
오늘날 과격한 신앙은
전쟁의 주된 원인이자,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대량 살상의 잠재적 원인으로서
전세계에 퍼져있다.
에고는 이렇듯 (범죄와 같은) 의식수준 10에서 90으로 측정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성의 권위를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대중문화는
반항적인 청소년기의 특성을 확대하고
강화한 형태라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대중성에 호소하는 문화는
인정받기 위한
에고의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
심지어 유수의 대학들조차 소위 "얼빠진 교수"들을 초청하여 가르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인정받으려는 자기도취적 욕망에 굴복한다.
강압적 권위주의와
실재에 기초한 참다운 권위를 차별화하는 것은
인지적 분별의 문제이며,
그 분별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그 결과 시민권과 자유도
주변상황과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상황은
의식수준을 측정하기만 하면
명확히 설명된다.
의식수준은
하나의 위치성이 가진
본질을 실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실례는 전쟁, 전염병, 재난 또는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비상사태로 제약이 생기는 상황이다.
이와 유사한 분별은
합리적 자유와 무정부주의 또는
극단적 자유의지론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먼저, 자유란 과도한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지만 이때도 합리적 한도 안에 있어야 한다.
(예; 극장안에서 불이야! 외치는 것)
둘째,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표현의 자유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셋째, 자유의지론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고 나가면서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적 반응을 촉발시킨다(예, KKK 집단의 선동적인 수사학).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자유를 잃을 수도 있다. 즉 자유는 책임과 (시간, 장소, 환경 등) 사회적 실재의 분별에 달려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해방자이자 혁명가로 알려진 사람들도
결국 강압적 독재자로 변해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새로운 압제자가 된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이 좋은 예다. 그 결과,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게 되며, 이 점은 토론과 논쟁을 위한 새로운 무대가 된다.
새로운 압제자가 되는 비결은
그 대결에 참여했거나
참여하고 있는
도전자들의 의식수준과 비슷해지거나
그보다 낮아지는 것이다.
한도와 균형을 규정해야 할 필요성은
현재 관용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관용은
타당한 민주주의적
이상을 나타낼 수 있다.
동시에
대량 살상, 범죄,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를 비롯한
참혹한 과잉상태를 변명하고
심지어 정당화하기 위해서
극단까지 밀고가는 거짓이 될수도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성향을 '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부른다.
가짜 철학으로 합리화하는 태도와
겉으로만 이상적인 진부한 말들이
이런 성향을 뒷받침한다.
또는
위와같이 동의하고 옹호하고
눈물을 부르는 감상적 연민에 빠지지 않은 채,
잔인한 공격자에 공감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분별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아니다.
곧 "도덕적 등가물"을 만들 목적으로
잔디밭에 잡초까지 심을 필요는 없다.
위에 나온 논의를 통해 볼때,
모든 행동에는
어느 정도 책임과
관리가 따라야 한다.
손상된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감안하기 때문에 유연하지만 그렇다고 어리석거나 감상적이지 않다.
모든 행동에는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가혹한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일에
인본주의가 사회적 승인을 해주거나
심지어 죽음이나 전쟁같은 참혹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2차대전 후에 전후상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양편의 생존자들은 서로를 용서했다. 기실 과격한 폭탄테러 가담자들이 교묘하게 유도된 권위적 믿음체계에 기반하여 행동하였으며, 그들이 이슬람에서 실시하는 극심한 테러리스트 이데올로기 주입 프로그래밍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이 원칙이 현재 효력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연민은
사회적 실재를 부인하지 않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야생 호랑이의 자연미를 사랑하고
음미할수 있다.
하지만
그 호랑이와 안전하게 놀 수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일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실재는 본질의 결과이지
외관의 결과가 아니다.
악을 옹호하는 사람은
다양한 정도의 카르마적 책임을 담은 결과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흔히 사람들이 통탄하면서 내뱉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는 거지?"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신의 정의가 카르마 법칙이라는 원칙에 따라 작용하는, 집단 문화와 전 국가적 재앙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예, 의식수준 1000인 마태오 복음 10장 30절을 보라.
그 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즉 신은 당신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마태복음 10장 29-31절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 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해결
참다운 권위를
제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부모와 더불어 긍정적이고
보람있는 경험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고들
흔히 말한다.
이 시기에
그들이 받는 사랑과 지지는
고집스러움과 자기중심적 통제를 포기한 대가로 받는 보상,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제대로된 부모는
자녀에게 지원자이자 보호자가 되며,
그들이 동일시하는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부모가 이런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면
자녀들은
신을 비롯해 모든 권위있는 인물이나
그 상징들에 대해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원망이나
증오마저 품게될 것이다.
때때로
자아는
엄청난 재앙을 맞이한 후에야
참나에게 항복한다.
진실한 참나는
오로지 영혼이 승리하고
영적 실재가
어둠을 뚫고 빛을 비추는 일에만 정렬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인간의 극단성은 곧 신의 기회"라는 금언이 맞아 떨어진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대참사와
세속의 재난이
오히려 구원을 바라고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신은
두려움의 결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 두려움에 항복했을 때에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존중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똑같이 존중한다는 사실을
명예롭게 여긴다.
여기서부터 누구나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며,
결국 신의 뜻으로 표출된 모든 생명을 존중하게 된다.
에고가 항복하면서
영혼은
존재의 신성함을 알게 된다.
자기존중을 통해서
정중함(465)과 자국민에 대한 존중이 드러나고,
참다운 책임감이라는
용기를 갖는데 필요한
유산과 안목이 나타난다.
자기존중을 기점으로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과
개인적 관리에 필요한
책임감도 시작된다.
존중은
자부심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그 핵심에는 겸손함, 고마움, 감사함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와 앎의 신성함을 지각한다.
이 신성함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대영광송의 감탄으로 표현"된다.
첫댓글 존중은
자부심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그 핵심에는 겸손함, 고마움, 감사함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와 앎의 신성함을 지각한다.
이 신성함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대영광송의 감탄으로 표현"된다.